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②] 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 재등음작씨담_염복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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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0월(통권 22호)

[경성(京城)을 말한다: 신문 연재물로 본 일제시기의 ‘경성’]

 

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 재등음작씨담

<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 재등음작씨담(일)~(팔)>, <<동아일보>> 1921.9.7.~15.

 

염복규(서울시립대학교)

*지난 연재 보기

 

그림 1. <都市計劃과 工業資源涵養, 齋藤音作氏談>, <<東亞日報>> 1921.9.7.

<<동아일보>> 1921년 9월 7일자에는 <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 재등음작(齋藤音作)씨담>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아마 단신성 보도를 제외하면 ‘경성 도시계획’ 문제를 소재로 표방한 거의 최초의 기사가 아닐까 한다. 기사는 아래와 같이 시작한다.

경성시는 조선에서 各般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또 장래 대륙발전의 대책원지가 되지 아니치 못할지로다. 우리는 금일의 경성시를 撫育하여 이를 대경성을 作치 아니치 못할지라. 경성은 확실히 大都가 될 大惠를 소유하엿도다. 경성은 조선의 정치 및 기타 제반의 중심지이라. 이는 현재 뿐 아니라 장래에도 亦然하다 믿노라. 그 뿐 아니라 한강의 대하를 抱하고 인천의 양항을 인접하엿도다. 금일의 한강은 야수성이 富하도다. 그러나 이를 훈련하여 온유한 朝鮮牛와 같이 할 일은 곤란한 일이 아니라.

기사는 이어서 경성은 “기후 풍토에 비교적 中和를 득”했으며 “근교에는 장래의 삼림공원이 될 光陵 삼림 및 峨峨한 북한산이 있고 다시 국가적 대공원이 될만한 금강산의 절경지를 控하고 또 원산의 해안의 피서지가 있”다고 하며 “그러나 경성은 이것 뿐으로는 대경성이 되기는 불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여하히 賢良한 도시계획을 세우더라도 금일에 공업의 자원을 함양 준비치 아니하면 도저히 대공업이 불흥”할 것이며, “따라서 대상업지가 되지도 못하고 필경은 대도시계획은 畵中之餠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공업자원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기사의 마지막 부분을 보자.

금일 속히 함양을 준비하여야 할지니 대공업의 자원이라 함은 무엇이오 하면 왈 염가로써 풍부한 수력전기의 공급을 계획할 일이 그 하나요 염가로써 풍부한 공업원료의 대공급을 계획할 일이 그 둘이라. 자본이던지 노동이던지 장차 또 기술자, 경영자와 같음은 별도로 염려가 없을지라. 그러한 즉 이를 속히 계획하여 지금에 속히 촉진을 기하지 아니치 못할 일은 수력 및 원료의 대공급이라.

동력으로서 수력발전과 원료의 공급을 말하고 있다. 사실 뻔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말미의 ‘未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는 이튿날로 이어진다. 두번째 기사(<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이)>, <<동아일보>>, 1921.9.8.)부터는 수력발전과 공업원료 공급의 구체적 방법론이 나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앞의 기사 첫머리의 “금일의 한강은 야수성이 富하도다. 그러나 이를 훈련하여 온유한 朝鮮牛와 같이 할 일”이라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한강의 순치는 곧 한강의 치수이라. 한강의 치수는 대경성의 치안을 위해서도 필요하니 즉 용산 둑도 방면을 안전지대로 만드는 데에도 필요하도다. 또 각종의 공업에 향하여 항상 淸澄한 용수를 공급함에도 필요하고 또 상수도를 개선하여 하수도를 완성하기 위함에도 필요하도다. 기타 교통 운수의 편리를 진전케 함에도 각종의 담수 어족을 번식케 함에도 또 遊泳 舟遊의 위락을 함에도 필요한 일이라. 한강의 치수는 대경성을 건설함에 불가결한 중대문제라 이를지로다.

