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물 열전⑥] 격동의 시대, 고려 문인 이승휴는 어떻게 살았는가?_김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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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1월(통권 23호)

[고려 인물 열전] 

 

격동의 시대, 고려 문인 이승휴는 어떻게 살았는가?

 

김민우(중세1분과)

*지난 연재 보기

 

“이 해(고종 41년, 1254)에 몽골군에 포로가 된 남녀는 무려 206,800여 명이었고, 살육당한 사람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몽골군이 지나갔던 주군(州郡)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골의 침략이 시작된 뒤로 참화가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 『고려사』 권24, 세가24, 고종 41년 12월.

명주(溟州)의 향리였던 김천(金遷)의 어머니와 동생도 이 시점에 몽골군의 포로로 잡혀갔다. 당시 15살이었던 김천은 밤낮으로 울다가 포로들이 끌려가는 도중에 거의 죽었다는 말을 듣자 상복을 입고 상을 마쳤다고 한다. 14년이 지난 어느 날, 김천은 우연히 어머니의 글을 입수하게 된다. 거기에는 자신이 어느 주의 어떤 마을 어떤 집으로 들어가 종이 되었는데 항상 굶주리며 추위와 고된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천은 수년 동안 어머니를 찾아다녔다. 이윽고 원(元)의 북주 천로채 근처를 지나다 한 군졸의 집에 도착하였다. 어떤 할머니가 나와 절하면서 마중하였다.

다 떨어진 옷에 흐트러진 머리카락, 때가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고려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사정을 듣자마자 김천은 엎드려 절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추레한 외모의 노파가 바로 그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서로 하염없이 통곡하는 가운데 어머니가 김천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네가 참말로 내 아들이냐? 얘야, 나는 네가 죽은 줄만 알았다.” (『고려사』 권121, 열전34, 효우, 김천)

위 일화는 고종 말부터 충렬왕대 사이에 벌어진 사건으로, 몽골과의 전쟁으로 인해 해체된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재결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천처럼 재회의 기쁨을 맛보는 사람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수십 년간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으로 김천 가족보다 더 심한 고통을 받은 사람은 셀 수 없었다. 이후 무신 정권의 몰락과 대몽 강화를 통해 평화가 찾아왔지만, 원의 공출 요구로 인한 시련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그렇지만 대몽 강화 이후 성립된 원-고려 관계는, 당시를 살아갔던 고려인에게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단적으로 고려인이 원나라 경내를 평화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면서 김천은 가족과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누군가는 복고된 왕정에 기대어 관료로서 출세하여 구폐(舊弊)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려고 했을 것이며, 누군가는 원에 기대어 일신의 영화를 추구하였을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100년에 걸친 전란 끝에 얻은 평화 속에서 삶의 안녕만을 간절히 기원했을지도 모른다.

대몽 전쟁과 강화, 무신 정권의 몰락과 왕정 복고, 새로운 원-고려 관계 성립 등이 벌어진 13세기는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글에서는 이 시기를 관통하며 살아간 이승휴(李承休)의 일생을 간략히 돌아보고자 한다. 이로써 시대에 대응하는 한 고려 지식인의 모습과 함께 13세기 고려사회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불우한 유년과 과거급제

이승휴는 고종 11년(1224)에 태어났고, 본관은 고려 경산부 가리현(지금의 경북 성주)이다.주1) 그의 선대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고 부모의 이름도 알 수 없다. 『고려사』에는 그가 14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는 내용만 전한다. 그렇지만 자전적 서술인 「병과시(病課詩)」 서문에 그의 일생이 소개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이승휴는 9살에 독서를 시작하여 12살에 희종의 셋째 아들인 원정국사의 거처로 들어가서 그곳에 초빙된 유학자 신서(申諝)에게 『좌전』과 『주역』을 배웠다. 14살에 부친상을 당하자 태복경 임천부의 부인이자 종조모(從祖母)인 북창군부인 원씨가 그를 맡아 길렀다고 한다.

이를 통해 그의 선대와 유년 시절을 유추해보자. 그는 어린 나이에 독서를 시작할 여력이 있는 가문 출신이었고 이후로도 국사의 처소에 들어가 수학할 수 있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관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승휴가 5품 이상 관료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음서를 받지 못하였고 그의 아버지의 이름조차 남지 않았던 것을 볼 때 아버지는 5품 이하의 하급 관직을 역임했을 것이다.

