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회의 참관기] “중앙권력과 인천의 역할” 참관기_이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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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5월(통권 29호)

[학술회의 참관기] 

 

“중앙권력과 인천의 역할” 참관기

 

이민기(중세 1분과)

 

“인천”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인천’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오를까? 인천 차이나타운의 사천짜장면을 떠올리는 분들도 있고, 자유공원과 맥아더 장군 동상 또는 항구와 바다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인천은 월미도와 강화도 등 과거부터 유명했던 곳부터, 최근 송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재발견되고 회자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미지를 가지기까지 인천은 어떻게 변화해 왔을까? 이러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인천과 강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움이 개최되었다.

2022년 4월 23일(토) 한국역사연구회와 인천문화재단은 공동심포지엄 <중앙권력과 인천의 역할>을 개최했다. 발표자와 토론자는 별도로 지정된 장소에 모이고, 학술대회는 인천문화재단IFAC YouTube 채널에서 송출되었다. 총 11개의 발표로 구성되었는데, 이영학 한국외대 명예교수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고대시대부터 분단에 이르기까지 총 10개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이 발표로 인해 현재 인천이 가지는 특수성의 속성과 이러한 속성을 가지기 위해 발동되었던 중앙권력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변화했는지 규명하려고 하였다. 이 글에서는 기조강연과 종합토론의 내용은 차치하고, 주된 발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구성하였다.

군사 요충지로서 인천 지역의 발견

인천은 한강변에 도읍했던 백제시기부터 주목받은 곳이었다. 고대시대의 인천에 대한 글에 대해 나용재 선생님의 <백제 한성도읍기 미추홀의 위상과 역할> 발표와, 이일규 선생님의 <6세기 신주에서 신라통일기 한산주로 지금까지의 현구와 향후 전망> 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나용재 선생님은 백제 한성 도읍기 기간 미추홀의 위상과 역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설명해주셨다. 곡물과 소금의 교역이 중요했던 당시, 미추홀을 기반으로 했던 집단과 위례를 기반으로 했던 집단 사이에 벌어졌던 관계맺기에서 점차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지역의 성격을 갖기까지의 변화과정을 설명하였다.

이일규 선생님은 신주에서 한산주로 이행해가는 흐름 속에서 이와 관련된 기존 연구의 다양한 쟁점을 아울러 짚어보는 한편, 향후 연구에서 주목할 만한 방향에 대해서 제시하였다. 주로 신주 · 한산주의 행정적 거점이 되는 치소의 위치나 이동에 중점을 두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고고학 발굴 조사결과와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명문까지 동원하여 심층적으로 추론한 방식이 돋보였다. 그 결과 지금의 인천지역인 ‘신주’와 ‘한산주’와 관련한 지금의 연구성과들을 넘어서서 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고대시대의 인천, 즉 미추홀과 신주, 한산주에 이르는 변화과정은 기존 지역집단들이 어떻게 집단을 이루고 어떠한 영향을 받아가면서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다양한 고고발굴조사를 통해 확인 되는 물질적 요소들 마저 다양한 변화상을 시사한다. 단순히 변화했다라고 말하기에는 이 지역의 얽힌 물적 자료들과 여러 자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재해석하려는 노력과 그 변화가 글의 주제가 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발표였다.

권력투쟁의 장으로서 인천과 서해

이후는 후삼국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의 인천의 변화에 대해서 알수 있는 발표들이었다. 이창섭 선생님은 <후백제 수군의 서해공략과 고려의 대응>이라는 제목으로, 김도연 선생님은 <최우의 강화천도와 권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진행해주셨다. 학술발표대회의 주된 핵심어인 “중앙권력”과 본격적으로 맞닿아가는 부분이어서 흥미로운 발표였다.

이창섭 선생님은 고려가 태조 15년 9월과 10월에 걸쳐 후백제 수군에게 공격받으면서 수군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태조가 후백제군의 기습을 직접 받았으며, 약탈을 당하여 물적 피해를 크게당하였던 상황에 주목하였다. 이후 고려는 국가차원에서 반격 및 피해복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이러한 총체적 난국상황에 돌파구를 마련한 사람이 유금필이었음을 주장하였다. 유금필은 후백제 수군을 공격하여 성과를 올렸으나, 그간 곡도, 포을도 같은 ‘방치 된 섬’을 재발견하여 고려 수군을 재건하려 했는데, 이러한 노력이 고려 수군을 재건하는 하나의 경로로 제시되었음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지금의 백령도⋅대청도에서 징발한 병력과 전함, 그리고 이같은 형태의 수군 재건 모델은 태조 15년에 파괴되었던 고려 수군 재건의 초석이 되었다. 이곳에서 시작된 고려 수군 재건 시도는 추락한 고려와 태조의 위신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후삼국 통일전쟁에서 수세에 몰렸던 고려가 위력을 되찾는 데 힘을 더해주었다. 아울러 고려의 주요한 호족이었던 유금필의 정치적 재기를 가능하게 하였고, 고려 중앙정계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도연 선생님은 이른바 무신집권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최우와 그가 강화천도를 가능하게 한 그의 권력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 직후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는 몽골의 본격적인 침입으로 이어졌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최우가 출병 및 지휘관 선정등의 문제에서부터 결국 대몽항전으로 이어지면서 강화천도가 연결되는 지점은 특이한 사례라고 강조하였다. 개경에서 강화로 천도한 것 뿐만 아니라 천도한 이후에도 최우는 국왕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논증하였다.

