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논문을 말한다] 1960년대 서울시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원형과 굴절_박경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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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7월(통권 31호)

[나의 학위논문] 

 

1960년대 서울시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원형과 굴절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22.02)

 

박경렬(현대사분과)

 

주제 탐색: 서울과 아파트

필자는 사학과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다양한 전공들 사이에서 고민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으면서도 통시적이고 간(間)학문적 접근이 가능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도시사’였다. 성균관대학교 ‘미래인문학 연계전공’에서 열린 ‘장소의 미래와 인문학’ 수업을 통해 도시 연구에 매력을 느낀 필자는 2019년 1학기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가 ‘Cities in History’라는 수업을 수강했다. 도시라는 매개를 통해 고대와 현대를 잇고, 아시아와 유럽‧아메리카‧아프리카를 엮어내는 도시사 분야가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후 필자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 현대 도시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석사과정에 입학하며 필자가 관심을 둔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도시였고, 다른 하나는 아파트였다. 한국의 신도시는 왜 모두 비슷하게 생겼는지, 한국인들은 왜 모두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신도시의 경우 시기적으로 현재와 너무 가까운 주제였고 역사학계에서의 성과도 적었기 때문에 이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작성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면 아파트는 역사학계뿐 아니라 사회학, 지리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 성과가 제출된 주제였다. 게다가 아파트는 한국 도시와 주택정책의 역사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의 접근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도시 영세민을 위한 아파트

서울의 아파트를 큰 주제로 삼고 기존 연구사를 검토하던 중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은 도심에 산재한 ‘무허가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저렴한 아파트를 짓고 철거민들을 입주시키는 사업으로, 1969년에 활발히 추진되었다. 지금은 ‘중산층’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이 된 아파트가 한때는 도시 영세민을 수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에 대해서는 원로 도시사학자인 손정목(孫禎睦, 1928~2016) 등에 의해 연구들이 다수 제출된 상태였고, 어느 정도 정형화된 서사가 구축되어 있었다.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金玄玉, 1926~1997)이 어느 날 ‘갑자기’ 시민아파트 건립 구상을 발표했고, 김현옥에 의해 무리하게 추진된 공사는 부실공사를 불러와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김현옥의 무리한 사업 구상 및 추진과 그로 인한 와우아파트 참사’라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을 다각도로 분석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졌으나 이들 역시 ‘김현옥 시정’이라는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기존 연구들이 충분히 규명하지 않은 지점, 즉 김현옥 이전 시기의 영세민 아파트 구상, 그리고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이 추진된 정치사회적 배경에 주목하여 시민아파트 연구의 지평을 확장시키려 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원형

필자는 시민아파트 관련 자료를 수집‧분석하며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이 발표되기 전부터 정부기관과 주택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영세민 아파트’ 구상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허가판자촌을 철거한 자리에 아파트를 세워 철거민에게 분양한다는 구상은 김현옥이 부임하기 전인 1964년경부터 나타났다. 자료의 생산 주체로 보아 서울시와 대한주택공사, 건설부가 중심이 되어 영세민용 아파트 건립을 구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서울시와 대한주택공사에서 활동하던 주택건축 전문가들은 잡지에 영세민용 아파트 구상을 기고하기도 했다.

1966~1967년 사이에는 기존의 영세민용 아파트 구상이 보다 진전된 형태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건설부의 자문기구였던 ‘주택‧도시및지역계획연구실(Housing, Urban and Regional Planning Institute, HURPI)’의 역할이 컸다. HURPI의 도시계획고문이었던 네글러(Oswald Nagler)는 영세민 아파트 사업의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금화재개발계획’을 진행하면서 당시 신임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에게 4평 규모의 초소형 아파트 건설을 제안했다. 서울시가 기본 골조를 지어주고 상하수도 및 난방 시설을 구비해주면, 입주자들이 내부 공사를 자신의 경제력에 맞춰 완성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김현옥은 시의 건축비 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서 네글러의 구상을 수용했지만 ‘4평’이라는 주택 규모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서울시는 시민아파트 한 호실의 규모를 8~11평 정도로 설정했는데, 대한주택공사가 ‘선진국’의 ‘최소주택’ 기준에 따라 작성한 주택 설계를 참조했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당시 영세민들의 경제적 수준으로는 그 정도 규모의 아파트에 입주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내부 공사까지 스스로 담당해야 했기 때문에 영세민의 경제적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굴절

