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⑨]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_염복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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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6월(통권 30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

<大京城 候補地 선보기 巡禮>, <<조선일보>>, 1933.9.29.~10.17.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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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경성 도시계획 논의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부터 등장한 화두가 ‘대경성’이다. 이는 경성의 도시구역 확장을 의미한다. 주지하듯이 당시 경성 행정구역은 조선시대까지 한성부의 성저십리 지역은 물론 일제 강점 당시 행정구역의 상당한 부분을 인근의 고양군, 시흥군 등에 편입시키고 남은 이전 경성거류민단과 용산거류민단의 관할 구역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도시의 자연스러운 성장 흐름과는 어긋나는 것으로 도시구역의 확장 요구는 여러 갈래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대경성이란 이런 지향이 담긴 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대경성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거기에 내포된 내용은 다르기 마련이다. 당시 행정구역 확장 주장을 보면 조선인측에서는 주로 동서 방향의 확장을 주장하는 반면 재경성 일본인측에서는 남쪽으로 확장을 주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성부는 대략 양쪽의 주장을 절충하여 행정구역 확장안을 구상했다.

그림 1. 1926년 경성부가 작성한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의 행정구역 확장안, 최초로 문서화된 경성 행정구역 확장 구상이다.

그러나 1920년대 초․중반 행정구역 확장 논의는 경성 도시계획이 추진되지 않음에 따라 동력을 얻지 못했다. 경성 행정구역의 확장 움직임은 1930년대 들어 다시 활발해졌다. 구체적인 계기는 1931년 궁민구제토목사업으로 경성에서 동․서․남쪽 외곽으로 향하는 4대 교외 간선도로(한강인도교-영등포, 죽첨정[충정로]-마포, 광희문-왕십리, 동대문-청량리 구간)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경성부는 이 공사가 준공하는 1933년을 행정구역 확장 시기로 예상하고 1931년 한 해에만 세 차례나 확장안을 입안했다. 이 안은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대략 경성부를 둘러싸고 있는 고양군 연희면, 용강면, 은평면, 숭인면, 한지면 등을 포함한다. 그런데 1932~33년 도시계획 법령 제정이 궤도에 오르고 실지 조사를 진행하면서 편입 대상 지역의 기조는 약간 바뀌었다. 시내 쪽에 가까운 홍제리 정도를 제외하면 은평면 대부분이 편입 대상에서 빠진 대신 시흥군 영등포읍과 북면, 양동면 일부가 편입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것은 총독부 기사 야마오카 케이스케(山岡敬介) 등의 자문을 받은 안으로 총독부의 뜻이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무렵 신문에는 경성 행정구역 확장을 기정사실로 보고 그 후보지를 탐당하는 연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좀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명일의 경성, 부외일순기>(<<매일신보>>, 1929년 3~4월, 23회)라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확장안의 윤곽이 거의 결정될 무렵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조선일보>>, 1933년 9~10월, 14회)라는 기사가 보인다. 이어서 도시계획 법령의 공포(조선시가지계획령, 1934.6.20.)를 앞두고는 <자라나는 명일의 경성 대도시계획과 그 이상>(<<매일신보>>, 1934년 3~4월, 20회)이라는 기사가 연재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중 <<조선일보>>가 처음 연재한 경성 외곽 탐방 기사 <대경성 후보지 선보기 순례>를 살펴보겠다.

1회차의 전반적인 개요 설명을 제외하면 대체로 노량진에서 출발하여 한강변을 지나 동부, 북부, 서부의 순서로 경성 외곽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먼저 “당장 시내와의 연락은 이왕에도 왕십리 방면 청량리 방면 마포 방면의 전차가 있었으나 작년 이래로 국비와 도비로 세 곳의 전차선로의 도로를 15간통으로 대확장하야 시내와의 연락을 일층 긴밀케 하게 되니 행정구역의 확장 실시보다도 사실에 있서 교외지와의 연결은 굳게 맫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도시의 형성이나 도시의 발전이나 어느 때를 막론하고 그 성쇠의 열쇠가 되어 있는 것은 교통시설이다. 이런 의미로 금번의 교외선도로의 대개수는 교외지 발전에 큰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1회) 앞에서 언급한 4대 교외 간선도로 개수가 행정구역 확장의 토대가 되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점은 과거 수운으로 번성했던 지역의 쇠락상이다. 한강변을 지나는 여러 회에서 비슷한 묘사가 보인다.

