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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논문을 말한다
[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려전기 도병마사 연구_이현경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1.05 BoardLang.text_hits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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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10월(통권 68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고려전기 도병마사 연구(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3. 02.)
이현경(중세1분과)나의 석사 논문은 정도전의 벽이단론에 관한 글이었다. 이 논문을 쓰고 나니 나의 한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정도전은 왕조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당시의 흐름을 읽고 자신의 지향을 갖춘 인물인 반면 나는 내가 사는 현실이 어느 지점인가에 대한 인식도 갖지 못하는, 평범하다고 하면 후한 평을 받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평범한 인간이 비범한 인물의 사상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장’이라는 것을 하기가 어려웠다. 주장이 없다는 것은 논문을 쓸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공부를 그만 두려고 하니 어느덧 박사과정을 수료한 상태였고, 무엇보다 한 줌 남은 사료의 빈틈을 맞춰보는 일이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힘들지만 재밌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꽤 좋겠다는 생각에, 그러면 내가 ‘주장’을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무엇일까 고민해보았다.
머릿속에 둔탁하게 남은 기억이 하나 있었다. 세월호 이후 해경을 해체한다는 뉴스였다. 처음 그 기사를 보고나서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속속 이어지는 비평기사를 보며 머리가 멍해졌다. 해양경찰청이라는 공기관을 해체하는 것의 의미, 파장, 그와 함께 확인되는 ‘관청’의 역할과 구조의 유기성에 대해 나는 하나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경 해체’라는 헤드라인으로 수많은 맥락을 읽어내는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무식한 내가 있었다. 하지만 현상 뒤에 가려진 내용을 도출해내는 작업이 꽤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이라면 고려 후기 연구에 상당히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와 같이 도감의 설치가 빈번하고, 관청의 통폐합 및 개정이 연이어 이루어진 시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사료에 한 줄도 안되는 관청 치폐 기사에 눈이 갔고, 이것들이 모두 행간을 읽어낼 단서로 보였다. 그렇다고 모든 행간이 읽히는 것은 아니었다. 2. 어쩌다가 도병마사를
나의 가장 큰 관심은 여전히 고려말 조선초, 특히 관제 문제에 있었지만, 막상 학위논문의 주제는 고려전기 도병마사가 되었다. 구멍이 듬성듬성한 사료를 기워 놓으며 도병마사의 변화를 추적한 것은, 사실 도평의사사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도평의사사는 충렬왕 5년 도병마사를 개칭한 것이었다. 사료 속에서 도평의사사의 시작은 매우 뜬금없는 조처였다. 무신집권기 전혀 등장하지 않던 도병마사가 고종대 재등장한 뒤로 그 역할은 고려전기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때의 도병마사가 고려전기의 그것과 동일한 것인지도 의심이 드는데, 충렬왕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라는 관청을 새로 설치하지 않고, 굳이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충렬왕 5년 당시 도평의사사를 통해 충렬왕이 추구했던 무언가는, 당시의 도병마사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학위논문은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전환되는 단서를 찾는 과정이었다.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학위논문의 시작점은 2021년 제출한 도병마사의 시원적 형태에 관한 글이었다. 이 글에서는‘국초칭도병마사(國初稱都兵馬使)’라는 백관지 도평의사사조의 기록을 검토하였다. 문종관제의 도병마사는 판사이하 관원과 속관을 갖춘, 심지어 별도의 청사까지 마련된 회의기구였다. 그런데 왜 회의기구를 ‘사자[使]’로 표현하였을까. 기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를 신뢰한다면, 국초 병마의 일을 관장했던 사자가 문종관제에 이르러서는 기구로 분화,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태조대~성종이전, 대상(大相) 이상의 높은 관계(官階)를 가지고 ‘제장회의’에 참여하면서, 그 결과에 따라 변경에 나가 축성을 통해 영토를 확보하고, 확보된 지역의 안정을 총괄하던‘축성책임자[使]’가 도병마사로 ‘지칭’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고, 중신(重臣)들의 회의체인 ‘제장회의’가 ‘문종관제 도병마사’의 시원적 형태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학위논문에서는 국초 도병마사로 지칭된 ‘관원’이 누구인지에 대한 검토 보다, 도병마사(축성책임자)로 파견된 중신이 참여한 그 ‘회의체’에 더 주목하였다. 왜냐하면 문종관제에 나타난 독특한‘기구’로서의 도병마사는, 국초 병마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중신 회의체 전통이 계승된 것이라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국초에는 국방사안을 중신회의와 축성책임자의 일시적 사행을 통해 해결해왔다는 점에서, 이를 특정 관직이나 관청의 업무로 상설화하거나 구조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문종관제의 도병마사와 일대일로 대응되는 국초의 관직, 관청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도병마사라는 명칭과, 그 명칭이 계승된 대상에 차이가 생겼던 것이고, 이것이 백관지기록에도 반영된 것이라 판단하였다. 즉, 고려만의 독특한 기구인 도병마사는 국방사안을 처리하는 회의체 전통을 계승하면서 변화해갔던 것이라고 이해된다.
