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명·청 사신의 조선 방문과 한양의 장소들_김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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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2년 1월(통권 25호)

[나의 학위논문] 

 

명·청 사신의 조선 방문과 한양의 장소들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1.08.)

 

김수연(중세2분과)

 

이 논문은 조선에 파견된 명·청 사신들이 한양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방문한 장소의 차이를 분석함으로써 지금껏 서울 연구가 설명하지 않았던 외교무대로서의 한양이라는 공간적 성격을 밝혔다.

필자는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당시 조선시대 한양과 궁궐 운영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한양과 궁궐은 조선의 수도이자 국왕의 공간으로서 이들 장소에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쌓여왔다. 필자는 특정한 인물의 관점에서 한양과 궁궐이라는 공간을 좀 더 생동감 있게 다뤄보고 싶었다. 그러나 궁궐은 국왕의 거주지로서 관찰의 대상이 아닌 탓에 해당 공간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조선 사람들의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의 시선으로 볼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조선에 방문한 사신들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존 명·청 사신 연구는 주로 부경사행(赴京使行) 위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연행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가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한양을 방문한 명·청 사신에 대한 연구는 의례 분야에서 다수 제출되었다. 이들 연구에서는 외교와 의례 부분에서 깊은 분석이 있었으나 장소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다. 시어소는 사신의례가 진행되는 장소로서 그 의미가 중요하지만, 관련 선행연구들은 이러한 사실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따라서 필자는 기존 연구성과의 의의와 한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조선을 방문했던 명·청 사신의 시선을 통해 조선 조정과 이들 사이에서 나타난 국제관계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국왕의 도시이자 외교무대로서의 한양이라는 조선시대 서울의 역사적 의미를 탐색하고자 했다.

조선은 명·청의 의례질서에 호응하는 관계에 있었으므로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였고, 사신들은 외교 사안을 가지고 온 황제의 대리자였기에 국왕이 직접 나서서 이들을 접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명·청과 각각 다른 성격의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사신외교 양상은 시기별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주목할 점은 시기별 외교 양상의 차이가 장소적인 차이로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조명관계 속에서 공식적인 사신의례는 법궁이었던 경복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명 사신의 경우에는 사행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넉넉한 체류 기간 동안 비공식 일정 중 명 문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한양의 명승지를 방문하였다. 명 사신은 서호(西湖) 변을 주로 유람하였다. 희우정(喜雨亭, 후일에 望遠亭), 잠두봉(蠶頭峯, 蠶齡·加乙頭·龍頭峯과 동일 장소), 제천정(濟川亭, 혹은 漢江樓), 두모포(豆毛浦), 독서당(讀書堂), 화양정(華陽亭) 등이 그 예다. 한강 유람의 동선은 매번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제천정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뱃놀이를 즐기며 노량진(鷺梁津)을 거쳐 양화진(楊花津)까지 내려가 잠두봉에 오르거나 망원정에 갔다. 사신들은 그 과정에서 조선 관리들과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을 주고받았다.

시문을 주고받는 행위인 창화(唱和)는 명 사신과 조선 관리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흐름은 『황화집(皇華集)』의 출판으로도 이어졌다. 조선과 명의 관리들은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동문(同文) 의식 즉, 한문과 유교문화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 조정은 사신과 조선 관리들 간의 창화를 염두에 두고 이를 미리 준비하였으며, 이러한 행위는 공식적인 일정에서 정치적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림 1. 명 사신이 방문한 나루터와 명승지 (출처: 스마트서울맵)

명에서 청으로 중원의 주인이 교체되었다. 청은 조선 조정이 대명의례를 준용하여 청 사신을 접대하길 원했다. 조선에 방문한 청 사신이 경험한 의례는 대명의례와 비교했을 때, 절차는 유사했지만 장소의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도성 내 궁궐 운영 양상에 변화가 생기면서 공식적인 사신의례의 장소가 경복궁에서 동궐(창덕궁·창경궁)과 서궐(경희궁)로 이동한 것이다. 즉, 사신의례의 주최자가 국왕이었던 만큼 시어소는 사신의 행차 동선에 영향을 주었다.