이 곳(한강리, 보광리, 주성리, 두모포 등) 주민들의 대부분은 강변 운수 노동과 정미업 등으로 생애를 삼는 사람과 또 서울 시민을 상대로 야채장사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근년의 정황은 또 달라졌다. 상류지방에서 내려오는 것은 곡물은 적어지며 신탄류가 더 많아지고 올라가는 것은 소금이나 젓갈 등속이며 金肥 등이 있으나 전날 같지 못하다. 그것은 당연하다. 경원선의 철도편도 편리하여졌거니와 도로가 가는 곳마다 개축되어 하물자동차가 쇄도하게 되니 느리고 위험한 배편을 이용하는 사람이 적어지게 되었다. (5회)

왕십리와는 면은 다르나 교통상 연락이 되어있는 뚝섬으로 나가보자. 이즘은 동대문에서 뚝섬까지 가는 기동차가 있서 교통이 편해졌다. 뚝섬을 건너서면 채소밭이 전면에 널리어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섬이라 토질도 채소 재배에 좋으려니와 경성의 근교로서는 채소 배재가 다른 농사보다는 유리할 것이다. 그러나 근년의 채소 재배라는 것이 아주 말 아니라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근년은 경성을 중심으로 교통이 편리하여진 관계로 각처에서 채소가 모이고 일반 농산물이 싸진 관계로 작년 같은 해에는 무 한가리에 15전까지 했으니 그 값이야말로 뚝섬서 서울까지 가져가는 대가도 못되었다. (7회)

그 옛날 서울과 인천의 교통이 전연 한강을 이용할 때는 서울 사람들의 식량의 큰 부분이 되든 해산물은 모두 이곳서 퍼올리었다. 해물 뿐 아니라 하류 지방의 곡물은 물론 시초도 많이 이곳으로 실어냈다. 그 때문에 겨울은 적막하였으나 얼음이 풀리면서 봄 여름 가을을 통하여 이 포구에 드나드는 배는 수백 척에 달하였다. 그 당년 이 포구의 번창은 충분히 상상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포구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소조 적막하다. 여기 저기에 4,5척씩 배 대인 곳인 인부들이 수십명씩 모여 짐을 푸노라고 바삐 돌아가며 연방 소리를 치고들 있으나 동리 거리의 되어가는 품을 보고나 눈에는 기운찬 발전의 소리 같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저녁 노을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강상에 두 세척 떠있는 풍선 사공이 부르는 ‘뱃소리’ 그는 가을의 적적한 시취를 자아내는 풍경도 될 것이나 스러져가는 포구 ‘삼개’의 말을 조상하는 목매인 노래로도 들리었다. (13회)

한강리 일대, 뚝섬, 마포 등지의 묘사가 모두 비슷하다. 과거 수운이 서울로 가는 물류 수송의 중심이었을 시기 번성했으나, 일제시기 들어 철도 교통이 발달하고 점차 도로가 증가하면서 수송량, 안전성, 비용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수운은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성이라는 중심 도시가 팽창함에 따라 이런 지역의 위상은 서서히 바뀌어갈 것이었다. 한 사례로 뚝섬의 경우를 보자.

위 기사에서 잘 보이듯이 뚝섬은 전통적으로 서울 근교의 농업지로서 서울로 채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면 이런 역할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움을 알 수 있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뚝섬은 서울 근교 행락지로서 위상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림 2. 전차 교통과 연계하여 경성 근교의 행락지를 소개한 <<京電하이킹코스>>(경성전기주식회사, 1937)에 보이는 ‘뚝섬(纛島)유원지’