성종대에는 기존 축성책임자의 역할을 상설직화 하였다. 이것이 동서북면병마사다. 병마사는 동․서북면에 파견된 관직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중앙과 변경지역의 상황을 연결했던 축성책임자의 역할 중에서 한 축만을 담당할 수 있었다. 때문에 병마사 위에는 최초로 상위직인 ‘판사’가 설치되었는데, 병마판사는 중앙에 머무르면서 병마사를 요령(遙領)하였다. 이로써 동서북면에 파견된 병마사와, 개경에 머무르며 멀리서 이들을 통령한 병마판사직을 통해, 국초 도병마사로 지칭된 축성책임자의 역할이 구조화되었다. 이때 병마사의 역할은 국초 축성책임자의 역할 즉, 아직 고려의 영토로 편제되지 않은 지역[閫外]에서 군사 활동을 통해 거점지역[城]을 확보함으로써 고려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築城]이었다. 한편 고려는 성종 12년 거란과의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확보할 수 있었는데, 당시 해당 지역은 여진의 거류지로 고려의 입장에서는 곤외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성종 13~15년 사이, 강동 6주의 축성을 총괄한 것은 서희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이곳에 파견되어 있던 병마사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중앙과 곤외지역에 파견된 병마사의 공조가 필수적이었다는 의미다. 또한 단기간에 여진을 몰아내며 축성을 해야했던 만큼 중앙으로부터 인력과 물자의 지원이 요구되었고, 행정 실무를 처리할 속관들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병마사는 휘하에 판관과 녹사직을 가지고 있지만, 개경의 병마판사에게는 별도의 속관이 없었다. 당시 조정에 이 사안이 가진 비중을 생각하면, 원활한 진행을 위해 중앙의 병마판사 휘하에도 행정실무를 담당할 녹사직을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만일 그러하다면 국초의 중신회의는 성종대에 이르러 개경의 병마판사와 녹사, 현장의 병마사와 휘하 속관으로 각각의 기구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현종 즉위 직후부터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변경지역의 긴장은 꽤 긴 시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는 태조대 이래 꾸준히 북진해 왔던 고려와 동진해 왔던 거란이 만나게 되면서, 고려는 더 이상의 북진을 추진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고려는 곤외지역에서 전제권을 발휘하던 병마사의 역할을[兵馬使閫外專制] 변경시켰다. 곤내와 곤외를 구분하여 각각 도호부와 병마사를 통해 운영했던 방식에서, 이를 각각 하나의 ‘계’로 통합하여 병마사를 이곳의 지방장관으로 삼은 것이다. 그 결과 병마사는 기존의 전제권을 가진 곤외 지역과 더불어 고려의 영토로 기편제된 주진지역을 함께 총괄하는 지방장관이 되었다. 이것은 병마사가 해당 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모두 총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서북면을 일종의 거대한 국방지대로 운영하게 되면서 이 지역의 민생과 통치안정을 위한 모든 사안이 군사력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관할 범위의 확대는 사안의 범주 확대와 업무량의 증가를 의미한다. 그 결과 국방 사안을 논의하던 회의에 병마판사로 제한된 인원 외의 재신과 추밀을 참여시키면서 회의원을 분화시켰다. 그 결과 국초 장군직을 대유한 이들이 국방사안을 논의하던 중신회의는, 병마판사간 회의를 거쳐, 판사-사-부사-판관-녹사 및 이속을 갖춘 회의기구가 되었던 것이다.
