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을 말한다] 고려 사회와 밀교_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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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12월(통권 36호)

[나의 책을 말한다] 

 

고려 사회와 밀교

(2022, 씨아이알)

 

김수연(중세1분과)

 

‘밀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이다. 단어에서 느껴지는 비밀스러움, 장엄하고 화려한 의례, 의미를 알 수 없는 다라니, 독특하고 다양한 만다라, 낯설고 기괴한 모습의 불보살 등 베일에 가려진 듯 신비로우면서도 원색적이며, 경우에 따라 에로틱한 느낌마저 풍긴다. 밀교라는 단어가 가지는 뉘앙스 때문에 사이비종교라는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밀교는 다양한 불교사상의 한 흐름이며, 한국에서는 신라시대 이래로 계속 신앙되어 왔다. 특히 밀교는 다른 어떤 사상보다도 현실과 밀접하게 소통하며 시대상·사회상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하였다.

이 책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인 『고려시대 밀교사 연구』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필자가 고려시대 밀교사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 느꼈던 밀교에 대한 인상은 모든 신앙과 연결되어 있지만 명확한 형태가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었다. 고려시대 밀교사 관련 자료는 적지 않지만 그 자료들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단순한 실행 사실을 전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다라니가 나열되어 있는 등 단편적인 자료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형국이다. 이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배치, 배열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내도록 조율하고 의미를 찾는 것이 연구자의 역할인 것 같았다. 아지랑이 같은 고려시대 밀교사가 형태를 찾을 수 있도록 구도와 틀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한 고민 끝에 고려시대 밀교를 구성하는 요소들, 즉 ① 밀교사상과 신앙을 바탕으로 조직된 밀교종파, ② 그 내용을 전파하는 경전, ③ 구체적 신앙 행위인 의례에 개별적으로 천착하고, 이들을 고려시대사의 전개 속에 위치지움으로써 고려 사회와 밀교의 영향 관계를 고찰하였다.

 

종파: 고려 밀교의 조직적 기반

고려시대에는 신인종(神印宗)과 총지종(摠持宗)이라는 종파가 성립되어 사회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밀교신앙 확산의 기틀을 다졌다. 신인종은 고려 초 태조 연간에 성립된 종파로, 외적 기양 의례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으로 대표되는 종파였다. 신인종의 종찰인 현성사(賢聖寺)도 국가 수호를 위한 도량으로 이름이 높아, 대몽항쟁기 강화도 천도 때 함께 옮겨지기도 하였다. 총지종은 목종 이전에는 종파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다라니 염송을 통한 치병 활동을 주로 전개하였다. 왕실 의료의 일정 부분을 담당했으며, 고려후기에는 내도량(內道場)에 소속되어 액막이를 위한 다라니 염송 활동도 하였다.

이러한 신인종·총지종의 활동은 신라 밀교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인종을 대표하는 문두루비법은 문무왕대 명랑(明朗)이 처음 개설한 이래로 이어져오던 의례였다. 총지종의 치병 활동은 혜통(惠通)의 맥을 이으며, 신라 하대에 다라니 염송이 확산되면서 다라니 전문가로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신라시대에 밀교신앙이 무르익으며 고려 초에 밀교종파가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총지종은 수행의 측면에서 『대일경(大日經)』에 입각한 아자(阿字) 관법수행(觀法修行)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전: 고려 밀교 신앙을 투영하는 거울

고려시대의 밀교경전은 대장경·『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편입되어 있는 것과 단본으로 간행된 것 등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전자는 밀교경전과 다라니, 장소(章疏)를 수집·간행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고, 후자는 당시의 신앙 경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후자가 고려 사회의 밀교 신앙 경향을 잘 보여주기 때문에 단본 밀교 경전을 중심으로 경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현재 고려시대에 간행된 총12종의 밀교 경전이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이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사례가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이라고 생각한다. 간행 목적, 활용 방법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불정심다라니경』은 호신(護身)과 치유의 다라니이다. 경전 내용에 의하면, 경전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죽음과 원한에서 몸을 지킬 수 있고 수명이 연장된다고 한다. 이러한 영험 때문에 이 다라니는 휴대가 가능하도록 높이 5~6cm 내외의 작은 사이즈 절첩본(折帖本)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예컨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정심다라니경』은 휴대 시 경전을 보호할 수 있도록 경전을 넣는 경갑이 함께 발견되었다.

소자본 『불정심다라니경』(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 e뮤지엄)

경전을 넣었던 경갑 (사진 출처 : e뮤지엄)

또 이 경전에 실려 있는 다라니를 외고 부적을 태워 향수에 섞어 마시면 난산(難産)을 비롯한 질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고 하며 구체적인 활용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질병 치료의 핵심인 다라니와 부적만 별도로 간행되기도 하였다. 해인사 사간판전(寺刊版殿)에 보관되어 있는 『불정심다라니경』 목판이 그 예이다. 다라니가 나오게 된 유래나 영험담 등은 모두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라니 공덕에 대한 간단한 소개, 다라니 문구, 부적만 목판 1장 단면에 새긴 유물이다. 난산이나 질병 치료를 위해 최소 비용을 들여 최대 효과를 노린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불정심다라니경」와 그 부적은 고려 이래로 난산에 효험이 있는 대표적인 다라니와 부적으로 자리매김해 갔다. 해인사 원당암 아미타삼존상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성불수구대다라니(成佛隨求大陀羅尼)』는 50여 종의 다라니와 20여 종의 부적을 모아 간행한 다라니·부적 모음집이다. 여기에 『불정심다라니경』의 다라니와 부적이 수록되어 있다.

