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역사랑' 2025년 7월(통권 65호)
[기획연재]
공무수행 역사학의 활용과 지역사 연구 ⑥:
연구자의 칠백의총, 지역민의 칠백의총, 관련자의 칠백의총
박범(중세2분과)
칠백의총전시기념관 연구용역의 참여
2019년 9월경, 전남대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칠백의총에서 새로 전시기념관을 만드는데 혹시 자문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칠백의총이 집과 가까운 충남 금산에 있고, 자문이기에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을 전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관련 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한채 칠백의총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칠백의총 소장님을 비롯하여 칠백의총관리소의 선생님들과 기념관이 전시시설 제작을 맡은 업체 관계자를 만났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자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대화를 하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단순한 자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문헌전문가는 나 혼자 뿐이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칠백의총관리소에서 오신 분들도 전문가가 아니었다.
당시 칠백의총관리소에는 학예연구사가 없었던 것이다. 업체에서도 관리소에서도 칠백의총 전시 문헌에 대해서는 아는 분이 없었고, 그 모든 일은 결국 나 혼자 맡았다. 전시자문 내내 내가 마치 칠백의총관리소의 학예연구사가 된 느낌이었다. 당시 관리소 소장님의 요청으로 학예연구사가 칠백의총관리소에 배치된 것은 연구용역이 다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연구용역 업체에서는 제안서 ppt를 보여주면서 어떻게 전시실 배치를 공간구성할 것인지에 대해서 보여주었고, 칠백의총관리소에서는 전시싷의 공간 재질에 대해서 업체에 주문을 하는 정도였다. 제안서 ppt에는 어떠한 내용을 채워야 할지 전혀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그것은 내가 채워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시간이 오래 들지 않았다.
소장님께 관리소에서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달라고 부탁했다. 자료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기본은 조헌의 문집인 중봉전집이었고, 칠백의사 명단, 후손 명단, 박정희 대통령 시절 보수정화 자료, 유물 현황 리스트 정도였다. 모든 정리 내용의 기본은 중봉전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자료들을 모두 무시한채 전체 내용을 새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우선 관련 논문부터 정리했다. 칠백의총 자체에 대한 연구는 전무했고, 가장 기본이 되는 연구성과는 1990년대 초반에 나온 금산전투에 대한 특집 논문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자료에 대한 논문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금산전투를 기록한 정경운의 『고대일록』이나, 『항의신편』 정도가 유의미한 자료로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호남절의록』 같은 자료는 칠백의총에서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이유는 뒤에 후술하고자 한다.
금산 지역에는 다양한 전투가 있었는데, 금산전투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웅치전투나 이치전투가 오히려 더 주목을 받았다. 웅치나 이치는 전북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전적지였다. 지자체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우리 지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전투 상황을 더 부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전북 지역에서는 도 차원에서 접근하는 반면, 금산 지역은 군 차원에서 움직이다 보니 금산전투의 연구 성과가 미흡한 것처럼 보였다. 금산전투는 전라북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전적이기 때문이다.
칠백의총전시기념관이기 때문에 전투 자체 보다는 기념물로서의 성격에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금산전투에 대해서는 더 새로운 내용이 확인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최근 금산전투에 대한 일본 자료를 확인한 전남대 김경태 교수에 따르면 2차 금산전투의 경우 현재까지 직접 기록한 일본자료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금산전투 자체 보다는 칠백의총 조성에 대한 자료를 찾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 칠백의총 관련 자료는 의외로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칠백의총 관련 자료를 찾아가면서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칠백의총은 단순하게 하나의 의총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중에 이를 논문으로 투고하게 된 이유이기도 한데, 칠백의총은 여러 기념물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곳이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곳이 “종용사”라고 하는 사우가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칠백의총에 가면 의총 앞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건물 이름이 “종용사”였다. 그러므로 “칠백의총”과 “종용사”를 모두 찾아야 했다.
나는 내가 찾은 자료를 가지고 전시 업체에서 설계한 내용을 채워 넣고, 어떠한 자료를 소개할 것이며 해당 전시의 멘트는 무엇으로 하고 어떠한 자료를 복제해야 하는가를 모두 기술해야 했다.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글을 하나하나 작성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해당 사실이 전거가 확실해야 하므로 자신이 없는 사실은 배제하고 되도록 개관적으로 기술해야 했다. 소위 박물관 전시에 대한 내용 구성을 하는 것이 처음이어서 그런지 논문을 작성하는 것과는 또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새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글로 구성할 수는 없었다. 되도록 고지도와 그림이 들어가야 했다. 고지도의 경우에는 칠백의총의 무덤과 칠백의총 옆에 세워진 일군순의비가 그려진 것을 모두 찾아서 보여주었다. 금산군 지도를 보면 칠백의총이 대부분 표기되어 있었다. 또한 안방준이 저술한 『항의신편』을 보면 조헌의 행적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삼강행실도』를 보면 내용과 함께 그림이 첨부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기존에는 없던 것이므로 되도록 새로운 자료와 쉽게 볼 수 있는 고지도, 그림을 찾고자 했다.
