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회의 참관기] 조선후기 사람들의 의례 이해와 실천_이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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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8월(통권 32호)

[학술회의 참관기] 

 

조선후기 사람들의 의례 이해와 실천

– 조선후기 국가의례의 설행과 예학 인식 참관기-

 

이민기(중세1분과)

 

조선시대 의례와 의례 연구

한국사에서 의례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왕조는 조선이다. 조선은 계층을 불문하고 이른바 ‘성리학적’ 기조 아래 많은 의례들이 실천되었다. 작게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중요한 사건들이 ‘의례’라는 것을 수행함으로써 그 의미를 실천했던 것이다. 따라서 의례를 연구하는 일은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원칙과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나름의 변화를 전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6월 24일(금) 한국역사연구회 중세2분과 의례연구반은 “조선후기 국가의례의 설행과 예학 인식”을 개최했다. ZOOM을 통한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총 5개의 발표로 구성되었다. 총 2부로 구성되었는데, 1부는 숙종~정조대의 주요 국가의례의 설행과 관련된 외교적 의미와 의례적 의미를 중심으로 발표가 진행되었고, 2부는 조선시대 왕후의 휘호의 정립과 의의 및 18세기 예학과 성호 이익의 퇴계예학 계승에 관해 발표가 진행되었다. 이 글에서는 여러 선생님들의 발표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구성하였다. 비록 여러 선생님들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한 바가 있다면 너그럽게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직접 전달하기와 간접 전달하기

조선시대 왕비는 국왕과 더불어 왕실을 대표하고 정통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왕비 책봉은 왕세자의 정통성과 차기 왕권의 형성까지 연결되어 현 국왕과 차기 국왕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인증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내적인 왕비의 중요성과 더불어, 왕비에게 고명(誥命)을 주고 받는 절차를 통해 외교관계를 표현하는데 이른다.

김우진 선생님은 숙종대 왕비의 수고명례가 형성되고 진행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둘러싼 조선과 청 사이의 갈등양상과, 갈등 해결의 결과로서 변화된 ‘변례’가 어떠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였다. 더욱이 숙종대에는 이른바 ‘환국’으로 인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서로 왕비를 거치던 시기였고, 이를 청으로부터 인정 받는 과정에서 의례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앞서 인조의 왕비였던 장렬왕후의 책봉의례를 기점으로 청이 내린 고명을 국왕이 확인한 후 왕비에게 전달하는 ‘기묘년 의례’가 형성되었고, 이후 숙종대 희빈 장씨의 책봉과 인현왕후의 복위와 책봉으로 인해 청의 칙사가 내전의 문 앞까지 이르러 내시에게 고명을 전달하는 ‘임술년 의례’로 변화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 두 의례를 절충하는 ‘을사년 의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의례의 변화는 왕비에게 직접 고명을 전달하는가, 아니면 간접적으로 고명을 전달하는 방식인가의 차이였다.

청이 조선의 왕비에게 임명을 직접하는지, 아니면 조선 국왕이 조선 왕비에게 대리하여 임명되는지는 당시 조선인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조공-책봉관계라는 외교적 차원과 조정에서 내명부의 대표자를 인정하는 문제는 다분히 논쟁의 축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인정을 통해 대표자는 ‘대표자 답게’ 되어진다. 따라서 대표자를 인정하는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인정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 대표자의 권위의 문제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외부의 문제가 내부의 문제로 연결되는 외교적 담론과 더불어 한 집단 안에서 대표자의 대표성을 어떻게 내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가에 대한 문제가 갈등으로 변화될 때,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 자체가 당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변화된 규정에서 원래의 규정대로

영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의 관계는 한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익숙한 주제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임오화변’ 이후, 사도세자의 장례는 그의 인생을 평가하는 의례이자, 장례를 주관한 영조의 입장을 반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자가 국왕보다 먼저 죽은 사례는 많지만,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발생한 사건은 맥락을 달리하면서도, 사람이 죽었음을 공표하는 성격을 띠는 장례는 비슷한 절차를 가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영조와 조선조정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한 것일까?