두 번째 특징은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이 ‘3선개헌’이라는 정치적 국면과 시기적으로 맞물리며 변화하는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맞물림과 변화를 ‘굴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정리했다. 첫 번째 굴절은 시민아파트 건립 계획이 정책의 형태로 완성된 1968년 말~1969년 초에 발생했다. 이 시기는 박정희 정권과 민주공화당의 3선개헌이 모습을 드러내던 때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주택정책 결정자들과 미 원조당국은 한국의 주택문제가 정권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올 것이라 예상했고, 3선개헌이 추진되는 가운데 도시 영세민의 지지를 이끌어낼 전략이 필요했다. 게다가 3선개헌에 대한 찬반을 국민투표에 붙이게 되면서 도시 영세민을 정치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민아파트가 부각되었다. 따라서 서울시는 이 시기에 시민아파트 건립 규모를 크게 확대하는 동시에 건립 위치도 도심과 가까운 곳으로 조정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시민아파트는 서울을 넘어 전국 무허가판자촌 정책의 ‘제1순위’로 부상했다.

그림 1. 금화시민아파트 준공식(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두 번째 굴절은 3선개헌 국민투표가 끝난 직후인 1969년 가을부터 1970년 초에 발생했다. 3선개헌 국민투표가 박정희 정권의 승리로 끝나자 서울시는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효용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했다. 당시 시민아파트는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한 탓에 부실공사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입주권자인 무허가건물주들이 입주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입주권을 매매하거나 입주비용을 체납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했다. 그러자 서울시는 1969년 가을부터 시민아파트 건립 규모를 축소하는 동시에 건립 위치를 강남을 비롯한 변두리 지역으로 재조정했다. 또한 무주택 일반 시민에게도 시민아파트를 분양하기로 했으며, 중산층용 아파트 건설을 병행 추진했다. 1970년 4월 와우시민아파트의 붕괴는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실패를 가져온 중요한 계기였지만, 그 전부터 사업의 방향은 이미 도심지 인구 분산과 중산층용 주택 공급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 2.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현장 (출처: 국가기록원)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실패, 그리고 공간과 기억

이 논문을 작성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실패’가 갖는 의미였다. 하나의 실패한 사업이 한국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갖는 의미를 도출해내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이 실패함으로써 한국의 아파트 정책이 중산층 위주로 옮겨갔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 도출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의 실패 자체가 갖는 의미에 더 천착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필자가 선택한 방향은 한국의 주택정책이 갖는 고질적 문제점들이 발현된 주요한 사례로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을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경제개발의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주택건설을 위한 재정적 부담을 민간에 전가해왔으며, 주택정책은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이와 같은 주택정책은 중간 계층 이상의 자산형성을 지원하며 그들이 ‘중산층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반대로 주택구입이 어려운 저소득층을 도심 바깥으로 밀어내는 ‘무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으로 기존에 거주하던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광주대단지’를 비롯한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하여 힘든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시민아파트는 단 한 동, 회현 제2시민아파트(시범아파트)이다. 오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건물이다. 이 건물을 보고 있으니 문득 얼마 전 철거가 결정된 ‘충정아파트’가 떠올랐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로 알려져 있다. 건물의 철거와 보존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결정에 달려 있지만, 안타까운 점은 그들에게 ‘역사’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간, 특히 ‘집’에는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공간의 상실은 곧 경험의 상실이자 기억의 상실인 것이다. 공간에 담긴 경험과 기억을 복원하고 그것의 가치를 알려주는 일은 우리 역사학자의 책무가 아닐까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그림 3. 회현 제2시민아파트(출처: 근현대사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