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5세기 백제의 외래 위호 수용배경과 활용_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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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4월(통권 28호)

[나의 학위논문] 

 

5세기 백제의 외래 위호 수용배경과 활용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1.08.)

 

남소연(고대사분과)

 

논문의 시작

『宋書』와 『南齊書』 百濟傳에 기록된 중국과 백제의 책봉 양상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제왕이 신료들에게 중국식 관작을 假受하고 이를 남조의 황제에 追認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특징 때문에 백제의 外來 位號 수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진 편이다. 그러나 左賢王·右賢王(이하 좌·우현왕) 및 將軍號·지명을 더한 王侯號·太守號와 長史·司馬·參軍 등의 府官號를 각각 연구하였기 때문에 위호들 간의 관련성 및 수용배경이나 활동에 대해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부족했다.

특히 5세기 중반 蓋鹵王의 表文에 보이는 좌·우현왕에 대해서는 匈奴·突厥의 예를 들어 군사권을 장학한 군주의 근친자가 임명된 것으로 정리된 이래 크게 진전된 논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5세기에 이르러 백제가 과거 흉노의 위호를 사용했던 배경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된 바가 없었다.

匈奴式 위호는 백제뿐만 아니라 烏丸·鮮卑 등 후대의 다른 이민족들도 사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흉노 세력이 전성기가 아니었던 4~5세기에도 여러 비한족계 세력들이 單于 등의 흉노식 위호를 활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그 역사적 권위가 어떠한 형태로든 이어져 오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바탕으로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이 명백한 백제의 좌·우현왕을 살펴본다면 좌·우현왕의 수용·활용과 더불어 같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는 다른 외래 위호에 대한 실마리 역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흉노의 위호가 어떤 의미이며 사용한 목적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흉노 군주의 칭호였던 ‘선우’를 중심으로 그 하부의 좌·우현왕에 대한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근거로 5세기 백제의 좌·우현왕 수용·활용 양상을 보고 나아가 백제의 다른 외래 위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서 당시 백제 정국에서 외래 위호 도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동아시아 諸民族의 흉노식 위호 인식

흉노는 漢과 화친·전쟁을 반복하면서 당시 동아시아의 또 다른 거대세력으로써 자리 잡았다. 흉노의 쇠퇴 이후에도 그들의 위호가 계속 잔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아시아에 ‘흉노’라는 거대한 세력이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위상이 강하게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匈奴式 位號인 선우는 오환·부여·고구려·저족 등 非漢族 계통의 대표적 명칭으로 활용되고 있었으며 한족왕조 역시 흉노식 위호를 비한족계 세력의 대표 명칭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흉노식 위호는 분열기였던 4세기 16국시대에서 한 번 더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관내로 남하한 비한족계 세력들은 다수의 한족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지배체제 구축이 필수적이었다. 비한족 계통을 대표하는 선우의 칭호로는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16국시대 여러 나라에서는 선우 밑에 좌·우현왕(輔)을 두고 이 좌·우현왕과 하부조직을 여타 胡族으로 편성하여 선우와의 친소관계에 따라 배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대 왕권이 안정되고 기반이 공고화 되면서 자신들의 인척을 大單于로 임명하여 胡人들에 대한 통치를 전담하게 했는데, 이를 실행했던 기구가 ‘單于臺’이다. 선우대를 통한 관료제적 직임의 정비는 선우의 성격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건된 선우의 통치가 이러한 것이라면 선우 아래에 있던 좌·우현왕 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흉노식 위호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漢代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던 흉노가 소멸한 이래 일정하게 변화되어 왔다. 백제에서 좌·우현왕이 사용되고 있던 대략 5세기 정도의 흉노식 위호는 前漢代 흉노가 사용한 위호와 비교할 때 그 위상과 기능면에서 모두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을 5세기 백제가 수용했던 좌·우현왕의 성격과 기능을 파악할 때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좌·우현왕 도입과 활용

그 동안의 백제 좌·우현왕에 대한 견해들은 해당지역들 간 뚜렷한 관련성을 가지고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백제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흉노식 위호의 위상과 기능이 크게 변해버린 상황에서 굳이 과거의 의미를 복원하여 사용했던 이유 역시 불분명하다. 5세기 백제가 사용한 좌·우현왕은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수용된 것 보다는 스스로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 등을 통해 화북지역의 비한족 세력과 백제의 교류와 『宋書』, 『資治通鑑』 등의 기록들을 통해 인적 교류의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5세기 백제가 좌·우현왕을 활용한 배경에는 화북지역 세력들과의 교류뿐만 아니라 당시 북중국과 비슷했던 백제 내부 상황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隋書』 百濟傳을 통해 백제 내에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宮南池에서 발견된 목간을 통해 도성 내에 외부 출신의 주민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정황들과 당시 동아시아에서 흉노식 위호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고려해 볼 때 좌·우현왕은 2세기말에서 3세기 이래로 계속 이어져 오던 다른 이민족들을 통솔·관할하는 기능을 고려하여 수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흉노식 위호가 가진 역사적 위상이 동아시아에 확산되어 있었고 백제가 흡수한 세력에게도 이러한 점이 인식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마무리

좌·우현왕 뿐 만 아니라 장군호의 경우 당대 남조에서 사용되지 않은 장군호가 보이고, 왕·후호의 경우에는 앞에 붙은 명칭이 백제의 지명으로 추측되고 있다. 또한 태수호 역시 그 지명이 당대 남조에서 활용되는 지명이 아니었다. 이처럼 좌·우현왕을 제외한 다른 외래 위호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동아시아에서 통용되어오던 관작 인식을 백제가 들여와 필요에 맞춰 활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각각의 위호가 백제에서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였다. 앞으로 이에 대해 설명할 수 있도록 연구하여 보완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