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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역사학 및 뉴라이트역사학 비판] 역사의 정치 도구화를 우려한다: 건국절, 국적 논쟁 비판_정일영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1.05 BoardLang.text_hits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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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0월(통권 68호)

[제4발표] 
 
 

역사의 정치 도구화를 우려한다: 건국절, 국적 논쟁 비판

 

 

정일영(서강대학교)

 
 
건국절 논란이 시작된 것도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그 내용에 대해서야 수많은 학자들이 논의해 온 바, 이 요지문에서 또다시 그것을 길게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건국절’이라는 용어 자체가 몰역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건국절을 만들자는 주장이 학문적인 논의를 할 가능성을 전혀 열어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인가? 이 주장에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고, 역사는 정치적 수단으로 소환되었다. 2006년 7월, 이영훈 교수가 언론을 통하여 “우리도 건국절을 만들자”라는 컬럼을 쓴 직후, 곧바로 한나라당 측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변경하는 국경일 법안을 제출했고, 이명박 정부 또한 ‘건국 60년’ 관련 사업을 추진했으며, 박근혜 정부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로 적극 호응했던 것만 상기해도, 건국절 논란이 역사를 정치 도구화하면서 빚어진 촌극이라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정치 집단만이 역사를 도구화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면, 안타깝게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역사를 도구화하는 현상은 진영과 상관없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국적 논쟁’이다. 물론 일제 식민지 시기, 한인들의 국적 혹은 국제법상 지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실은 다양한 방면으로 연구된 주제다). 하지만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일제시대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다”라는 발언은 학계의 연구 성과를 깡그리 무시한 발언일 뿐만 아니라 독립기념관이라는 상징적 기관의 관장으로서 무책임하고도 부적절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발언들은 의도적으로 짧고 단정적이다. 즉, 일종의 도발인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역사의 정치 도구화’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일제 식민지 시기 한인의 국적 관련 발언이 논란이 되자, 정치권에서는 이 주제를 검증의 ‘리트머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직자 후보자를 대상으로 한 인사청문회에서 역사관을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질문을 던지며 ‘예/아니오’로만 답변하라고 요구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공직자의 역사 인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렇게 단순한 질문과 답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같은 이의 (의도적인) 무책임한 단답형의 발언에도, 우리는 더 상세하고 긴 질문을 던지고 의미와 해석이 담긴 답변을 찾아야만 한다. 설사 그가 정반대의 단답형 발언을 한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국적의 개념, 국제법적 해석, 법적 근거와 병합조약 불성립의 문제, 그리고 ‘국민의 지위’에 대한 문제에 대해 수없이 언급하고 논쟁해왔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역사를 이용해 편한 방식으로 도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역사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한다.

양분화된 극단의 구도 속에서 생산적인 논의는 불가능하고, 학문에서 반드시 필요한 비판과 창의성은 고사한다. 그간 극우 혹은 뉴라이트가 국가(남한 정부)의 정통성에 집중하기 위해 제기한 1948년 8월 15일 건국절에 대한 주장에, 민족주의 경향의 학자와 그 외피를 활용한 정치 집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대응했다. 양쪽 모두 ‘정치적 정통성 쟁취’를 위해 역사를 소비했다는 점에서, 도구화의 구조는 묘하게 닮아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평가와 의의, 입장이 학자마다 다르며, 나름의 논쟁이 있었다는 것은 역사학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이 극단의 시대에 다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졌다. 후자에 이의를 제기하면 뉴라이트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구도 속에서, 많은 학자들은 자아검열을 하거나 냉소 지으며 침묵하거나 엄혹한 시절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12.3 내란을 극복하는 동안에도 질문은 토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검증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2025년, 임시정부 법통 계승론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곧바로 ‘역사 내란’으로 치환되고, 그 목소리를 내는 자들을 ‘척결’ 대상으로 규정한다. 임시정부를 평생 연구해 온 학자의 글이나 말이 아니라, 정치인의 입에서 역사를 빌미로 극단의 언어가 유통된다. 공교롭게도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선포문에도 “척결”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척결’(剔抉). 뼈를 바른다는 뜻의 척(剔)자와 도려내고 긁어낸다는 뜻의 결(抉)자로 구성된 단어다. 사전적 의미로 “살을 도려내고 뼈를 발라냄”이라는 뜻이 “나쁜 부분이나 요소들을 깨끗이 없애 버림”의 뜻으로 이어진다. 속 시원하게 들리지만, 작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거리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적 가치와 너무나 거리가 먼 단어다. 도대체 누가 ‘나쁜 부분이나 요소’를 규정하는가? 인간의 역사와 삶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단칼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단순하던가? 만약 그러하다면 굳이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가?

나는 정치적 입장이 없는 역사 서술, 역사관은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만이자 비겁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으니까. 하지만 기차를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틀어보겠다고 역사를 땔감으로 써서는 안 된다. 역사를 수단화하는 이들은 늘 그들의 입장을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치장하는 포장지로 역사를 착취했다.

내란을 일으켰던 전 정부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역사관을 주입하려 ‘리박스쿨’ 따위를 운영 및 지원했던 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적 효과를 노려, 또다시 정부나 정치인이 개입해 ‘보기 좋고 매끈한 역사’ 따위를 만들려 한다면, 나는 그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저항할 것이다. 토론토의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written)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합니다.” 나는 그의 발언에 적극 동의하며, 자유롭게 논쟁할 장을 열어두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에 걸맞은 역사적 실천이라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리박스쿨’ 따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역사가 특정 인물이나 집단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다시 전락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