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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개항기~일제시기 조선의 유곽 조성과 변화 과정 연구_박현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BoardLang.text_date 2025.10.03 BoardLang.text_hits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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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5년 9월(통권 67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개항기~일제시기 조선의 유곽 조성과 변화 과정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5. 02.)

 

박현(근대사분과)

 
 
1. 근대기 조선의 유곽을 연구하는 이유
 
‘유곽’은 공권력의 공인 아래 성매매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관보 등에서 표기되는 공식 명칭은 ‘대좌부 영업 지역’이지만, 유곽 내부에서 실제로 성매매하던 업소 또한 ‘대좌부’라고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고자 본 논문에서는 유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유곽은 16세기 후반 일본에서 처음 등장했고, 조선에서는 개항 이후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오면서부터 등장했다. 1902년 부산에 처음 유곽이 조성된 것을 시작으로 해방 당시 기준 부 22곳 중 20곳, 읍 124곳 중 19곳에 유곽이 조성되는 등 유곽은 조선의 도시 공간에서 핵심적인 공간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유곽은 조선에 거류하는 군인과 일본인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한편, 이들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 유곽은 개항 이후 일본인이 조선의 도시로 침투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비율이 높은 행정구역인 부의 경우 대부분의 부에 유곽이 조성되었고, 개항장에 유곽이 먼저 조성된 뒤 개시장을 거쳐 내륙도시에까지 유곽이 조성되었다는 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유곽은 근대기 조선에서 일본의 정책과 성매매업자의 이익 추구가 어떻게 맞물려 작동했는지를 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유곽은 공권력이 공인한 공간이었지만, 유곽의 조성은 성매매업자나 유곽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한 재조선 일본인 자본가에 의해 진행되었다. 즉 공권력은 성매매업자를 내세워서 유곽을 조성하게 하고 관련 규칙이나 성병 검사 등을 통해 관리하고자 했고, 이러한 의도에 맞추어 성매매업자는 유곽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기 조선에 조성된 유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본 논문에서는 여러 도시에 조성된 유곽을 비교 분석하여 근대기 조선의 유곽이 가진 특징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에 개항도시 세 곳(부산, 인천, 군산)과 내륙도시 세 곳(경성, 평양, 대구)을 선정해 해당 도시들의 유곽 조성 및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해당 도시들을 선정한 이유는 이 도시들이 근대기 조선의 대표 도시들이었기 때문이다. 유곽은 방문 비용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유곽을 방문하는 남성의 수요가 어느 정도 필요했다. 따라서 근대기 조선의 대표 도시를 살펴보는 것이 곧 해당 시기의 대표적인 유곽을 살펴보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선정한 도시들의 유곽은 대표성을 가질 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산은 조선에 처음으로 유곽이 조성된 도시이다. 인천은 유곽 조성을 일본 외무성이 반대했다는 점에서 해외 유곽 조성을 일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군산은 유곽 부지 선정 과정에서 특징적인 부분이 드러나는 도시이다. 경성은 유곽이 가장 번성했던 도시이다. 평양은 조선인유곽 조성과 관련해 특징적인 부분이 드러나는 도시이다. 대구는 철도와 유곽 조성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도시이다.
 
 
2. 유곽은 어떤 공간이었나?
 
여섯 도시의 유곽을 비교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개항도시에 조성된 유곽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확인된다. 개인(업자)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곽 조성을 주도한 경우가 많았고, 조선인유곽은 조성되지 않았다. 개항도시별 유곽의 특성을 살펴보면, 부산은 특정 고객(철도 또는 어업 종사자)을 대상으로 한 유곽이 있었다. 인천의 경우 유곽이 조성된 이후 또 다른 유곽의 조성 시도가 있었다. 군산은 유곽 영업지 후보지가 세 곳이나 되는 등 유곽 조성 과정에서 이권 쟁탈이 치열했다.

다음으로 내륙도시 유곽은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징이 확인된다. 도시별 대표 유곽은 민단이 주도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고, 도시별로 처음 조성된 유곽은 철도나 군대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조선인유곽이 조성된 도시가 많았다. 내륙도시별 유곽 특성을 살펴보면, 경성은 유곽이 네 군데나 있었으며 다른 도시에 비해 많은 수입을 거두었다. 평양은 개인(업자)가 주도한 유곽이 많았고, 조선인유곽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 대구 유곽은 불황이었던 시기가 길었다. 불황의 원인은 유곽의 후미진 위치, 대구의 경제 상황, 유곽을 대신할 사창의 존재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개항기~일제시기 조선의 유곽을 분석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주요 변수로 ‘유곽 조성 주체’, ‘철도·군대와의 관련’, ‘조선인유곽 조성’ 등이 확인된다. ‘유곽 조성 주체’는 유곽 조성 목적과도 관련되므로 위에서 언급한 세 변수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변수라 판단된다. 조성 주체는 개인(업자)와 민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철도·군대와의 관련’ 여부는 내륙도시 유곽과 관련되어 있다. 내륙도시는 군대 주둔이나 철도 부설을 위해 기존 도시에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형성된 만큼 철도·군대와 관련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인유곽 조성’ 여부는 조선인유곽이 조성된다는 것은 해당 도시가 기존에 조성된 유곽에 조선인유곽까지 소화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부분을 생각하면, 근대기 도시 중 조선인 남성 인구가 많았던 도시를 분석하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개항기~일제시기 조선의 유곽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짚어보면, 유곽은 착종(錯綜)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유곽은 새로운 도시 공간이었다. 해당 시기 새롭게 만들어진 공간이 유곽만은 아니었지만, 유곽은 주목받는 공간이었다. 부침이 있긴 했지만 유곽은 도시 유흥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을 만큼 방문객이 많았고 매출도 높았다.

또한 유곽은 기회의 공간이었다. 경성·인천의 토지대장을 통해 해당 지역 유곽의 토지 소유자를 보면, 유곽의 토지를 소유한 일부 성매매업자를 제외하면 성매매업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토지를 소유한 성매매업자 중에서도 조선으로 오기 전에는 성매매업이 아닌 업종에 종사했던 경우가 많았다. 거류민단과 부의 입장에서는 유곽 토지를 성매매업자에게 빌려주고 세금을 받아 고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경성에서는 학교조합이 유곽의 토지를 소유해 관련 세금을 교육에 활용하였고, 대구에서도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경성과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반면, 유곽은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유곽에서 성매매하는 여성은 전차금으로 성매매업자에게 묶여 있어 자유롭게 성매매를 그만둘 수 없었고, 유곽 밖으로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공간적 측면에서도 유곽은 조성 당시 일본인 거류지의 외곽에 위치하고 능선 등으로 주변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유곽이 조성된 이후 시가지가 유곽이 조성된 곳까지 확대되면 시가지 밖으로 유곽을 이전하라는 요청이 제기되었다.

유곽은 차별의 공간이기도 했다. 경성의 경우 조선인유곽이 기존 유곽 동쪽에 조성되었다. 두 유곽은 지리적으로 맞붙어 있었지만, 당대 소설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두 유곽은 분리되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 ‘일본인유곽’은 방문 비용이 비싸지만 위생적인 공간, ‘조선인유곽’은 방문 비용이 저렴하지만 비위생적인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두 유곽은 지리적으로 가까웠지만 다른 유곽으로 인식되었고, 조선인유곽은 일본인유곽과 차별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모습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유곽 내에서 같이 영업하고 같은 대좌부를 방문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유곽 안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분이 흐려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선인에 대한 구별·차별은 유곽 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