청의 요구는 비공식 일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명의 문인 출신 사신들이 성균관과 강변 명승지를 방문하면서 조선의 관리들과 시문을 주고받았다면, 청 사신들은 전란의 기억을 회고함으로써 조선 사행이라는 행위를 강조하였다. 그 시작은 임진왜란 이후 명 사신에 의해 건립된 관왕묘(關王廟)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관왕묘는 촉한의 장수였던 관우를 모시는 사당으로서 한양 안에는 동관왕묘와 남관왕묘가 있었다. 명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관우 신앙이 국가적으로 확립되었던 만큼 조선의 관왕묘는 임진왜란 당시 명 군대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들의 신앙을 지속하고자 건립한 곳이었다. 처음부터 명에 의해 만들어졌던 탓에 전쟁이 끝나고 명군이 철수한 뒤에는 명 사신의 방문을 대비하여 최소한의 관리 정도만 이루어졌다. 조선 조정의 관심 밖에 있던 관왕묘는 명청교체 이후 청 사신을 통해 다시 주목받았다. 조청관계 수립 초기에 청 사신들은 동·남관왕묘를 자주 방문했을 뿐만 아니라 관왕묘를 제작하고 남은 기와를 삼전도비 건립에 사용했던 점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청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청은 만력 연간부터 명 문화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관우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한족 통치에 이용하고 있었다. 청 태조는 자신이 명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관우의 신령이 보우한 결과로 선전하기도 했다. 따라서 청의 입장에서는 동·남관왕묘가 명의 요구로 세워졌다는 사실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국이 명에게 승리를 거두는 데 영향을 준 대상을 숭배하는 장소가 조선에 존재한다는 점은 사신들이 그곳을 방문해야 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 사신의 관왕묘 방문은 조청관계 수립 초반까지만 확인된다. 조선에 파견된 청 사신에게 사행 임무만큼이나 중요한 일정은 병자호란 이후 제작된 삼전도비에 행차하는 것이었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나루터로 조선시대 한강진, 양화진, 노량진과 더불어 4대 도선장 중 하나였다. 한성부와 광주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이어주는 교통 및 군사 요충지이자 국왕이 헌릉(獻陵)과 영릉(英陵)에 제사를 지내고 환궁하는 과정에서 술자리를 베풀던 명승지였다. 사신들은 17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삼전도비에 방문했다. 조선 조정은 이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삼전도비와 인접한 곳에 남한산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은 한양의 주요 방어 산성으로서 인조가 청 군대를 피해 들어간 피난지였다. 인조가 숭덕제에게 항복하면서 청과 체결한 정축조약(丁丑約條)에는 조선에서 산성을 신축하고 개축하는 일을 제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나, 조선은 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꾸준히 남한산성을 개축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러한 정황을 청 사신에게 들킬까봐 사신들이 삼전도비에 방문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삼전도비 행차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청 사신들은 아침 일찍 남별궁에서 출발하여 흥인지문을 통해 교외로 나가서 신천(新川, 잠실 북쪽에 흐르던 강)이라는 나루터를 지나 삼전도에 도착하여 비각으로 이동했다. 이후 삼전도에서 남별궁으로 바로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삼전도비와 인접한 남한산성이나 관왕묘를 추가로 방문하기도 했다. 명 사신의 방문지와 비교했을 때 외교공간의 범위가 한강 명승지에서 한양 밖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림 2. 과거 신천과 삼전도 위치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역사지리정보 DB)
그림 3. 현재 신천과 삼전도 위치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역사지리정보 DB)
그림 4. 청 사신의 유람 장소 (출처: 스마트서울맵)

17세기 말부터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에 돌입함에 따라 삼전도 방문의 취지에는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청 황제가 사행으로 인하여 조선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행을 조정함으로써 청 사신은 삼전도 방문을 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들의 한양 체류 기간 및 방문 횟수도 줄어들었다. 더불어 17세기 후반부터는 문학적 소양을 지닌 한림원 출신 인사들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양국 관계가 유연해지던 17세기 말부터 시문을 주고받는 행위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쌍방의 문인교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경종대부터 영조대까지 문인 출신 청 사신들이 조선에 방문하여 조선 조정에 문학적 교류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조선은 청 사신들의 요청에 부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그들에게 호응해주지 않았다. 조명관계에서 나타나던 시문교류는 18세기 말부터 확인되며, 19세기에 이르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인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비공식 사행 장소가 소멸하는 대신에 조·청 사신 간에 쌍방적인 시문 교류가 이루어짐으로써 점차 동문의식이 부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상으로 논문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마친다. 본 논문은 장소인문학이라는 측면에서 명·청 사신외교를 검토하고자 했다. 위와 같은 연구를 통해 지금껏 서울 연구가 주목하지 않았던 한양이 가진 외교무대로서의 공간적 성격을 재검토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시어소 운영 양상에 따라 사신의례가 이루어지는 장소에도 변화가 생겼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 본 논문에서는 『사조선록(使朝鮮錄)』에 수록된 명·청 사신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한양에서의 외교 양상을 살펴보았지만, 조선에는 『사조선록』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신들이 왔다. 즉, 논문에서 다룬 사신의 방문과 실제지수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에 파견된 모든 명·청 사신들의 행적을 검토하는 데 미흡하였으나, 이 점은 향후 연구에서 고민하고 해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