또한 가리현 출신의 이승휴의 아버지는 어떠한 계기로 삼척에서 살았던 어머니와 결혼하였을 것이며, 당대 성행한 처가 거주 관행에 따른다면 결혼 초기에는 삼척에서 거주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아버지가 관료가 되는 것을 계기로 가족 전체가 상경하였을 것이다. 만약 이승휴의 할아버지가 관료였다면 아버지가 수도가 아닌 삼척에서 아내를 맞았다는 것이 이상하고, 어머니가 관료 가문 출신이어서 외가가 수도에 있었다면 부친상 이후 삼척으로 가는 것도 설명하기 어렵다. 이후 9살이 되는 고종 19년(1232)에 고려 조정이 강화로 천도하였으므로 이승휴의 가족 역시 개경에서 강화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이승휴의 아버지가 하급 관료여서 수도의 생활 기반이 견고하지는 못했던 데다가 이윽고 돌아가시자, 그의 어머니는 본향인 삼척으로 가고, 이승휴는 당시 수도에 거주 중이었던 종조모 북창군부인 원씨에게 맡겨졌다. 그가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수도에서 수학하며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친척 할머니 댁에서 자란 이승휴는 강화도에서 재건된 사학 12도 중의 하나인 낙성재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시와 문장을 짓는데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으나, 빼어난 누각과 정자를 전전하며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지냈다. 그러다 문득 심하게 취해 눈물을 흘리며 길가를 걸은 적이 있었는데, 이를 본 교도(敎導) 홍렬(洪烈)이 그를 이백(李白)에 빗대어 놀리는 시를 지었고 이것이 도성 내에 퍼져 그는 ‘술주정뱅이(酒狂)’란 별명을 얻었다. 10대 중반에 겪은 아버지의 죽음, 계속된 몽골의 침략, 최씨 집정자의 연이은 교체와 같은 뒤숭숭한 정세가 이승휴의 방랑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그가 질풍노도의 시기에 ‘술주정뱅이’라는 악명을 얻었더라도 애초에 홍렬이 빗댄 인물이 이백인 만큼, 이승휴의 훌륭한 문재(文才)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이승휴는 당대 고려를 대표하는 문장가라고 평가되었던 최자(崔滋)의 관심을 얻게 되었다. 이윽고 고종 39년(1252) 29세의 다소 늦은 나이에 최자가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하게 된다. 어머니와 떨어져 오랜 기간 강화도에서 유학했던 고생과 쓸쓸함을 과거 급제라는 기쁨으로 흔쾌히 씻고자 해서인지, 이승휴는 즉시 어머니가 살고 계신 삼척으로 향했다. 이것이 기나긴 고난의 시작이었다.

조선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北塞宣恩圖』의 일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https://www.emuseum.go.kr/)

 

잠깐의 영광과 기나긴 좌절

과거 급제의 영광은 찰나였다. 이듬해인 고종 40년(1253), 몽골이 침입하고 물러나지 않자 길이 끊겨서 강화도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고려사』의 기록처럼, 이 해의 몽골 침략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대적이었고 그 참화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비록 삼척까지 몽골군이 쳐들어오지는 않았다고 추정되지만, 침략 예방의 일환으로 고려 정부에 의해 시행된 정책에 따라 그는 노전산성(蓼田山城)에 들어가 머물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이승휴의 저술에는 몽골군이나 원 제국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 시기 저술된 작품에서만 유독 ‘오랑캐 병사(胡兵)’나 ‘오랑캐의 침입(胡寇)’이라는 단어가 발견된다. 이것이 당시 몽골군에 대한 이승휴의 부정적인 인식이 반영된 것이라면 무리한 추정일까?

