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을 말한다] 임진왜란기 조선의 대외교섭과 조일 국교 회복에 대한 연구_조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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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11월(통권 35호)

[나의 논문을 말한다] 

 

임진왜란기 조선의 대외교섭과 조일 국교 회복에 대한 연구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22.08)

 

조인희(중세2분과)

 

들어가며

본 칼럼에서 소개하는 박사 학위 논문 「임진왜란기 조선의 대외교섭과 조일 국교 회복에 대한 연구」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전후 시기 조선과 명, 일본의 상호 교섭 과정을 조선의 대외교섭 및 조일 국교회복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에 의거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먼저, 임진왜란의 전사로서 16세기의 왜변, 왜란 및 경인통신사의 파견에 대해 살펴보고 해당 시기 조선 지식인들의 대일본정책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는 명일 교섭에서 조선의 입장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세 번째로는 정유재란부터 1607년에 이르는 시기의 조일 교섭, 조명 교섭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일 갈등의 경과와 의의는 무엇인가?

위 문제와 관련하여 본고에서는 임진왜란 이전의 조일 갈등 에서 발생한 의견 차이에 주목하였다. 의견 대립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상이한 사상적 기반 하에 대일본 정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사대교린 정책을 고수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저들이 우리의 문화를 흠모해 교류를 요구한다면 상국으로서 거절할 수 없다”는 논리로 왜란, 왜변 이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정당화했다.

반면 조식(曹植)은 경의(敬義) 사상을 바탕으로 적극적이고 강경한 대일 정책을 주문했으며, 서경덕(徐敬德)의 기(氣) 중심의 이기합일론의 영향을 받은 허성(許筬)은 사세를 중심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입장에서 경인통신사 파견 과정 중 김성일(金誠一)과 빈번히 대립했다. 위 인물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소중화의식’과는 다른 형태의 대일본 정책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이 임진왜란 이전 조선 내부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명일교섭 시기 조선의 대외교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내용을 학위 논문 주제의 내용으로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왜 굳이 이런 주제를 선택했는가?”라는 것이었다. 명일 교섭의 주체는 조선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사적 시각에서 이를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명과 일본을 중심으로 교섭이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조선 또한 어떤 방식으로든 교섭에 관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해당 시기 조선 조정의 대외 교섭 정책을 확인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상기와 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본고에서는 고양겸의 일본 책봉 주청 사건에 주목하였다. 이 사건은 명일 교섭 과정에서 조선의 외교력을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조선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명 간의 상호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여 경색되어 있었던 명일 교섭의 재개를 이끌어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명일 교섭 시기 조선의 외교력에 대한 적극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후처리 문제와 조일 국교 회복의 의의는 무엇인가?

정유재란 이후 전쟁의 수습 방향은 크게 2가지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명에 대한 대명의리가 강화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은 명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조선을 구원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악행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었다. 조선 내부에 존재했던 명에 대한 상반된 감정은 공신 선정 과정을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대명의리로 정리되었다.

조선은 대명의리론의 강화와 더불어 일본과의 국교 회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공신 선정 과정이 명과의 관계를 대명의리론에 입각하여 재정의하는 과정이었다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의 교섭은 전통적인 이적 교화론에 입각한 교린 관계를 재구축하는 과정이었다.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가 국교를 재개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완전한 신의를 바탕으로 한 관계는 아니었으며, 구교의 회복과도 거리가 있었다. 1607년의 회답겸쇄환사 파견은 17세기 초 조선과 일본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이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교섭은 야나가와 잇켄(柳川一件) 이후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가 관계를 재조정하기까지 약 30년 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본교에서는 교린 관계의 ‘회복’이 아닌 ‘재구축’으로 17세기 초의 조일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나가며

학위 논문에서 임진왜란 전후 시기의 대외 교섭 및 조일 국교 회복 과정을 검토해 보았으나 여전히 미진한 부분이 많다고 느낀다. 향후의 핵심 과제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조선 후기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고찰해 보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를 위해서는 소위 양란(兩亂)의 시기가 이후의 시기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임진왜란, 정유재란사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를 바탕으로 고찰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