수력발전을 일으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한강의 치수이다. 한편 한강의 치수는 비단 동력 공급 뿐 아니라 공업용수, 상하수도, 교통, 레저 등 다방면에서 “대경성을 건설함에 불가결한 중대문제”이다. 그리고 치수를 위해서는 치산이 필요하다. “화전의 남설을 취체하고 삼림의 남벌과 稚樹의 濫刈를 제한하며” “하루라도 속히 한강유역의 치산사업을 촉진”하는 것은 “대도시의 건설”의 “深慮遠計”라는 것이 두번째 기사의 결론이다. 도시계획에서 출발했지만 이 연재물에서 하려는 궁극적인 이야기는 ‘치산’이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이하 “장래 경성으로써 대공업도시가 되기에 족할 공업원료는 무엇이오 하면 우리는 임산물이라 믿노라”로 시작하는 세번째 기사(<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삼)>, <<동아일보>>, 1921.9.9.), “장래 경성시에 발흥되리라 생각하는 목재공업은 대체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네번째 기사(<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사)>, <<동아일보>>, 1921.9.10.)부터 9월 14일 일곱번째 기사까지는 일본과 기타 외국의 다양한 목재 공업, 임산물 가공 공업에 대한 소개이다. 그리고 연재 마지막 기사에 오면 비로소 경성 도시계획에 대한 논설로 돌아온다. 이것을 보기에 앞서 먼저 연재물의 필자를 알아보자.

‘재등음작씨담’의 ‘재등음작’, 즉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는 1866년 일본 니가타현 출신으로 1890년 도쿄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농상무성 산림관리가 된 인물이다. 청일전쟁기 잠시 육군 장교로 복무한 후 총독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부름을 받아 1896년 타이완총독부에 부임했다. 같은 해 11월 일본인으로서 처음으로 대만 최고봉인 옥산(玉山; 3,952m) 등정에 성공하기도 한 그는 1898년 말라리아에 걸려 본토로 귀환, 이시카와현, 야마니시현 임업과장, 홋카이도청 임정과장 등을 지냈다.

사이토가 조선으로 건너온 것은 1909년 말이다. 대한제국 정부 초빙을 받아 농상공부 기사로 부임한 것이다. 이 무렵 대한제국 정부에 부임한 많은 일본인 관리들처럼 그도 병합후 조선에 남아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산림과장, 영림창장 등을 지냈다. 초창기 조선에서 산림정책을 주관하는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식민지 산림정책의 근간이 된 <삼림령>(1911) 입안을 주도했으며, 조선 임적(林籍) 조사를 지휘했다.

사이토는 조선에 부임하자마자 식목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1910년 순종의 선농단 친경(親耕) 행사때 ‘친수’(親樹)도 같이 기획했다고 한다. 이어서 1911년부터는 아예 매년 ‘나무 심는 날’을 제정하는데 애썼는데, 식수에 적당하면서도 ‘의미 있는’ 날로서 일본 열도의 첫번째 천황이라는 진무천황(神武天皇)의 기일에 날짜를 맞추었다. 이 날이 4월 3일로서 오늘날 식목일의 기원에 해당한다.

사이토는 산림관리이면서 산림학자였으며, 이런 모든 면을 합친 열성적인 ‘임업가’였다. 관리 시절부터 산림과 임업의 가치와 중요성을 논한 많은 글을 썼다. 1918년 관계를 떠나서도 조선에 남아 활동을 이어갔다. 농지 개간, 수리사업 관련 회사인 황해사(黃海社)의 임업부 고문으로 산림 개발업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전문성 있는 전직 고관으로서 지위를 기반으로 본토 산림자본을 조선에 유치하고자 노력했다. 1931년에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이토임업사무소를 설립했다.