뚝섬에는 1930년대 경성골프구락부의 골프장이 조성되었으며, 유원지로 개발되었다. 아래의 글은 완연히 유원지화된 뚝섬을 풍경을 잘 보여준다. 1930년대 후반의 아래와 같은 기사는 완연히 유원지가 된 뚝섬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전차를 타시요. 동대문행- 동대문서 내리시거든 남편에 솟아있는 이층 양관으로 들어가시요. 뚝섬가는 기동차의 정거장입니다. 30분에 한 번씩 발차기 됩니다. 뚝섬유원지까지 10전! 25분만에 도착합니다. 뚝섬유원지에서 모래밭을 오륙정 가로 건너가면 기름 같이 흐르는 한강. 꽃잎 대신 흰돗대가 손짓을 하오리다. 버들가지가 인사를 드리고 봄바람이 웃음을 치오리다. (이서구, <애인 다리고 갈 사랑의 하이킹 코-스>, <<삼천리>>, 1937년 6월호)

뚝섬이 유원지가 된 것은 일견 경성의 도시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했지만, 동대문에서 뚝섬을 연결하는 궤도차(기동차) 노선을 운영하는 경성궤도회사의 사업이기도 했다. 도시 교통기관을 운영하는 회사가 수익 창출을 위해 이런 저런 부대 사업을 운영하는 것은 많이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림 3. 현재 1호선 동대문역 인근에 위치한 경성궤도회사터 표지석

이런 뚝섬의 위상은 아래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광복 이후에도 한강 종합개발이 시작되기 전까지 오랫 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에는 이 연재물에 포함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뚝섬이 경성 편입 대상으로 고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 실제 행정구역 확장에서는 빠진 점도 한 이유가 되었다. 뚝섬은 8.15 때까지 여전히 고양군 지역으로 남아있었다. 물론 경성 행정구역에 포함되었다고 당장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으리라는 법이 있지는 않지만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림 4. 1958년 영화 <지옥화> 속의 뚝섬 가는 기동차(서울시 경영)와 뚝섬유원지의 풍경, 전형적으로 한적한 교외로 묘사된다.

다음으로 신당리 일대와 동대문 밖의 여러 지역을 묘사한 기사는 공통적으로 도시빈민 주거의 문제를 지적한다. 이 일대는 경성에 직업적 근거를 가진 인구의 증가가 두드러지는 지역인데, 그들의 다수는 빈민으로서 이른바 ‘토막민’이라고 불린 존재이다.

장충단측은 송림새에 문화주택 백여채가 들어서서 푸른개와 붉은개와가 살림의 여유잇는 품을 자랑하고 잇는 한편에 바로 건너 뵈이는 배수지 일대의 산등에는 게딱지 같은 집이 개미알 같이 쓸어붙어 있다. 한편은 도시의 번잡과 공기의 불결을 피하여 교외로 나온 사람들이고 한편은 시내에서 살 수 없어 관청의 허락도 업시 공지를 찾아 산등에다가 토막 같은 집을 지어놓고 비와 바람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느날 달 밝은 밤 장충단 밖 성을 끼고 산책을 하며 감개에 넘치어 한참 발을 멈추었든 일이 있었다. 이슬 매친 솔가지에 물빛 같은 달빛이 새이고 있는 송림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피아노의 한가롭고 즐거운 멜로디를 들으며 멀리 건너편 산등서 반디불 같은 등불이 깜빡깜빡 하며 빈촌의 힘없는 살림살이를 그대로 말하고 있는 정경을 볼 때 두 가지 발전의 대조가 기구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6회)

근년 동대문 외 발전이라고 하면 신설리와 돈암리를 가르치지 안을 수 밖에 없다. (중략) 도회 근교의 발전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이상에 여러날 기록한 기사를 보아도 대개 짐작할 것이지만은 공장지대로 발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주택지로 발전하는 두 조건이 있다. 그러나 주택지로서의 발전은 돈 있는 시민을 상대로 할 때에는 이상적 발전을 하지만은 그러치 못한 세민계급들에게는 지역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질서하게 늘어나가 도시계획상 발전으로 본다면 괴로운 문제의 근거가 되는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떠하랴. 그 무질서한 발전이 당국로서는 괴로운 문제일 것이나 시내에서 살기 힘들어 만부득이 시외로 간편한 살림을 하기 위하야 몰려나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잇스랴. 그런데 근년 동대문 외의 발전은 대개 이러한 세민계급의 호구 증가로 되어있다. (8회)

신당리는 1920년대부터 토막민 주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리하여 경찰의 강제 철거 등으로 사회문제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경성부가 불교사회단체인 화광교원에 의뢰하여 추진한 토막민 집단 이전의 대상이 된 지역도 신당리였다. 위 기사에서는 장충단 일대 고급주택지와 대조적인 풍경이 인상적이다. 위치상 장충단 일대와 신당리는 옛 한양동성 안팎으로 붙어있는 지역이다.

