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한국사교실 참관기] 다시 다듬어본 주춧돌, 넓어진 연구의 지평_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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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3월(통권 27호)

[제11회 한국사교실] 

 

다시 다듬어본 주춧돌, 넓어진 연구의 지평

– ‘신라사의 연구성과와 최근 동향’을 듣고서 –

 

김주영(서울시립대 국사학과)

 

한국역사연구회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서가에서 발견해 읽었던 <고대로부터의 통신>을 통해서였다. 필자는 고대사 연구자의 꿈을 조금씩 키워나가기 시작한 시절, 마음속에 처음 놓았던 주춧돌 같은 책의 저자로 한국역사연구회를 기억하고 있었다. 독서 경험을 통한 추억도 추억이었지만, 무엇보다 학문의 길을 꿈꾸는 학부생으로서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고자 하는 바람이 이번 한국사교실로 필자를 이끌었던 것 같다.

코로나 19와 비대면이라는 두 단어로 점철된 1년을 보내면서, 입으로는 연구를 외치면서 수족은 성적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또 ‘고대사’ 연구를 꿈꾼다는 핑계로 점점 조망하는 역사의 지평이 좁아지는 모습을 대면했을 때, 입학하고서 처음 가진 면담 중 교수님들께 들었던 말씀이 채찍처럼 귓가를 때렸다. “넓게 보라. 어느 시대를 공부하든 전체를 보지 못하면 부분을 보는 것만 못하다.” 처음 역사학에 뜻을 두면서 놓았던 주춧돌을 한국사교실을 통해서 다시 다듬어보고 싶었다.

한국사교실은 이틀에 걸쳐 비대면으로 진행되었지만 구성된 강의는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신라사부터 중세의 고려·조선사, 근대사와 현대의 북한사를 다루는 다섯 강의가 먼저 진행되었고, 데이터베이스화한 조선시대·근현대사 사료의 이용에 대한 두 강의가 한국사교실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각 시대사 연구의 성과와 논점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강의기도 했지만, 연구자로서 해당 분야를 바라보는 선생님들의 시각도 엿볼 수 있었기에 더욱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인문학’으로써 인접 학문이 제시하는 방법론의 도입, 그간 누적된 연구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배제해왔던 역사적 일면에 대한 재조명, 나아가 연구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골방과 서가 속에서만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오히려 그 반대의 길에서 통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재차 깨닫는 순간이었다.

7차례의 강의 중에서, 이현주 선생님께서 진행하셨던 ‘신라사의 연구 성과와 최근 동향’은 첫 강의였던 만큼 가장 인상적으로 들었던 강의였다. 한국고대사에서 신라사 연구가 지니는 위치와 ‘신라사’의 영역 속 고대사 연구의 현황을 살펴보면서, 점차 ‘문헌’의 범위를 넘어 다종다양해지는 사료와 더불어 그것을 접근하는 방법에 관해 고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강의에서 주목해서 들었던 내용은 20세기 후반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출토된 주요 사료들의 소개였다. 특히 신라사 연구의 획기점으로 작용했던 봉평리비·냉수리비·중성리비는 법흥왕 대에 포고되었던 율령에 선재하는 법의 존재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를 지배하는 법의 정의와 구조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여지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령의 반포’라는 현상을 고대 국가의 완성을 판단하는 지표로써 흔히 언급된다. 하지만 6세기 초반 신라의 금석문 속 법(法)과 교(敎)의 존재는 율령의 반포를 기존 사회의 관습과 규범을 일원적으로 정리해 성문화하는 단계로 생각하게 만든다. 중앙 집권적인 체제의 완비로서 율령이 지니는 의미 또한 무시할 수 없지만, 금석문을 통해 율령 이전 고대 사회가 체계화된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가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강의 중반에 소개된 경주 월성의 최근 조사 결과 또한 고무적이었다. 인신공희로 성벽에 묻힌 것으로 이해되는 인골도 흥미로웠지만 선생님께서 훨씬 무게를 두어 소개한 발천의 사례가 더욱 큰 흥미를 끌었다. 삼국유사가 알영의 탄생지로 전하는 장소가 실제 월성의 북쪽에 존재했고, 그곳에 인공적인 수리 시설과 건물이 세워졌다는 조사 결과는 고고학의 저력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다른 시대에 비해 문헌 사료의 부족함이 가장 많이 성토되는 고대사인 만큼, 문자 자료 이외의 고고 자료까지 사료의 외연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발천과 월성의 최근 조사 결과는 그 자체로 신라의 도성 구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괄목상대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는 연구자로서 다루는 역사의 범위가 곧 공간과 물질의 세계까지 침투했음을 의미하는 일이다. 이미 고대사 연구 속 고고학은 인접 학문을 넘어선 제 2의 ‘방법론’의 영역에 다다랐음을 다시 곱씹을 수 있었다.

한편 ‘통일신라’를 향한 극적 과도기로 생각했던 7세기 한반도의 역사상에 대한 논의는 필자가 주목하지 못한 문헌사의 위치를 재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필자는 그동안 사료의 외연으로 확장되어나간 금석문과 고고학의 세계에 과하게 무게를 두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고대사 연구의 시발점은 문헌 사료였다. 그간 충분히 연구된 분야라고 판단했던 7세기의 한국사에 대해 왕성하게 논의되었던 연구 현황은 그간 필자가 문헌 사료를 대하는 인식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부족함이 많은 문헌 사료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어떻게 사료를 분석하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역사상이 현상될 수 있음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였다. 시간상의 한계로 주요 논점의 전개를 짚는 방식으로 소개되며 강의가 마무리된 점은 아쉬웠다. 그렇지만 처음 학부 시절 품었던 고대사 연구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보다 집중해야 하는 것을 고찰하는 계기로 이어졌기에 충분히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신라사의 연구성과와 최근 동향’이 다루는 주제만큼, 신라사 연구의 주요 성과와 논점의 동향을 헤아리기에 훌륭한 강의였다. 연구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떤 분석이 요구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맥락을 지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간 한국사학계가 넓혀온 연구의 지평을 한국역사연구회의 어깨를 빌려 조망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필자 자신이 학부에 들어온 이유이자 공부를 시작하며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들을 다시 매만지고 다듬을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과장되게 인식해왔던 부분들을 다시금 확인해보고, 새로이 집중해야 할 영역에 대해 자세히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 한국사교실은, 1년 동안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연구를 향한 마음 속 주춧돌을 가다듬는 시간을 선물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