그림 1. 고지도 속 칠백의 총과 『항의신편』 삽화
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여지도』(좌), 국립중앙도서관 『항의신편』(우)
자료를 수집하고 업체가 요구하는대로 내용을 채워 넣으면서 칠백의총 연구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은 좀 너무 답답했다. 연구해야 할 사실은 너무 많았는데, 전시를 위한 공정은 3개월 안에 마쳐야 했다. 연구와 전시 내용 구성을 사실상 동시에 혼자 하고 있던 셈이다. 그래서 너무 답답해서 칠백의총 전시 자료 수집과 관련된 의견을 적어 관리소 소장님께 메일로 보냈다. 내용은 간단했다. 연구와 전시를 둘다 하는 건 혼자 무리이다. 전시를 위한 내용을 내가 얼마나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파고 파면 한 없이 나올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마음만 먹으면 칠백의총의 700명을 다 찾을 수 있을 듯 했다. 당시 알고 있던 인물은 200명 남짓이었다. 왜냐하면 조헌의 중봉전집에 있는 인물만 정리했기 때문이다. 고경명의 의병은 『호남절의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영규대사의 경우에는 성해응의 『연경재전집』에 수록된 ‘금산군절제신전’에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칠백의총의 700명은 조헌과 그의 의병이지, 고경명과 영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후술할 논란은 모두 여기서 출발했다.
마지막으로 『종용당사실』이라는 책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자료를 찾으면서 알게된 책인데, 종용당은 종용사를 가리키는 것이고, 이는 칠백의총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었다. 해당 책의 가치를 칠백의총관리소에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역사자료수집에 이미 올라 있는 자료였고, 관리소에서도 1책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1960년대 나온 『금산군지』에는 영인하여 수록되어 있었다. 그만큼 금산 지역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자료였다. 당장 이 책부터 분석해야 할 듯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더는 답을 들을 수 없었고, 전시 자문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금산전투가 아닌 칠백의총 그 자체의 역사성
전시에서 역사적 사실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금산전투가 중요할까. 칠백의총이 중요할까. 사실 이것이 결정되어야 전시의 내용 구성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회의 내내 전투 자체를 빼자고 말했다. 임진왜란 관련 전투는 이미 너무 많은 박물관에서 다루고 있어서 굳이 여기서 까지 넣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조선후기 내내 칠백의총의 역사를 보면 당시 조선 사람들이 임진왜란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 추모기념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공간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 의견은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못했고, 결국 전시기념관 도입부에 임진왜란의 일반에 대한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내 생각은 전시도록에 반영하고자 했다. 칠백의총전시기념관 도록은 2개의 원고가 첨부되어 있다. 금산전투에 대한 내용은 임진왜란을 전공하신 전남대 김경태 교수님이 쓰셨고, 나는 칠백의총 조성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그림 2. 칠백의총기념관 상설전시도록과 수록원고
출처: 칠백의총관리소
자료를 찾으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칠백의총은 여러 시설이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당연히 의총(義塚)이었다. 의총은 임진왜란 당시 여러 곳에서 조성되었는데 대부분은 순절한 이름이 없는 인물 중심이었다. 그런데 여러 곳의 의총 중에서 그 역사성이 매우 자세한 곳이 바로 칠백의총이었다. 여러 지리지를 통해 의총이 금산전투 직후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의총이 만들어진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1603년(선조 36)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졌다. 자료에 따르면 호서와 호남의 유생들이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글은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지었다. 순의비가 세워진 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의단(義壇)이 조성되었다. 묘와 비석은 있는데 제사를 위한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의단은 1634년(인조 12) 금산군수 김성발과 제원찰방 조평이 서로 상의하여 의총 앞 높은 언덕에 설치했다고 한다. 이때 전라도 군현의 수령과 향교에서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칠백의총은 조헌과 조헌의 의병을 위한 공간이었다. 고경명도, 영규도 없었다. 순수하게 조헌의 공간인 셈이다. 지금과 같은 칠백의총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이곳에 사당과 재사가 건립된 이후였다. 1647년(인조 25) 금산군수 홍처대가 금산군의 부로(父老)들과 상의하여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강학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건물의 기문(記文)은 송시열이 지었다. 금산 지역 사람들은 고경명, 변응정, 영규를 함께 모시는 공간으로서 칠백의총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모두 금산 지역에서 순절한 의병들로 금산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벌어진 임진왜란의 투쟁을 기억하고 이를 전승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제 칠백의총은 금산 지역민이 기억하고 싶은 임진왜란의 추모 기념 공간이 된 것이다. 이후 1663년(현종 4) 금산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받고 종용사라고 하게 되었다.