김동근 선생님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하여 당시 정치적인 맥락에서만 연구가 진행되었음을 지적하고, 사도세자의 장례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영조는 『국조오례의』의 상장례 규정을 보완한 『국조상례보편』을 두 차례 펴낸 바 있다. 사도세자의 장례는 이러한 규정의 변화 이후 처음 발생한 상장례이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의 지위만 회복하였을 뿐, 상장절차는 최소한의 간략함을 유지한 것이 특징이라고 하였다. 즉 임시관청인 도감의 축소와 상복입기의 간소화, 사도세자의 관에 옻칠을 더하는 횟수를 줄이고 묘역 조성 및 제기 주성을 간략히 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보았다. 반면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태도가 변화함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 직후 세자의 지위를 회복하고 시호를 내렸으며, 이후 발인에 직접 참여하거나, 신주를 매안하는 일을 언급 못하게 하는 등의 변화를 지시한 점에서 이러한 변화를 지적하였다.

이러한 의례적 특징은 영조가 국가의례의 상장례 과정을 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간소하게 진행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간소하게’ 변화된 장례 과정에서 ‘원래의 규정’대로 진행했다는 점에서 의례는 또 한번 그 성격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의례를 주관하는 자의 태도의 변화가 의례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장례는 두 가지 변칙점을 가진다. 즉 죽음과정에서 기존에 겪지 못한 갈등상황을 겪었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사적인 ‘아들’과 공적인 ‘세자’라는 지위의 변화는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방식에 있어 갈등을 유발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의례절차가 간략해졌다 할지라도 사도세자는 세자의 장례로 대우받았고, 아버지이자 국왕인 영조는 조정에서 이해하고 있는 세자의 장례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지게 된다.

 

국정운영방식을 가시화하기

영조에 이어 조선의 국왕으로 등극한 정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되어있다. 더불어 성리학적 전통을 더욱 굳건히 고수하려고 했던 정조는 많은 일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규장각의 설치 및 이와 관련된 수많은 정책에 있다. 이러한 규장각의 설치와 관련된 정조의 업적은 그가 국정 수행에 있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는지를 통해 그 목적을 알아내려는 연구가 지속되어 왔다.

윤혜민 선생님은 정조의 연사례(활쏘기 의례)가 준비된 배경과 국가전례서인 『춘관통고』에 수록되었던 상황을 추적하고, 그 의례적인 성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해석을 시도하였다. 전통시대 활쏘기 의례는 적을 물리치려는 무예의 기능 뿐만 아니라, 자기를 수양을 강조하는 수신의 일환으로 중요시되었다. 더불어 활쏘기를 사람들과 모여서 하게 되면, 과녁과 화살, 그것을 쏠 때 연주하는 음악의 악곡까지 모두 차례와 순서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었다. 이러한 점은 활쏘기를 통한 질서의 확인과 이러한 질서 안에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활쏘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좋은 행위였을 것이다. 이러한 활쏘기의 의례적 특징을 이해한 정조가 이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이와 관련된 의례 규정을 의례집에 수록하는 과정에 관해 세 가지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옛 예제를 회복하고 문무합일의 도를 추구하는‘스승으로서의 군주’를 자처하는 것이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였으며, 그것을 실천하는 장으로써 규장각을 정착시키고, 근신들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활쏘기 의례에서 존비, 즉 왕권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만 활쏘기 의례를 이용했을까? 이러한 점은 토론을 맡아주신 김지영 선생님의 논의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활쏘기 실력을 연마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활쏘기를 통해 ‘문무를 고르게 닦은 인재, 덕이 부족함을 반성할 줄 아는 군자상’을 핵심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정조의 활쏘기 의례는 정조 자신이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 당시 조건에서 그가 좋은 사례로 생각했던 ‘고례’를 익히고 회복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는 점이다. 활쏘기 의례가 단순히 활을 쏘는 행위를 넘어 사람들이 모여 활을 쏘며 상호작용하고, 이를 통해 활쏘기에 담긴 의도를 체득하는 장으로 이해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례 연구를 확장하게 해주는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군주와 신하로 구성된 조정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여러 의례들이 목적을 가지고 행해진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것이 지닌 국정운영의 목표와 그것의 지향, 나아가 그것이 지닌 당대의 고민까지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름짓기를 통한 왕비 이해하기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왕비의 이름은 대부분 시호들이다. 반면 조선시대 많은 왕비들은 살아있을 때 혹은 죽은 이후에도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는 했다. 이를 휘호라고 부르는데, 조선시대 왕비들은 4글자의 휘호를 받았다. 주로 왕비를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휘호에 대한 개념이나 연구 등은 기존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정 선생님은 독자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휘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했다. 휘호는 또한 추상존호로 기본적으로 ‘왕후에 대한 추숭’에 목적을 둔 이름이라고 개념을 규정하였으며, 왕후의 공덕을 칭송할 때 왕의 비로서 국왕에게 내조한 공보다는 당대 국모로서의 공적을 추념한다는 특징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는 왕후의 단독 릉이 존재하며, 고려와는 달리 정비와 계비 모두 부왕과 함께 부묘되는 맥락과 함께 휘호라는 이름이 국왕과 대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왕후의 지위를 반영하는 요소임을 증명한다고 주장하였다.