『성불수구대다라니』와 그 속의 「불정심다라니」(사진 제공 : 해인사 성보박물관)
부적 모음 부분에 실린 『불정심다라니경』 권말 부적

경전의 텍스트 서술을 모두 탈락시키고, 효험의 핵심이 되는 다라니와 부적만 뽑아낸 것이다. 효험이 있다고 여겨지는 다라니와 주문을 모아 그 효험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며, 지니고 다니면서 독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의료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상황에서 출산은 산모와 태아, 두 명 이상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충분한 의학적 대응을 할 여력이 없던 민중들에게 불보살이 내려준 다라니와 부적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신앙적 처방이자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보루였을 것이다.

 

의례: 밀교 신앙의 정치·사회적 발현

국가적 차원에서의 밀교신앙은 밀교의례로 드러난다. 빈번한 국가적 밀교의례의 개설은 신라나 조선과 다른 고려 밀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개설된 국가적 밀교의례는 총17종이 있었다. 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과 같이 1회 개설로 그친 의례도 있는 반면 소재도량(消災道場)과 같이 100회 이상 개설된 의례도 있다. 가뭄과 홍수 등 기상이변, 천체의 비정상적인 움직임인 성변(星變), 전염병, 내·외적의 침입 등 병란(兵亂) 없애기 위해 개설된 것[기양 의례]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의례개설 목적 면에서 보면 밀교의례는 다른 기양 의례들과 차별화되지 않는다. 심지어 유교, 도교나 무속 의례와도 다르지 않다. 밀교의례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라 그를 대신할 의례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 밀교의례가 정치적 통치 기제 가운데 하나로 활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교의례를 중복해서 개설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고려에는 다라니를 받들면 영험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었다. 여래만 알 수 있는 다라니를 염송함으로써 그 바람이 직접 여래에게 전달되어, 그 위신력(威神力)으로 국가적 재난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밀교의례는 가시적이다. 갖가지 공양물로 꾸며진 의례 장소와 다라니라는 낯선 언어가 신비감을 고조시켰다. 신비로운 밀교식 절차는 의례에 장엄함을 더하고 전시효과를 극대화시켰을 것이다. 장엄한 밀교의례는 불보살의 위신력으로 재난이 없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고취시키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국가적 밀교의례가 개설되었다.

 

밀교는 고려 사회에서 어떤 의미였을까

이상과 같은 고려시대 밀교의 여러 요소들은 고려시대사의 흐름 속에서 각기 다른 맥락에서 작용하며 고려시대 밀교사를 형성하였다. 특히 밀교의 다라니신앙은 현실적 이익의 추구와 극락왕생 및 파지옥(破地獄, 지옥에 떨어질 業障을 없앰)을 기본으로 한다. 현세구복적 다라니신앙은 밀교신앙의 가장 근저를 이루는 신앙이다. 고려후기가 되면 사회적 혼란과 대몽항쟁 등으로 인해 다라니를 염송해 재난을 피하고자 했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천태종 승려인 요세(了世), 선종 승려인 일연(一然) 등도 다라니를 염송했던 것으로 보아, 밀교의 다라니가 종파와 관계없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다라니신앙의 또 다른 경향, 즉 죽어서 극락에 왕생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신앙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고려전기에는 극락왕생을 위해 임종 전에 『천수경(千手經)』을 염송하는 사례가 보이며, 무신 집권기에는 극락왕생을 위해 묘지명에 다라니를 새긴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원 간섭기 이후가 되면 정토신앙과 밀교가 결합되는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원참(元旵)의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에서는 염불 대신 아미타불의 진언을 염송하도록 설하고 있으며, 밀교경전인 『팔대보살만다라경(八大菩薩曼茶羅經)』과 아미타불이 결합한 「아미타팔대보살도」가 불화로 다수 제작되었다. 또 파지옥을 설하는 대표 경전인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의 다라니 구절이 범종에 새겨지기도 하였다. 범종의 울림과 함께 지옥에 떨어질 업장이 소멸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지옥과 극락을 내세우며 정토신앙을 고취시킨 것은 고려 말 불교계의 분위기였던 것 같다. 고려 말 유학자들이 불교 폐단을 비판하며 쓴 글들을 보면, 승려들이 지옥과 극락을 언급하며 악영향을 끼친다고 서술하고 있다. 밀교신앙 역시 이와 같은 고려시대 불교신앙의 전반적인 흐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양택춘 묘지명 뒷면(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 e뮤지엄)

고려시대의 밀교는 여러 갈래의 밀교 전통을 수용하였다. 재난 해소를 위한 다라니신앙은 종파와 승속을 넘어 확산되었다. 밀교의례는 다른 의례들과 차별화되지 않은 채 통치의 기제로 활용되었다. 선정(禪定)에 들기 위한 방편으로 다라니를 활용하는 방식도 밀교종파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다양한 종파의 승려들이 다라니 모음집인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 간행에 관여하고 있기도 하다. 요컨대 밀교의 다라니신앙은 고려시대 불교신앙의 저류(底流)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분위기 하에서도 밀교신앙이 면면히 이어지고 독자적 밀교사상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