‘기록으로 본 금산 전투의 기억과 전승’에는 『금산군읍지』에 수록된 고적(古蹟)을 소개했다. 보통 금산전투라고 하면 연곤평 전투를 많이 언급했다. 연곤평은 지금 현재 칠백의총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가리켰다. 조헌과 그의 의병들은 영규와 그의 의승들과 함께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금산군읍지』의 고적조를 비롯한 대부분 지리지의 금산군 항목에는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조헌과 700명의 의병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곳으로 연곤평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에, 승장 영규가 왜적을 토벌하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곳으로 와여평(瓦余坪)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순절한 장소가 명확하게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 모든 지리지와 읍지가 그랬다. 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내가 임진왜란 전공자가 아니니 알 수 없었고, 이 문제를 더 파고들면 금산전투 자체에 대해서 분석해야 하는 부담이 있어서 기록이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만 지적했다.
내가 또한 원고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종용사였다. 대체 종용사는 어떻게 운영되어 있던 것일까. 이는 앞서 언급한 『종용당사실』에 잘 언급되어 있다. 1634년 의단을 설치할 때 부조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었고, 1647년 순의재라는 건물을 건축할 때 각 군현에서 부조한 기록도 확인된다. 이외에도 칠백의총에서 운영한 전답의 규모, 의총을 관리하던 담당 마을, 종용사의 강학활동 등도 확인이 되었다. 칠백의총은 간단한 공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금산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면서 학문을 진흥하고, 임진왜란의 기억을 추모하는 곳이었던 셈이다.
종용사에 모셔진 위패도 지금과는 달랐다. 위패 안치에 대한 기록은 두 곳에서 확인된다. 하나는 『열읍원우사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황윤석의 『이재난고』였고, 이재 황윤석의 일기를 보면 칠백의총에 한 번 들린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록벽이었던 그는 일기에 칠백의총과 관련된 다수의 내용을 수록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위패 위차였다. 고경명과 조헌을 주향으로 하고 나머지는 배향이었다. 특이한 것은 승장인 영규인데, 종용사 서변의 별사(別祀)에 주향으로 모셔져 있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다 보니 이 내용이 나중에 이렇게 크게 문제가 될 줄 몰랐다. 영규가 별사로 모셔졌다는 사실이.
마지막으로는 일제 강점기 수난과 해방 이후의 성역화 과정을 다루었다. 종용사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과정에서 사라졌다. 조선시대 내내 유지되었던 사우 건물은 이때 없어졌다. 건물은 복구하지 못했으나 제사를 계속 유지되었다. 이는 식민지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되는 자료는 1937년 10월, 종용당에서 추계 대제를 지냈다는 것이다. 금산군수를 비롯한 군내 주임과 유림들이 참여했다고 『매일신보』는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에 맞서 싸운 의병장에 대한 제사를 식민지시기에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칠백의총의 수난은 1940년대에 있었다. 내선일체가 강화되자 금산군에서는 일본인 경찰서장을 중심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는데 주로 비석이 부서졌다. 지금도 여전히 부서진채로 남아 있는 비석은 이때 수난을 당한 것이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 조사에서 금산군의 3대 사건으로 지정된 것이 바로 ‘칠백의사총과 종용당 건물 철거사건’이었다.