휘호는 비록 다른 국가전례서에서 명문화되지 못하고 『춘관통고』 吉禮의 「追上尊號」에서 ‘附徽號’로 추상존호와 함께 다루어지고 있으나 조선 초부터 순종대까지 단 한 차례도 빠짐 없이 휘호를 올리는 예식이 치러졌던 만큼 조선 시대 왕후의 국장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하는 예식 중 하나였다. 시호와 함께 신주에 새겨지는 이름인 만큼 왕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임을 알 수 있었다.

 

조선 사대부들의 의례 연구하기

18세기 사대부들은 각자의 성리학 이해를 정립해 나가는 가운데 의례를 포함한 예를 연구하는 흐름들도 나타났다. 기호학파와 낙론, 영남학파에 속한 사대부들은 그들의 학문을 의례로 어떻게 실천할지에 대해서 기존에 정해진 의례 매뉴얼과 당시 상황에 맞추어 실천을 하는 문제, 즉‘변례’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러한 18세기 사대부들의 변례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학문과 실제 생활과의 관계에 있어 실천성을 어떻게 담보할 지를 따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실제 국가권력이 아닌 지방 사림 공동체가 그들의 학문적 지향을 바탕으로 나름의 실천체계로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병유 선생님은 16세기 이래 축적된 예학의 연구성과가 18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집대성되었고, 기존 예설을 총괄하는 예서의 출현에 주목했다. 학파를 막론하고 수준 높은 예서의 다발적 출현은 조선 예학의 보편적인 발전을 드러내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특히‘가례’에 대한 관심은 기존 영남학파·남인은 古禮를, 기호·서인은 가례를 중요시한다는 도식적 구도를 벗어나 모든 학파에서 보이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특히 성호 이익의 예 연구는 퇴계 이황의 예 연구를 능동적이고도 비판적으로 계승했음을 주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실제 실천을 위한 옛 의례 매뉴얼의 고증과 현재 인식이 총동원 되었던 흐름을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지방 사대부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학문적 분파성을 담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하게 예를 지킨다는 고정관념 아래 그들이 각자의 의례를 어떻게 실천하려고 노력했는지 아는 일은 의미있다. 의례는‘지키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변한다고 생각하기 어렵게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와중에 전통적인 유학에서의‘예’와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인 ‘의례’와의 관계는 18세기 사대부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의례와 예라는 개념이 어렵다기 보다는,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누군가에게 기원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들여오는 것이 아직도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에도 어려웠던 현실에서 의례 실천하기

의례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의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논의 역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주제이기도 하다. 의례와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 특히 전통시대의 사람들은 의례적 삶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례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주신 여러 선생님들의 논의를 보는 일은 흥미롭고도 감사한 일이었다.

이제는 연구반과 학습반의 경계가 사라졌지만, 좋은 학습의 결과가 좋은 연구로 남는다는 사실을 한국역사연구회 소모임을 통해 배우고 있다. 비록 다른 분과에 속해있지만 인접 분과의 여러 선생님들께서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시는 모습을 보며 많은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더불어 의례 연구는‘당시에 당연한 일을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어려움을 갖는다’라고 한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쉽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주제를 잘 연구해주셔서 이해하기 쉽게끔 해주신 중세2분과 조선시대 의례반 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