또한 이승휴는 “동번(東蕃)이 역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가산을 탕진하면서” 본래부터도 얼마 없었던 경제적 기반도 대다수 상실하였다. (『동안거사집』 권1, 행록, 「병과시」) 이때 ‘역적’이 몽골군인지, 쌍성총관부 세력인지, 고려 정부에 대항한 반민(反民)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몽골 침략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그의 처지가 점차 곤궁한 곳으로 몰렸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그는 “두타산 기슭 구동 용계에 띠집을 짓고 살면서 직접 밭을 갈며 어머니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동안거사집』 권1, 행록, 「병과시」)

이어서 원종 원년(1260)에는 그의 좌주였던 최자가 사망하였고, 종조모 원씨 또한 이즈음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려에는 관직의 숫자는 제한되어 있는데 예비 관료군이 폭증하여 과거에 급제하여도 바로 관직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온갖 청탁과 뇌물이 만연했으며, 관직 진출에 인사권에 접근할 수 있는 인맥을 가졌는가 여부가 매우 중요하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손꼽히며 높은 관직에 있었던 최자를 좌주로 둔 이승휴는 본래 이러한 걱정이 덜하였을 것이나, 이제 그 든든한 버팀목 하나가 사라지게 된 셈이다. 풍요롭지는 않았으나 수도 생활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종조모의 죽음 역시 그의 상경을 방해하는 현실적 요인이 되었다.

이윽고 몽골과의 긴 전쟁이 멈추고 원종이 즉위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려움은 나아진 점이 없었다. 오히려 원종 4년(1263)에는 집안에 전염병까지 돌았다. “종들 중에서 간혹 죽는 자도 있었고, 죽지 않은 이들도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여 심부름꾼이 하나도 없었다.” (『동안거사집』 권1, 행록, 「병과시」) 어머니까지 병으로 쓰러지면서 위독해지자 그는 홀로 어머니를 돌보았다. 모두 그가 과거에 급제하고 삼척으로 돌아온 지 장장 11년에 걸쳐 벌어진 일이다.

연이은 불행을 거치면서 이승휴는 세상을 비관하며 염세적인 태도로 일관하기보다 관료로 출세하여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안한 내면을 술로 잊으며 온 도성을 돌아다니던 10대의 이승휴는 이제 없었다. 어머니를 간호하는 와중에 틈틈이 지었다는 「병과시」에는 그러한 의지가 물씬 베어 나온다.

“봉황은 덕이 비록 쇠미해져도 참새와 같이하지 않으며, 기린은 비록 때가 아니더라도 우리 속의 원숭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 세상을 요순 시대로 만들 것이고, 임금을 요순에 이르게 할 것이다.” – 『동안거사집』 권1, 행록, 「병과시」.

이러한 그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일까. 전염병이 잦아든 겨울, 병부시랑 이심(李深)이 안집사(安集使)로서 관동(지금의 강원도 영동 지방)에 왔고 이승휴를 만나며 상경을 권하였다. 드디어 그는 모든 현실적 어려움을 뒤로 하고 상경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강직한 관료 생활과 원(元) 제국과의 조우

이듬해인 원종 5년(1264) 1월, 이승휴는 최자와 함께 동지공거로서 그를 선발한 황보기(皇甫琦)의 추천으로 동문원 수제가 되었다. 그렇지만 황보기의 권유를 받아 다시 구관시를 지어 재상과 여러 학사에게 보냈다. 이윽고 그해 7월 이장용(李藏用), 유경(柳璥) 등의 천거와 유천우(兪千遇)의 주선에 힘입어 경흥부서기에 임용되었다. 이들은 무신 정권기 문신 관료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로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승휴 역시 몽골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유용한 대외 정책이라는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이승휴는 어렵게 관직을 얻었으나 미관 말직이어서 그의 포부를 펴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맡은 소임에 충실하였고, 원종 11년(1270) 삼별초가 봉기하자 강화도를 탈출하여 원종에게 난을 진압할 방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후 원종 13년(1272)에는 조정의 관직 임명 방식을 둘러싸고 하급 관료 사이에 불만이 퍼졌고 이에 항의 상소를 올려보자는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승휴는 이에 반대하였지만 도리어 상소문의 초안을 작성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곧 원종의 조치로 여러 문서를 대조하면서 이것이 억울한 누명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주도자로 지목했던 정부의 문서는 국왕의 판단 근거가 되는 공식문서이므로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짓지 않은 죄를 인정하였다.