복구의 움직임은 1952년을 기점으로 지역 사회에서 진행되었다. 이 해는 6주갑이 되는 해였다. 해당 자료를 나는 최병채의 일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금산군 지역의 유림으로 한문으로 일기를 남겼는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되어 있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1952년 1월 28일에 기념시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때 날짜가 변경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금산군 지역 유림들이 회의를 통해 음력 8월 18일이 순국일이기 때문에 이날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아래의 사진으로도 남아 있다. 이 사진은 구글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그림 3. 1952년 칠백의사 6주갑기념
출처: 필자 구글 검색
지금의 칠백의총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박정희가 1963년 5월 참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성스러운 유적지가 황폐화되어 있다고 보고 보수정화를 지시했다. 1차와 2차 성역화 사업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칠백의총이었다. 성역화가 마무리되자 칠백의총 관리부서는 1975년 충청남도에서 문화공보부로 바뀌었다. 제향일은 1976년에 변경되었다. 매년 음력 8월 18일에 지내던 것을 해당 일자의 양력 9월 23일로 변경한 것이다. 1592년 8월 18일이 양력으로 9월 23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나는 원고를 작성했고 해당 원고는 도록에 가장 마지막으로 실렸다. 그리고 원고는 학술논문의 형식을 갖추어서 『국학연구』 52집에 “금산전투 기억의 전승과 칠백의총의 역사”로 실을 수 있었다.
법보신문의 문제제기
『국학연구』에 논문을 투고하는 것으로 나와 칠백의총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금산 지역사의 중요한 축이었던 칠백의총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찾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고 있었다.
『법보신문』에서 2023년초 칠백의총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게 된 것이다. 칠백의총에서는 당시 내가 이전에 참여한 연구용역과 비슷한 시기에 종합정비사업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문화유산 종합정비계획은 국가지정 문화유산의 경우 주기적으로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여 문화유산 관리를 하고 있었다. 2021년에는 2단계 기본 계획이 수립되어 실행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법보신문』에서 이 기본계획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요지는 간단했다. 영규대사를 모시는 별사를 왜 기본계획에 넣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영규 대사의 별사에 대한 내용이 도록에 있는 내 원고에 수록되어 있는데 칠백의총에서는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본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두 연구용역은 전혀 별개로 같은 시기에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나도 기본계획 연구용역이 수립되는지 전혀 몰랐다. 나중에 읽어보니 전혀 내가 언급한 역사적 사실은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자문으로 참여한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보신문』에서는 더 나아가 이를 국회 차원에서 움직였다. 국회위원 중에서 불자 모임인 국회 정각회가 주최가 되어 “금산전투와 칠백의총의 재조명”이라는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칠백의총’의 명칭을 ‘금산의총’으로 바꾸어야 하며, ‘임진왜란 참전 의승의 역사’를 발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림 4. 국회 정각회 주체의 칠백의총 학술대회
그러나 해당 학술대회는 문제가 많이 보였다. 칠백의총에 대한 본질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오직 왜 의승을 홀대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금산전투를 재조명하여 새로운 사실이 나온 것도 아니고, 칠백의총을 재조명한 것도 아니었다. 금산의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통해 영규와 의승을 재조명해야 한다는 말을 한목소리로 낼 뿐이었다.
참여자 중에서 사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문화재청 보존국장이었다. 그는 2011년에 사적분과에서 명칭변경과 관련된 내용이 한번 다루어졌지만 문화재위원들을 설득할 만한 연구 자료가 없어서 무산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또한 법보신문 편집국장은 칠백의총 명칭이 또다른 역사오류를 불러낸다고 하면서 다른 사적처럼 명칭변경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명칭변경이 목적이었던 것 같았다.
사실 이러한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 웃음이 났다. 결국 내 도록에 있는 원고를 보고 일어난 일처럼 보였다. 그러면 나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을 왜 초점이 흐려지면서 역사적 사실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가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그러려니 하면서 잊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르던 어느 날, 불교문화유산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다. 칠백의총 관련 연구 과제를 진행 중인데, 자문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내가 공부하던 칠백의총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영규대사 관련 연구용역의 참여
불교문화유산연구소의 선생님을 공주에서 만났다. 이것저것 말을 들어보니 1년전 국회에서 진행된 바로 그 문제제기가 실제로 연구 과제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내용인 즉 영규 대사에 대한 재조명과 충남 지역 의승에 대한 연구, 그리고 명칭 변경에 대한 타당성을 확인하는 과제였다. 나는 그동안 내가 연구한 칠백의총이 역사에 대한 나의 논지를 설명했고, 불교문화유산연구소 선생님도 내 논지에 대하여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칠백의총은 단순한 사적이 아니다. 여러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배향 인물의 문중이 칠백의총 제향에 참여했다. 조헌 문중, 고경명 문중, 영규 대사의 조계종, 그리고 금산 지역민을 대표하는 금산문화원이 관계되어 있었다. 이러한 연구과제가 알려지자 문중은 물론 지역사회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특히 배천조씨 문중과 문중을 지지하는 성균관의 유도회가 움직였다. 『유교신문』에서는 연일 이 문제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하는 기사와 칼럼을 게재하고 있었다.
