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비평] 한국인이 아닌 ‘한인’ 혹은 ‘조선인’의 삶과 ‘코리안’ 범주의 재인식_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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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7월(통권 31호)

[미디어 비평] 

 

한국인이 아닌 ‘한인’ 혹은 ‘조선인’의 삶과
‘코리안’ 범주의 재인식

– 웹드라마 <파친코(Pachinko, 2022)>

 

박정민(근대사분과)

 

그림 1. 출처: IMDb( https://www.imdb.com/title/tt8888462)

수학 천재와 교수가 블랙잭 게임을 통해 라스베이거스 카지노를 교란시키는 내용의 영화 <21>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블랙잭 게임에 투입할 ‘선수’를 뽑기 위해 대화하면서 한국계 미국인 초이를 배제하는 교수는 “초이는 초이잖아”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아시안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 자체로서 배제되는 존재이다. <Pachinko>에서도 미국 은행에서 일하는 솔로몬이 거듭 승진에 누락되는데, 백인 남성 상사의 대답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솔로몬은 일본으로 가서 호텔 개발 사업을 마무리 짓겠다며 거래를 하는데, 그 남은 부지의 주인이 ‘코리안’이기 때문에 ‘코리안’인 자신(=솔로몬)이 해결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때 상사의 대답은 “난 자네가 재패니즈인 줄 알았는데, 코리안이었나?”다. 이렇듯 영미권에서의 아시안은 코리안이든 재패니즈이든 주류계층의 눈에 보이는 대로, 믿고 싶은 대로 인식되는 존재였다.

<Pachinko>(이하 파친코)가 애플티비를 통해 8부작 드라마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이 소식은 영미권에서 확산되는 ‘K-컬쳐’를 조명하는 문화적 담론과 결부되어 ‘K-열풍’의 재생산에 합류했다. 파친코는 애플로 상징되는 미국자본과 그 영향 아래의 문화 속에서 구성된 제작진이 만든 작품임에도 ‘K’로 포섭하려는 기사와 그 파생물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는 ‘K’와 파친코를 의식적으로 분리해 생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만 쭉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 필자는 식민지기를 연구하는 입장을 더해 내심 파친코가 공개되면 일제 식민지배 아래 ‘조선인’의 차별받는 삶을 서구인들이 ‘드디어 알아주는’ 것인가 하는 무의식적인 기대를 갖고 있었다. 원작자 민진 리가 소설의 집필 목적이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코리안이 되게 하는 것”이라 밝혔을 때 기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작자의 ‘코리안’과 파친코에 등장하는 ‘코리안’은 한국인과 ‘가족유사성(family resemblance)’으로 연결될지는 몰라도 동일성을 띠지는 않는다. 파친코는 비유하자면 가까운 친척(=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다른 친척(=코리안 아메리칸)이 이방인으로서 겪은 자신들의 삶을 반영하여 자신들의 인식틀로 그려낸 일종의 자기민족지이다.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과 선자-이삭 사이의 ‘구원’ 서사로 표현된 기독교적 코드와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보여주는 납작한 시선은 미국 문화의 자유주의적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듯 ‘코리안’을 다층적으로 규정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인 파친코를 통해 ‘한국인=코리안’이라는 좁은 인식을 ‘한국인⊂코리안’이라는 넓은 인식으로 재인식할 수 있다. ‘코리안’으로 묶일 수 있는 집단을 재인식, 재분류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파친코는 그 고증의 정도를 따지기보다는 그 서사와 재현 그리고 파급이라는 효과 차원에서 이야기 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역사콘텐츠로서의 파친코는 역사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할 때 이것이 사회에 어떠한 효과를 양산하고 영향을 끼치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에 대해 하나의 답을 준다.

짤막하게나마 파친코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910년대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훈과 양진 부부의 딸로 태어난 선자가 야쿠자의 데릴사위인 고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졌지만, 이내 혼외관계라는 부적절한 관계를 알게 되어 뿌리친다. 혼인하지 않은 여성의 몸으로 예상되던 당대 사회의 지탄을 두려워하는 와중에 양진과 선자로부터 돌봄 받게 된 병약한 전도사 백이삭의 도움으로 그와 혼인하고 오사카로 이주하게 된다. 먼저 오사카로 건너간 이삭의 형 요셉과 형수 경희는 ‘이쿠노’구에 거주하면서 영세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선자와 이삭은 오사카에서 아들 노아를 낳고 살지만, 노아가 학교를 다닐 무렵에 이삭이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고 이에 선자는 생김치를 버무려 시장에 내다 파는 선택을 하며 시즌1이 끝난다.