선종대 이래 여진의 성장이 눈에 띄면서 동북면을 중심으로 방어체계 구축이 활발해졌다. 숙종대 별무반의 편성과 예종대 여진정벌, 동북 9성 확보와 남도 백성 7만여 호의 사민은 ‘국방사안’을 총괄했던 도병마사의 관할 영역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여진정벌은 고려가 유일하게 개전한 사례이고 전쟁의 결과가 온전히 정부의 책임이 되었던 만큼, 이에 대한 결정은 조정의 중론을 수렴하여 이루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예종대에는 문무3품관을 비롯하여 4품의 도병마판관까지 포함한 확대 회의가 자주 개최되었다.
전쟁의 방향성을 결정할 때, 현실에 기반한 구체적인 정보는 필수적이다. 예종대에는 초기부터 군대의 징발과 훈련을 위해 점군사(點軍使)가 파견되었다. 이들이 파악한 정보는 국방사안에 관한 최고 의결 기구인 도병마사로 수합되었을 것이고, 판관직은 이러한 일의 실무책임자에 해당하므로 도병마판관은 확대회의에서 가장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관직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4품의 도병마판관이 조정의 확대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과정에서 도병마사는 양계 및 전장에 파견된 관원과 남도에 파견된 군정 사자들의 보고가 도달하는 곳이 되면서, 기존의 의결기능과 더불어 행정기능이 확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이 시기를 전후로 병마사의 보고 체계가 전환되는 경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병마사는 국왕에게 직주(奏)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 실제 여진정벌 이전까지 병마사의 보고는 오직 ‘주’의 형태로만 사료에 남아있었지만, 이 이후로는 금의 침략을 알리는 것까지도 국왕에게 직주가 아닌‘보’체계를 사용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병마사의 보고체계가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보’하는 대상은 당연히 국왕이 아닌 도병마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도병마사는 여진정벌을 거치며 국방사안에 관한 의결기능 이외에 행정기능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내포하게 되었다.
3. 도병마사에서 도평의사사로의 전환으로 무엇을 보고 싶은가
도병마사는 회의체로 시작하여 회의기구의 꼴을 갖춰 갔다. 행정 집행에 목적을 둔 관청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는 이 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관청[司]을 만들었고, 조선에서는 고려말 의정과 행정기능이 혼재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와 6부로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도병마사에서 도평의사사로 전환되는 모습은, 회의체가 ‘기구’를 거쳐 하나의 ‘관청’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도병마사가 고려의 귀족적 성격을 보여주는 기구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국초부터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이 국왕이 사여하는 관계(官階)를 기준으로 고위직에 해당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도평의사사를 넘어 의정부에 참여하는 이들은 정확한 소속 관청과 관직, 관품을 가진 관료들이다. 즉, 골품을 벗어나지 못했던 신라 관료제의 모습에서, 과거로 입사하여 고과를 통해 승진한 관료의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에 도병마사에서 도평의사사로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병마사와 도평의사사는 고대 관료제적 유제가 완숙한 중세 관료사회로 변해 가는 과정을 드러내는 소재가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으로 추후 연구에서는 도평의사사의 역할과 위상의 변화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중세 관료제가 어떠한 과정을 거치며 발전해갔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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