이렇듯 중앙정부의 다양한 활동과 더불어 그동안 ‘방치되었던’ 섬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서 재발견되어지고 다시금 사용되기도 하였고, 중앙권력에 의해서 수도가 변경되기도 한다. 국가권력이 위기를 맞을때 그에 대한 해결방법으로 다른 지역에 책임을 돌리거나, 또는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고려시대 중앙권력 역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아내어 활용하거나, 일부 지배층이 가지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한 장소의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하게 하는 발표였다.

중앙권력을 가시화하는 장으로써 인천과 강화

조선의 수도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로 정해지면서 인천의 중요성은 한층 더 커지게 된다. 한양의 관문으로써 가지는 인천의 입지는 더욱 높아졌고, 인천과 바로 맞붙은 강화 역시 도호부로 점차 그 격이 올라갔다. 송기중 선생님의 <17~18세기 통어영의 설치와 운영- 통제영과의 비교를 중심으로>와 안선규 선생님의 <조선후기 왕실 현창 시설의 강화도 건립과 지역 동향> 발표가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방과 왕실의 권위 현창이라는 두 요소가 수도가 아닌 다른 지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 있는 발표라 흥미로웠다.

송기중 선생님은 순수 군영인 통제영보다 군영이자 군현의 성격을 가진 통어영에 주목하여 그 운영방식의 독자성과 의미에 관해 발표를 진행하였다. 통어영은 통제영에 비해 군사의 규모가 절반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지역에서는 가장 큰 수군 관청이었음에 주목하였다. 나아가 조선 정부가 3도 수군을 관리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통제영에 비해 위상도 낮고 규모도 작은 군문으로 설계한 이유에 대해서 북방의 적 방어에 수군이 남방보다는 낮았으며, 물자 및 인력동원의 제한때문이었다고 해석하였다. 지리적 입지와 관련하여 방어에 있어 주적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물자의 이동이 얼마나 용이한지에 따라 그 사용이 달라짐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안선규 선생님은 왕실 현창시설을 강화도에 설립한 이유와 그에 따른 지역민들의 태도에 주목하였다. 조선왕실은 왕실을 높이기 위한 특별한 건축물을 설립함으로써 백성들이게 지역적 특수성 및 자부심을 고취하여 나라에 충성하게끔 하려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강화가 다른 지역과 차별되는 지역 경관을 갖추게 되었음은 물론, 함께 진행된 정책의 영향으로 독특한 지역 정서를 갖게 되었음을 논증하였다. 이에 따라 강화는 왜란 당시부터 왕실의 피난처이자, 어진 및 실록의 임시 봉안처 및 정식 현창 시설이 건립되는 변화를 겪게 되었고,이에 따른 의례가 실천되었다. 이는 강화만의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었고, 나아가 강화의 인문지리적 경관을 변화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지역민의 삶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을 주장하였다.

이렇듯 한 지역에 중앙권력이 그들의 전체적인 계획에 따라 지방을 경영하고 그곳의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소속감을 심어주려는 다양한 방식들을 엿볼 수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화와 인천은 국방 뿐만 아니라 국방과 관련한 사건들로 인해 왕실이 그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여러 건축물들을 세움으로써 존재를 알리려는 목적으로 그들 지역민과 관계맺기하려는 양상들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인천과 강화는 국방과 왕실의 보장처라는 두 축으로 연결되어 그들 나름대로의 자신들의 땅을 어떻게 인식하려고 했고, 중앙권력은 어떻게 이용하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되었다.

다양한 권력들이 부딪히는 인천

지금의 인천이 가지는 관광적인 요소는 다 개항기 때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개항기 인천에는 여러 조계지들이 있었고, 차이나 타운을 필두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 나아가 인천 자유공원에 서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인천의 풍경을 만든 시대인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걸친 변화들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었다. 김항기 선생님의 <개항기 중앙권력에 의한 강화지역 군대의 성격 변화>와 류창호 선생님의 <인천부세진흥회의 ‘대인천’건설 운동 –1920~30년대 화정 해안매립과 산업도로 건설을 중심으로>, 이정희 선생님의 <중일전쟁 시기 인천화교의 항일활동 – 일동회를 중심으로 >, 예대열 선생님의 <분단시대의 우상 – 서해5도 수역을 둘러싼 안보개념의 발명과 변주>가 이러한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다.