먼저 작품을 내적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 드라마의 특징은 대한민국도 북한도 아닌 현재의 어느 정치체도 연결점으로 삼지 않는 그 때의 ‘조선’ 자체를 시·공간으로 삼고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의 사람들, 가족, 이웃, 남성, 여성… 이러한 조선의 사회는 일본 ‘내지’의 오사카 이쿠노구라는 압축된 공간에서 작은 조선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 드라마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 성별에 근간한 행위주체를 역사적 맥락에 맞게 그려내고 있다. 이들의 행위성(agency)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준 성별적 특성에 걸맞게 나타난다. 이 시기를 ‘가부장제’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당대 ‘가부장’을 둘러싼 낭만적 형상과 그 반대뿐만 아니라 혼종된 가부장 주체가 모두 등장한다. 작품 내 훈의 존재는 자애롭고 따뜻한, 그리고 딸에게 셈도 가르쳐주며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낭만적인 가부장을 표상한다. 자애로운 아버지 훈의 죽음은 훈과 비슷한 병을 가졌으며 자상하고 아내를 존중해주는 이삭으로 채워진다.

필자의 인상에는 훈의 거울쌍으로 남자 주인공인 고한수도, 백이삭도 아닌 백요셉이 있다. 300엔의 빚을 져 동생 부부의 뱃삯을 대면서도 그 돈을 선자가 금시계를 팔아 갚고 오자 ‘가장’으로서 “불알달고”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냐며 소리치며 ‘남성성’에 대한 흠집을 견딜 수 없어하는 그 말이다. 이 시기의 남성성(masculinity)은 호주로서의 법적 지위, 가족 생활 임금을 충당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선망 등 다양한 차원에서 구성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가부장 주체로서의 백요셉은 동생 이삭을 통해 “형이 이 집안 가장이잖아”라며 막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구하며 달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되찾아진다.

이러한 스펙트럼 속에 주목되는 인물은 고한수이다. 고한수야말로 대를 이을 아들을 갈구하고 축첩을 거리낄 것 없는 전형적인 가부장이면서도 본인의 가정에서는 조선인이라는 민족적 특성으로 오롯이 가부장의 위치를 누리지 못하는 혼종적인 인물이다. 또한 자타의 인정을 받는 똑똑한 머리, 깔끔한 일솜씨라는 개인적 능력과 그에 힘입은 일본 야쿠자의 데릴사위라는 위치가 제국의 신민이자 식민지민으로서 겪는 복잡한 경우의 수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고한수와의 결혼이 저주였다는 일본인 아내에게 “나도 이제 아들이 생겼어. 당신은 실패했지만 다른 여자는 성공했지”라고 한 방 날렸지만 오히려 “내 몸은 당신이 더럽혔어요”라는 인종주의적 모멸을 당한다. 고한수는 가정 바깥의 오사카와 영도 일대에서는 많은 이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군림하는 ‘제국-일본적인’ 남성이지만 당대의 남성성을 확립하는 기준인 가정에서 그의 가부장적 위치는 조선인일 뿐이기 때문에 일본인 아내로부터 쏟아지는 멸시로 인해 흔들린다.

그림 2. 출처: 뉴스1(https://www.fnnews.com/news/202205210902327966)