그의 삼별초 진압 방책은 시행되지 않았고 그는 누명을 무릅쓰고 사직까지 하였으나 이 두 사건은 국왕인 원종에게 큰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이듬해인 원종 14년(1273), 원에 보낼 사신단을 정할 때 원종은 “다만 재주로써 <사신단에> 추천하면 되지, 관직이 있고 없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라고 하며 직접 그를 서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동안거사집』 권4, 행록, 「빈왕록」) 이승휴가 늙었다고 사양하자 “경오년(1270)에 그대의 이름을 적었던 벼룻집이 아직도 <나의> 책상 위에 있으니 그대는 힘써 거행하라”고 하면서 임명을 강행하였다. (『고려사』 권106, 열전19, 이승휴)

긴 사행 끝에 이승휴는 원의 대도(大都)에 도착하였다. 그때의 문화적 충격은 「빈왕록」에 화려한 문장으로 남겨져 있다. 특히 그가 묘사에 치중한 것은 장조전(長朝殿)과 호천사(昊天寺)였다. 장조전은 폭 200척, 너비 120척, 높이 120척의 건물로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황제의 즉위, 원단, 외국 사신을 위한 연회가 거행된 곳이었다. 또한 호천사의 9층 목탑에서 내려 본 대도의 풍경은 그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시각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원의 국력을 체험한 뒤 이승휴는 원과의 관계를 새롭게 수립하면서도 고려의 전통을 지키는 방법을 모색하였을 가능성이 높다.주2) 이듬해인 1274년 원종이 승하하자 다시 서장관으로 원에 가서 충실하게 사대의 예를 갖추며 외교 활동을 하는 한편, 후계자인 충렬왕을 통하여 고려의 의관(衣冠)과 전례(典禮)를 황제에게 고하며 그 존속을 보장받는데 일조한 것 역시 그의 고민이 담긴 행동이었다.

이후 귀국하여 대관인 감찰어사와 간관인 우정언에 차례차례 임명되면서 이승휴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포부를 실현해볼 수 있게 되었다. 원과 새롭게 관계를 맺으면서 전쟁이라는 가장 큰 대외적인 위협은 없어졌다. 그러나 무신 정권기 이래로 쌓여온 여러 문제를 개혁하고, 복고된 왕정 속에서 새로운 정치질서를 확립하는 일이 당대의 과제로 남아있었다. 이에 이승휴는 충렬왕이 시정의 득실을 묻자 15가지 현실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이후 그는 양광·충청도(지금의 경기·충청도)를 관할하는 지방관이 되어서 탐관오리 7명의 죄를 따져 물었다. 이 일로 원성이 일어나 동주(지금의 철원) 부사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하는 신료를 감찰하고 군주의 수신을 촉구하는 그의 정치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이승휴는 이러한 정력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충렬왕 6년(1280), 사냥과 유흥을 멈추고, 백성을 돌보며, 부패하고 패악을 저지르는 측근을 내치라는 상소에 이름을 올렸다가 국왕의 뜻을 거역하였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당시 충렬왕은 사적인 기반을 공고히 하고 측근을 통한 정치를 하겠다는 의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휴가 국왕 측근의 비행을 현실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한 행위는 충렬왕에게 용납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겠다고 자신한 지 16년, 그의 관료 생활은 일단 이렇게 끝이 났다.

『동인지문오칠』; 개인 소장(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충렬왕 6년(1280) 이승휴가 파직당할 때 유경은 병든 몸을 친히 이끌고 와서 위로해주었다. 이에 이승휴가 사례한 시가 『동인지문오칠』 권9에 남아있다. 유경은 문신으로서 최씨 무신정권을 타도하는데 참여하였고 재상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과거를 주관하여 좋은 인재를 뽑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원종 5년(1264) 이승휴를 천거하여 그가 관료가 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던 인물이었다.

 

만년의 자기 수양과 『제왕운기』

공자는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기를 드러내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논어』 태백) 이는 유학자가 관직에 진출하여 정치를 할 것인지, 은거하여 자기 수양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지침으로 오랫동안 존중되었다. 입사하기 전 40세의 이승휴도 「병과시」에서 관직에 나아가면 요순을 만드는 신료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은거하여 충성과 신의를 지키겠다고 언급한 바 있었다. 그리고 57세에 그 뜻을 실현하였다. 그는 낙향한 뒤로 삼척에 은거하여 불경을 보고 쓰고, 시를 지으며, 문인 및 승려와 교유하고, 한편으로 자신의 생각을 저술하면서 남은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이후 충선왕이 간절히 불러서 75세의 나이로 잠시 관직을 역임한 적도 있으나 곧바로 사직을 요청하였고, 6개월 만에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로 은퇴하였다.

