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정벌과 사대: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_이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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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12월(통권 36호)

[나의 책을 말한다] 

 

정벌과 사대 :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과 대명의식

(2022, 역사비평사)

 

이규철(중세2분과)

 

한국역사연구회와 대외관계사 그리고 국제관계사

2002년 9월 전역한 뒤 다음해 대학원에 복학하고 1년의 적응기를 가졌다. 2004년 드디어 한국역사연구회에 가입했다. 학부 때부터 한국역사연구회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와 사회운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단체라 생각했기 때문에 꼭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었다. 2004년에 가입할 때에는 선배님들은 많았지만 또래 연구자는 거의 없었고, 신입회원 교육도 없어졌다. 가입 초기 뒷풀이 자리에서 연구회 선배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10년 혹은 20년 후에 몇 사람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2004년부터 대략 20여 년이 지난 뒷풀이 자리에 있었던 중세2분과원들은 대부분 연구회를 떠났을 것 같지만 지금도 연구회원으로 거의 모두 남아 있다.

연구회 생활을 시작하고 3~4년이 지나자 점점 많은 또래 연구자들이 가입했다. 당연히 우리 모두는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고 싶어했다. 통설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읽고 해석했던 사료 속에서 찾고자 노력했다. 나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전역하고 대학원에 복학했을 때 한국사학계에는 생활사 열풍이 불고 있었다. 그런데 관련 책들을 읽어 보았지만 취향에 맞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른 요소는 따지지 않고 오로지 개인 취향에 맞는 연구 분야를 선택한다면 후회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조선시대사 관련 연구 경향을 정리하면서 주목했던 분야가 ‘대외관계사’였다. 당시만 해도 대외관계사 연구는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혼자 생각에 이미 많이 다루어졌던 분야를 연구하는 것은 경쟁력에서 자신이 없었고, 관심 없는 분야는 더더욱 다루고 싶지 않았다. 아직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던 분야를 연구 주제로 선택한다면 최소한 학계의 모퉁이라도 차지하고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결국 ‘대외관계사’라는 비교적 생소한 분야를 연구주제로 선택했다. 학부 때 한명기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던 것도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생각을 혼자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또래 연구회원들이 있었다. 혼자 공부하기에 막막했기 때문에 이들과 함께 2009년 학습반을 시작했다. ‘대외관계사학습반’이었다. 연구회원들이 중세1분과, 중세2분과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분과를 통합한 학습반을 만들었다. 처음 시작했던 회원들은 중세1분과 이승민, 정동훈 선생님과 중세2분과 이동인, 구도영, 김창수 선생님이었다. 이동인 선생님께서는 당시 중세2분과장으로서 학습반 출범을 함께해 주시다가 반장 자리를 우리에게 물려주셨다.

5명 정도의 작은 학습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져서 ‘중세국제관계사연구반’으로 진화(?)했다. 지금도 20명이 넘는 반원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다. 지금은 함께하지 못하지만 그동안 연구반에서 같이 공부했던 회원들의 수도 30~40여 명은 된다. 이 책은 한국역사연구회와 중세국제관계사연구반의 도움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석사학위논문과 박사학위논문의 내용을 구성해서 작성하고, 책으로 출간하는 과정은 곧 한국역사연구회와 중세국제관계사연구반에서 생활하고 공부하는 과정이 반영된 것이었다.

 

조선은 피해자였는가? 가해자였는가?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對外征伐)은 한국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독특한 위상을 가진다. 한국사 속의 특정 국가가 1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군사 행동을 계획해서 실행했던 적은 없었다. 고려-조선의 1,000년으로 기간을 한정한다면 15세기 대외정벌이 가지는 특수성은 더욱 커진다. 그런데 이 현상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외부 세력의 침입에 대한 조선의 대응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존의 설명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외부 세력의 침입 때문에 정벌을 시행하는 일이 반복되었다면 조선은 근본적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진이나 왜구 세력이 조선이라는 국가를 위협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이 문제의식은 점점 더 커졌다. 15세기 동안 외부 세력의 조선에 대한 침입 횟수는 매우 적었고, 피해 규모 역시 실제보다 과장되어 알려졌다. 오히려 조선의 대외정벌 시행 이후 외부 세력의 침입 횟수가 더 증가하는 현상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 조선 관료의 언급을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외부 세력의 침입이 정벌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의 정벌이 외부 세력의 침입을 격화시켰다.

조선의 대외정벌은 사실상의 전쟁 행위였다. 군사력을 동원해서 다른 국가나 세력을 공격한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현재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다면 15세기 조선의 대외정벌 역시 최소 동북아시아 지역에는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조선의 군사 행동은 주변 국가나 세력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행위였다. 설령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았더라도 주변에서 이루어지는 군사 충돌을 무신경하게 지켜만 보는 국가나 세력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출병했다가 패배했을 경우 감당해야만 하는 정치·사회적 부담을 생각해 본다면 정벌이라는 대외정책을 외부 세력의 침입만으로 시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은 15세기 동안 계속 정벌을 준비해서 시행했다. 대략 10년에 1차례 정도는 정벌을 시행했다. 비록 정벌군의 규모나 시행 기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10년에 1차례는 결코 적은 횟수가 아니다. 여기에 더해 대외정벌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실행하지 못했던 사례와 계획했지만 준비 단계에서 중지되었던 사례까지 포함한다면 횟수는 더욱 증가한다. 조선은 외부 세력에게 입었던 피해 때문에 정벌을 시행했던 것이 아니라 국가체제 확립과 대외영향력의 확대를 위해 정벌을 주도적으로 준비해 시행했다.

 

15세기 조선에게 ‘사대(事大)’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성계 세력은 위화도 회군을 통해 국정을 장악했던 시점부터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사대의 가치를 부정한 적은 없었다. 태종과 세종은 지성사대(至誠事大)를 강조하며 명에 대한 존중심을 강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강조되었던 사대의 가치였지만 15세기의 조선에서는 일정한 원칙에 따라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 사대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던 대표적 사례가 바로 대외정벌이었다.
명은 여진 지역을 직접 지배하지는 못했지만 위소(衛所) 체제에 편입시켰고 주요 추장들에게도 관직을 부여했다. 명은 나름의 원칙에 따라 이 지역을 자국의 영역으로 선포했다. 따라서 조선이 황제의 승인 없이 여진 지역을 정벌하는 것은 명의 영역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정벌이 사대명분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지적은 명은 물론 조선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조선 국왕들의 태도이다. 그들은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대외정벌의 필요성 역시 강조했다. 조선의 국왕들은 여진 지역에 대한 정벌 시행이 사대명분에 위배된다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조선은 사대를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가치로 인식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활용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정벌의 추진과 시행 과정에서 나타났던 조선의 대외의식은 정치적 목표에 따라 변용되었다. 조선에게 사대는 중요했지만 그 위에는 국왕권(國王權)이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국왕들은 사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가치를 변용시켜 적용시키는 일을 주도했다. 국왕의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시키는 일에 사대명분을 활용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났던 정책이 대외정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