한편 당대의 ‘여성성’을 대표하는 인물은 양진이다. 양진은 현모양처로서 이성애 기반의 성 규범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재생산한다. 오사카로 먼 길을 떠나는 딸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처음이자 마지막 쌀밥을 지어먹이는 헌신을 보이고, 그 자신도 아들을 낳지 못해 “지지리 복도 없는 년”이라 자책하지만, 막상 영도를 떠나는 임신 중인 선자에게는 남편의 잠자리도 잘 챙겨야한다며 ‘단디’ 말한다. 이렇듯 가족과 성별의 서사는 당대의 복잡다단한 가부장제의 스펙트럼을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다만 때로는 전형적이고, 도구적일 때도 있다. 선자가 배를 타러 가는 길에 일본인 남성 무리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할 뻔 하고, 이를 고한수가 와서 구해준 후 둘 사이의 관계가 진전된다. 그러나 이 장면이 당대 여성들이 겪는 폭력 중의 하나를 비판하고 싶었던 의도이든, 여성 주인공의 ‘시련’을 구원해주는 남성 주인공을 부각시키며 그들의 사랑을 돈독히 하려는 ‘도구’로 삼든 간에 타인의 고통을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삼아 트라우마를 남기는 이 방식은 재현자로서 게으르고 비윤리적이다.

이제 작품의 경계로 넘어와서, ‘코리안’의 위치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70대의 노인 선자는 손위동서인 경희의 유골을 고향에 뿌려주기 위해 50년 간 돌아가지 못했던 부산행을 결심한다. 이어서 자신의 아버지 산소를 찾지만, 개발로 인해 주차장이 들어선 곳을 보고 허탈할 뿐이다. 선자는 아들 모자수와 함께 행정기관을 찾아가고, 그 때 공무원은 선자에게 주소가 어떻게 되는지 살갑게 물어본다. 선자는 오사카에서 왔다고 답하자 종종 있어왔던 일인지 귀화했는지 되묻자, 아들 모자수는 발끈한다. 선자는 그를 말리며 “특별영주권자라예”라고 설명할 뿐이다. 모자수의 반응은 귀화도, 특별영주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축약해서 보여주는 장치일 것이다. 어쩌면 이 ‘특별히 영주할 수 있는 권리’는 재일조선인이 겪는 애매한 법적·사회적 위치뿐만 아니라 파친코 제작진인 코리안-아메리칸이 겪는 법적·사회적 위치까지도 상상하게 한다. 선자는 아버지의 묘를 찾은 후 예정된 날짜보다 빨리 돌아가자며, “언제든 다시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다짐한다.

그림 3. 출처: 뉴스1(https://m.news1.kr/articles/?4652835)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액자식 구성 바깥에 “견뎌온 여성들”의 인터뷰를 실었다. 재현한 서사와 실재의 삶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싶어서였을까. 드라마의 쉼표 끝에 덧붙여진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가장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인터뷰한 재일조선인 여성들은 일본어로 대부분 얘기했지만 아주 약간씩 ‘조선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드라마에서 등장한 “할머니 울음 창피하게 여기지 마라. 울 자격 있는 분이니까”라는 설명적인 재현보다 11살 무렵에 일본으로 건너가 슬픔 속에서 컸기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다는 한 문장이 역사 속의 삶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자신들의 삶에 대해 말한 뒤에는 고생담을 들어줘서 고맙다며, 오히려 인터뷰어를 위로한다. 당사자 스스로가 자신들의 경험을 인이 박힌 마음을 꾹꾹 눌러 내뱉는 한마디로 되돌아왔을 때, 역사학을 전공하지만 타인의 삶을 ‘감상’ 혹은 ‘구경’할 뿐이던 내가 역사와 그 속의 삶으로 돌이킬 수 없이 ‘연루’되어있음(테사 모리스 스즈키, 『우리안의 과거』, 2006)을 깨닫는다. 그들의 “지루했을텐데 들어줘서 고마워요”는 자신들의 세대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들 스스로의 경험을 말하는 것조차 버겁고 눈치 보이는 현실을 반영한 표현일 것이다. 어째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스스로 말할 수 없게 되었는지, 말할 수 없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아니면 그들의 맥락을 모조리 지운 채로 한국인인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만 들어온 것은 아닌가 곱씹게 된다. ‘우리나라’에 갈 수 없다는 그들의 담담한 체념은 한국인이라는 닫힌 정체성을 기준으로 ‘코리안’의 범위를 독점해왔음을 비추는 거울이 아닐까. 그러니 한국인과 그와 정치적·문화적으로 유사하고 ‘적합한 재외동포’만을 ‘K’로 인정하고 포섭하는 현재의 논리는 과거도, 현재도 모두 모래알처럼 놓치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