아래 기사에서 적시한 신설리, 돈암리 등은 1930년대부터 급부상한 경성 동부 외곽의 토막민 주거지이다. 이 일대는 수년 뒤 경성 행정구역이 실제 확장되고 시가지계획을 시작하면서 대표적인 교외 주택지로 개발된 지역이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개발이 이루어질 때 이미 그 곳에 ‘불법적’으로 거주고 있는 빈민의 존재는 크게 문제가 될 것이었다.

그림 5. 1936년 <町別토막분포상황도>와 1938년 경성에서 개최된 전국도시문제회의 참석자들이 돈암정 토막을 시찰하는 모습,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확장된 경성에서 동대문 밖 일대의 토막 분포가 확연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여러 차례 묘사하고 있는 영등포 일대의 경우를 보자. 영등포는 노량진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2회차에서도 묘사되고 있으며, 3, 4회차는 이례적으로 두 회에 걸쳐 영등포의 도시 현안을 집중적으로 전한다.

영등포의 중요지대는 대부분이 오래전부터 큰 자본가들에게 점령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고 오늘에도 이미 대공장으로 경성방직, 용산공작, 피혁회사, 연와회사 등이 잇고 방금 건축 중의 맥주회사가 두 곳 등 대경성이 관청과 은행 회사 학교들로 된 안온한 문화도시로 옛서울의 전통을 많이 상속하고 있는 반면에 근대도시로서의 공업적 발전은 혼자 영등포가 전책임을 다지고 나가는 듯 한 감이 있다. (3회)

앞날의 대영등포를 꿈꾸고 있는 이곳의 읍장 영감은 “적어도 삼십만의 인구를 포옹할 도시를 목표로 한다”고도 말하기는 하나 그것이야말로 어느 명년의 일일런지 측정키 힘든 일이나 우선 당장에 발전되고 잇는 현상으로만 보아도 놀랄 만 하다. (중략) 명일의 영등포를 위한 당장의 문제는 시구개정과 하수도 공사이다. 아무리 대도시의 원대한 전도를 가지고 있다 하나 아직 시구라고는 경인가도의 간선 하나 외에는 길이라고 볼 것이 없고 또 하수도의 설비가 없어서 시가의 면목을 유지치 못하고 있다. 읍당국에서도 당면한 시설로 명년의 사업으로 착수할 계획은 있다고 하나 아직 예산이 확정치 않은 모양인데 대영등포의 전도로 보아서는 수도의 설비까지 있는 오늘에 하루 바삐 해야할 시설의 하나로 되여있다. (4회)

영등포는 위 기사에서 언급하듯이 이미 1910년대부터 공업지역이 형성되었다. 그 시발점은 1911년 조선피혁의 공장 설립이다. 조선피혁은 원래 공장 입지로 용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총독 테라우치(寺內正毅)가 직접 영등포를 권유했다고 한다. 이후 영등포에는 1919년 용산공작회사 영등포공장이 설립되었으며, 1923년 일제시기 한국인 기업의 대표격인 경성방직도 공장을 설립했다.