김항기 선생님은 개항기 중앙권력이 강화지역 군대를 어떻게 활용하였는지 살펴보았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 강화도지역 군대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최일선에서 방어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개항 이후 중앙권력은 강화지역 군대를 동학농민군 진압, 단순 치안유지, 권력 과시를 위한 행사에 동원되었던 점에 주목하였다. 일제의 침략정책이 가속화 되면서 한국의 중앙권력은 국가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했고 군대마저 해산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화의 해산군인들은 권력유지를 위한 군대가 아닌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으로 전환된 점에 주목하였다. 이 같은 강화지역 군대의 성격 변화는 개항기 군사제도의 변화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라고 주장하셨다.

류창호 선생님은 인천부세진흥회의 창립과 활동을 통해 인천의 도시계획 변화와 식민 사회의 갈등 관계를 살펴보았다. 인천부세진흥회는 일본인 자본가를 주축으로 하고, 조선인 자본가가 보조하는 개발지상주의 이익단체였다. 인천부세진흥회는 도시계획을 통한 지가상승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자본가들이 모인 단체였다. 이들의 주요 전략은 ‘인천애’를 부르짖는 실천적 대중운동을 통해 도시 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실제적인 사업에 있어 식민지인들은 여전히 차별받았음을 주장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천부세진흥회의 “대인천” 건설운동은 축항 확장, 경인철도 복선화 등은 경성과 원할한 교통망을 확보하게 되어 인천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지만, 경성의 자본가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또 전시체제가 재정문제에 따라 사업이 중도 포기되는 등의 이유로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익집단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지금의 인천이 도시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음을 주장하였다.

이정희 선생님은 중일전생 당시 조선 화교, 즉 재한 중국인들의 항일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발표해주셨다. 조선화교들은 ‘일동회’라는 조직을 통해 여러 항일운동을 진행하였고, 그 주된 장소는 인천이었다. 일동회는 1940년 2월 22일부터 1943년 4월 24일까지 약 3년 동안 방화 12건, 일본군의 첩보 제보 2건을 감행했으며, 1943년 12월까지 체포된 15명 가운데 9명은 외환죄(外患罪), 방화, 군기보호법 위반, 국방보안법 위반의 죄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중 사항락, 왕지신, 방숭학, 오진매는 1944년 수감되어 있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한 사실이 밝혀져 있지만, 이들의 항일운동을 하게 된 경위와 활동에 대해서는 접근하기 어려웠음을 지적하면서, 이들과 관련한 기록인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된 “중공팔로군계모략도 일동회사건” 자료를 통해 그들의 조직과 항일운동에 대한 동기등을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발표해주셨다.

예대열 선생님은 “서해 5도”, 즉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가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어떻게 안보의 최전선으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발표했다. 중국의 불법어선과 북한의 도발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해 5도 사람들의 일상은 이미 “만들어진 안보” 개념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시사하며, 인천의 바다가 탈 냉전으로 가는 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섬에 대한 “안보”개념은 1990년대 이후 남북관계에 가장 전향적이었던 김대중 정부하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서해 5도 주변 수역을 둘러싼 갈등이 최근에 들어선 문제임을 제기하였다. 이들 맥락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서해 해상경계선을 둘러싼 남북한의 입장 차이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언제든 한반도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2007년과 2018년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서해를 평화로운 바다로 만들기 위한 합의가 있었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그 합의는 무위로 돌아갔고 이곳은 다시금 분쟁과 대결의 최전선이 될수밖에 없었던 변화상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이들 지역이 남북관계의 부침과 상관없이 이 지역을 항구적인 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음을 전망하였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다와 국방, 사람과 생활이 변화할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요인들로 발표가 이루어졌다. 해산군인과 일본인 자본가, 일제에 대항하는 재한 중국인과 현재의 서해 5도와 관련된 국방이슈들은 인천지역이 지금도 많은 이슈들을 가지고 있는 지역적 장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나가며

상당히 압축적인 내용의 발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대의 순서대로 인천의 변화상을 알 수 있게 발표의 순서를 고려한 기획자의 배려가 돋보이는 심포지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이진한 고려대학교 교수님이 좌장을 맡으신 종합토론에서도 많은 논의들이 오고 갔다. 별개의 논문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하나의 큰 맥락, 중앙 권력과 인천이 각자의 역할을 맡고 있었고, 그 안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의 큰 동력이 되어 ‘인천 지역’이 다채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자들이 인천을 보는 시각이 각자 다를테지만, 그 안에 연구대상이 된 인천과 인천 사람들이 중앙권력과 인천의 양자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시대적 역할을 감당하였고, 그로 인해 생긴 문화의 자국들을 찾아 나가는 훌륭한 장의 역할을 감당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조발표를 비롯해 10명이나 되는 발표자들이 각자의 연구를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은 그 어떤 것보다 갚질 것이다. 특히나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시대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알 수 있는 심포지움의 기획은 더더욱 힘들고 찾기도 어렵다. 각각의 발표와 토론을 맡아주신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러한 기획의 심포지움이 더욱 활성화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