첫 만남이 있고 어느날 중간보고회가 칠백의총관리소에서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 나를 포함하여 배천조씨 문중 회장, 고경명의 문중 기념사업회 회장, 금산문화원 원장을 비롯하여 문중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연구소에서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위원으로 있던 스님을 자문위원으로 참여시키면서 문중에서는 이를 문제제기 삼으며 자문은 사실상 파행으로 이어졌다. 내용을 들어보면 칠백의총의 역사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어 보였고, 표면에 드러난 명칭 변경 문제만을 갈등으로 삼았다. 조헌 문중과 금산문화원에서는 반대를 했고, 조계종에서는 찬성을 한 것이다. 특이했던 것은 고경명 문중의 반응이었다. 조계종의 의견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칠백의총 명칭이 조헌과 그의 의병을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문화유산이 평가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불교문화유산연구소에서는 자신들의 연구과제가 우려와는 다르며 지역민 및 이해관계자이 의견을 수렴하고자 연구 용역을 설명할 기회를 개최하고자 했고, 내가 그 내용을 발표하기로 했다. 장소는 금산 읍내에 위치한 어느 회관 세미나실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칠백의총의 역사가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르며, 특히 칠백의총과 종용사는 다른 공간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내가 그동안 확인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조헌만을 위한 공간에서 조헌, 고경명, 변응정, 영규대사 모두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바뀌었으며, 특히 그것을 금산 지역민들이 만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은 다시 『법보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내가 강조한 내용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는지는 사실 알 길이 없다.
2024년 12월, 연구 용역의 최종보고회가 대전역 회의실에서 진행되었다. 사실 나는 당일 오전에 논산에서 유물 심사를 하고, 오후에 아산에서 토론을 해야 해서 참석할 수 없다고 했는데, 연구소에서 간곡히 부탁하여 잠깐 참여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나도 끝까지 최종보고회에서 내가 확인한 내용을 주장하고 싶었으나 잠시나마 참여한 자리에서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학문적 성과와 현실은 달랐다. 자문위원들은 연구용역 결과와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말만 하고 있었고 그것만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내 발언 차례가 되었다. 나는 문중과 조계종, 관리소, 문화원 분들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했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전에 제발 연구 성과를 축적하시라고. 문중은 문중대로, 조계종은 조계종대로, 문화원은 문화원대로 각자 연구에 매진하라고.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야 현실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정비하고 발전시킬 것인지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이때 처음으로 그 말을 했던 것 같다. 연구자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고. 나는 이후 연구 과제 보고회가 있을 때 마다 이 말을 했다. 연구자들이 왜 칠백의총 연구를 하지 않는지 알고 있냐고. 나는 이 말을 하고 기차를 타러 대전역으로 가버렸다.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중에 연구소로부터 최종보고서 자료집을 책으로 받아 보았을 뿐이다.
칠백의총 문화유산 가치의 중층성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이후 칠백의총과 관련된 기사가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2025년 4월에 나온 불교신문을 보니, “금산 칠백의총, 의승 300명 함께 묻혔다”라는 신문 기사가 있었다. 조헌의 제자인 전승업의 유고집에서 조헌의 의병 700명과 함께 승군 300명을 수습하여 하나의 큰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 기사는 다분히 정치적인 내용이다. 신문 기사에는 그래서 “‘칠백의총’이 아닌 ‘일천의총’으로 불러야 한다는 입장도 제기되고 있다”는 내용을 일부의 주장인 것처럼 쓴 것이다. 사실은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전승업의 유교집이 어떤 책인지 보았는데 2007년 8월에 발굴된 자료였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조헌의 제자로 참여한 전승업의 유교집이 문중의 후손에 의해서 번역본이 이미 나왔으며 이 기록에 전승업 자신이 의병 시신을 수습하고 무덤을 만들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다만 승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림 5. 전승업 유고집 관련 신문기사
사실 이러한 내용은 내 연구 성과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칠백의총과 종용사는 다른 문화유산이지만, 그러한 인식은 보이지 않는다. 금산군읍지에 기록된 조헌과 영규의 전적지가 다르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칠백의총에는 조헌과 영규가 함께 묻혀 있고, 함께 싸우다 전사한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칠백의총과 관련된 사실들을 보면서 학술 연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학술적 가치를 재조명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정치적일 수 밖에 없었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학술 연구는 중층성을 가진다. 하나의 사실만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과 타인이 보고 싶은 것은 다르다.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할 사실과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가치는 동일하지 않다. 결국 누가 논의의 흐름을 주도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흐름은 안타깝게도 연구자의 손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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