이 무렵부터 일본의 본토 대자본도 영등포 진출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대일본맥주회사가 영등포에 공장 부지를 매입했다. 대일본맥주는 1930년대 들어 현지법인으로 조선맥주를 설립하여 1934년 맥주공장을 건립했다. (현재의 하이트진로) 이에 대일본맥주의 라이벌인 기린맥주도 현지법인으로 쇼와(昭和)기린맥주를 설립하고 비슷한 시기 공장을 준공했다. (현재의 오비맥주) 두 맥주공장은 철도 관사지를 사이에 두고 철도인입선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이후 영등포는 가네후치(鐘淵)방적, 동양방적, 대일본방적 등 유수의 대방적회사 공장이 잇달아 들어서는 등 공업지역으로 더 개발되었으나, 양대 맥주공장은 1930년대 초부터 영등포 공업지역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림 6. 1937년 쇼와기린맥주 영등포공장의 전경과 1996년까지 사용된 맥주 담금솥, 현재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비맥주 공장부지에 조성된 영등포공원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 기사를 보면 1933년 현재 공업지역으로 크게 발달한 영등포는 그에 걸맞는 도시 인프라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크게 도로와 하수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적어도 삼십만의 인구를 포옹할 도시를 목표로” 하는 “대영등포”를 꿈꾼다는 읍장의 발언이다. 모두에서 언급했지만 경성 행정구역 확장안이 점차 구체화되면서 1933년경이면 총독부와 경성부가 구상한 확장안에는 영등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의례적인 말일 수도 있으나, 영등포읍장의 ‘대영등포’ 발언은 이와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경성부는 1935년 봄부터 편입 대상 지역 측량을 실시하는 등 행정구역 확장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편입 대상 읍회, 면협의회의 의견을 비공식적으로 청취했는데, 면 지역은 큰 이견이 없는 반면 영등포읍회는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그 이유는 영등포읍은 굳이 경성부에 편입되지 않아도 공업지역으로 발전이 유망한 곳으로 오히려 府債가 90만원에 이를 정도로 재정적으로 취약한 경성부에 편입되면 부담만 늘어날 뿐이라는 것이었다.

1935년 9월 총독부가 경성부 편입에 대한 자문안을 공식적으로 각 읍회, 면협의회에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천편일률적인 편입 찬성 답신안을 작성한 면협의회들과 달리 영등포읍회에서는 편입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언론의 표현을 빌면 “영등포읍회 공전절후의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매일신보>> 1935.9.11.)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영등포경찰서장 출신의 일본인 의원 테가 토코고로(手賀常五郞)가 영등포의 독자적 발전론을 들어 편입에 강경하게 반대한 반면 한국인 의원 김태집이 영등포에 유리한 조건을 붙혀 찬성하자는 논의를 주도한 점이다. 그리고 이 같은 찬반 양론을 거든 다른 의원들도 대개 민족별로 나뉘었다. 총독부의 방침에 대한 지역유력자의 강온의 태도가 민족별로 나누어지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결국 편입 찬반 논란은 “당국에 대해 반항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으로 정리되었다. (<<경성일보>> 1935.9.13.) 그리고 영등포읍회는 선거제도의 개정(말은 그럴듯 하지만 결국 영등포에 경성부회 의원을 많이 배정해달라는 의미), 교육기관의 확충, 간선도로의 우선 부설, 영등포역 지하도 개설, 위생시설의 완비, 소방기구 확충, 區制 시행과 영등포구역소 설치 등의 희망조건을 부기하여 편입에 찬성한다는 답신안을 총독부에 송부했다. 답신안에도 1933년 기사에서 영등포 읍장이 언급한 현안 사항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림 7. 1936년 경성 행정구역 확장

1936년 4월 1일부로 경성 행정구역은 공식적으로 확장되었다. 그런데 이에 즈음하여 <<조선일보>>는 <대경성 도시계획 검토>(1936년 1월, 6회), <대경성 출산전야 공론>(1936년 2월, 6회, 좌담회), <우리 동리 긴급 동의>(1936년 4월, 23회) 등 세 차례나 잇달아 관련 연재물을 게재했다. <<동아일보>>가 같은 기간 새롭게 편입되는 행정구역의 명승지를 탐방하는 연재물 <경성 신명승 순방>(1936년 3~4월, 5회)을 한 번 게재했을 뿐이라는 점에 비추어보면 특기할 만 하다. 한국어 언론 중 도시의 확장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에 더 깊이 있는 관심을 기울인 것은 분명 <<조선일보>>였다. 그 배경은 여러 모로 따져볼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김하나, <<근대 서울 공업지역 영등포의 도시 성격 변화와 공간 구성 특징>>,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김동민, <조선후기~해방전후 뚝섬 지역의 서울 근교로서 역할의 변화와 특징>>,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김정은, <뚝섬유원지의 생성과 공원화>, <<한국조경학회지>> 46-1, 2018.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https://futureheritage.seoul.go.kr/web/main/index.do)
한국영상자료원 한국고전영화(https://www.youtube.com/watch?v=4FU1Hc7Zk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