특히 그가 이 시기에 저술한 『제왕운기』는 단군을 우리 역사의 근원으로 제시했다는 점, 원이 주도하는 천하를 인정하면서도 중국과는 다른 천하인 요동(遼東)을 언급했다는 점, 당시를 재흥의 시기로 보고 충렬왕의 수신을 강조하였다는 점, 부마로서의 충렬왕을 찬양하고 긍정하였다는 점에서 수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승휴가 삼척에 은거한 채 세상을 관조하며 지은 많은 작품 중에서 『제왕운기』는 정치 친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서문에 밝혔듯이 『제왕운기』는 충렬왕이 좋은 정치를 하길 바라며 바친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그가 끝내 이루지 못하였던, 임금을 도와 요순 시대를 만들겠다는 젊은 날의 꿈과 끝내 저버릴 수 없었던 마지막 세속적 욕망도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치사한 지 2년째인 충렬왕 26년(1300) 10월 2일, 이승휴는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로 이임종(李林宗)과 이연종(李衍宗)이 있었고, 그중 이임종은 과거급제까지 하였으나 이승휴의 가문이 번성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제왕운기』는 이후 세대의 학자인 이제현에게 “『제왕운기』의 기록은 근거가 없는 것 같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익재난고』 권9하, 사찬, 덕왕)

그러나 현실로 굳건히 자리 잡은 원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와 정치적 간섭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실존과 위상 제고를 바랐던 이승휴의 고뇌가 『제왕운기』에 담겼으며,주3) 이것이 차후 원 간섭기의 고려 지식인의 대표적인 천하관과 국가관이기도 하였다는 점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주4) 이와 더불어 현실 개혁의 방안으로 군주의 수신과 신료의 보필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고안한 이승휴의 면모가 이후 13-14세기 성리학자들에게 비판적으로 계승·발전되었다는 점 역시 인정되고 있다.주5) 무신 정권기에서 원 간섭기로 이행되는 격변기를 거치며 많은 좌절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생을 충실하게 살아온 한 개인의 삶이, 당대 고려 지식인의 삶을 대표하고 나아가 향후 역사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이승휴가 은거하였던 삼척 천은사의 전경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

 

<미주>

주1) 『고려사』의 ‘이승휴는 자가 휴휴이며 경산부 가리현 사람이다(李承休, 字休休, 京山府嘉利縣人)’라는 기록에서, 가리현이 그의 출생지인지 본관인지 확실하지 않다(장을병, 『이승휴의 삶과 정치활동』, 경인문화사, 2008, 44쪽). 이 글에서는 본관으로 보고자 한다.
주2) 이상 장조전·호천사와 관련된 서술은 김보광, 「『제왕운기』, 새로운 역사인식의 등장」, 『내일을 여는 역사』 69, 2017, 179-180쪽에서 인용.
주3) 채웅석, 「『제왕운기』로 통해 본 이승휴의 국가의식과 유교관료 정치론」, 『국학연구』 21, 2012.
주4) 채웅석, 「원 간섭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 49, 2003.
주5) 김인호, 「이승휴의 역사인식과 현실비판론의 방향」, 『한국사상사학』 9, 1997; 김인호, 「이승휴의 현실 인식 비판론의 방향」, 『인문과학연구논총』 36, 2013.

<참고문헌>

김보광, 「『제왕운기』, 새로운 역사 인식의 등장」, 『내일을 여는 역사』 69, 2017.
김인호, 「이승휴의 역사인식과 현실비판론의 방향」, 『한국사상사학』 9, 1997.
김인호, 「이승휴의 현실 인식 비판론의 방향」, 『인문과학연구논총』 36, 2013.
변동명, 「이승휴의 생애와 저술」, 『진단학보』 99, 2005.
장을병, 『이승휴의 삶과 정치활동』, 경인문화사, 2008.
채웅석, 「원 간섭기 성리학자들의 화이관과 국가관」, 『역사와 현실』 49, 2003.
채웅석, 「『제왕운기』로 통해 본 이승휴의 국가의식과 유교관료 정치론」, 『국학연구』 21,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