그림 2. 사이토가 자신의 임업사무소를 설립할 무렵 발간한 소책자 <<朝鮮林業投資の有望>>(1930)의 표지

이런 이력에 비추어보면 사이토가 치산의 중요성을 설파한 글을 기고한 점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 남는 의문은 이것을 왜 도시계획과 연결시켰을까 하는 점이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사이토가 이 무렵 창립한 경성도시계획연구회에도 관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경성도시계획연구회는 1921년 8월 27일 “관민일치에 의해 건전한 도시계획을 촉진할” 목적으로 창립했다. 조선에서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을 내건 최초의 단체이다. 그러나 구성원의 면면을 보면 이름처럼 도시계획 ‘연구’ 단체라기보다 ‘경성 도시계획’이라는 개발 이슈를 매개로 한 경제계의 로비 단체이며 현직 관리들이 깊이 참여하고 있는 전형적인 관변 단체였다.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박영효, 송병준, 총독부 국장 전원을 고문과 상담역으로 추대하고 경성부윤이 부회장을 맡은 점 등이 이런 면을 잘 보여준다. 평의원 60명의 면면을 보면 유수의 재경성 실업가를 망라했다. 일본인, 조선인 비율은 약 3:1 정도이다.

도시계획 연구의 실제를 맡을 조사부는 그 아래에 구역, 교통, 상하수, 보안, 경제, 교육, 공원, 사회시설, 제도, 건축, 주택, 재원 등 12개 부를 두었는데, 부장으로 확인되는 인물도 재경성 일본인 원로 실업가 야마구치 타베에(山口太兵衛; 주택), 후일의 조선상공회의소 회두 카다 나오치(賀田直治; 경제), 조선식산은행 두취 아리가 미쓰도요(有賀光豊; [도시계획]구역) 등이다. 도시계획 전문성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제계의 실력자인 셈이다.

여기에 사이토는 공원부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 또한 전직 고관이자 1921년 당시에는 민간 경제인으로서 의례적으로 참여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도시 환경 정비의 필수요소로서 도시 공원의 중요성을 논한 글(<도시의 발전과 공원(상)(하)>, <<매일신보>> 1922.8.1., 2.)을 쓰는 등 경성도시계획연구회의 다른 구성원과 달리 일정한 전문성을 보인 면이 있다. 경성도시계획연구회가 창립한지 20여일이 지나 쓴 <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은 이런 활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된 관심사인 산림 녹화와 임업 개발을 도시 공원과 연결시켰다.

그러면 다시 연재물로 돌아가 마지막 여덟번째 기사(<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팔), 재등음작씨담>, <<동아일보>> 1921.9.15.)를 보자. “도시계획을 실행함에는 거액의 경비를 요하나니 그래서 그 경비의 대부분은 이를 市債에 의하는 방침을 취치 아니하면 적극적 사업은 부득”하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무렵 경성 도시계획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따라다닌 비판은 예산 계획이 없는 이상 어떤 웅장한 구상이라도 그것은 공론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사이토도 이 점을 먼저 언급한다. 그리고 “금일과 같이 불안한 재계에 그 募債가 허할지”에 의문을 표한다. 경성 도시계획 논의가 처음 제기된 1920년대 초는 전후 공황의 경제난이 심각한 때였다. 그가 제시하는 재정적 대안은 국유임야의 매각 경영이다.

가령 모채가 불허한다 하면 여하히 하면 가할가? 이는 제2의 좋은 재원이 있도다. 즉 장래 존치할 필요가 없는 국유임야를 매각할 일이라. 재정 빈약한 국가가 무의미로 과대한 임야를 소유하야 언제까지던지 姑息의 관리를 함보다 그 중 민간에 옮겨도 무방한 것은 적당히 이를 연도할로 매각함에 가하다 생각하노라. 日鮮의 귀족 부호 중에는 그 세습재산으로 하야 매수 경영의 희망자가 적지 않은 모양이라. 그러한 즉 그 산은 귀족부호가 투자하야 善히 이를 整治할 것이라. 정부는 그 돈의 일부로써 잔여한 국유임야에 합리적 경영을 가하고 또 殘部로써 민유임야의 치산에 대하야 周到 또 현명한 보조 장려를 행하면 적극적 치산사업은 전조선에 보급될지로다.

1918년 이후 사이토는 민간 임업회사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직접적으로 산림 개발에 뛰어들기도 했으며, 투자처를 찾는 자본(주로 본토의)을 조선의 산림 개발로 유치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그는 철저하게 임업가로서 신념인 산림 녹화와 자본가로서 이윤 추구 활동을 결합시켜 나갔다. 이 연재물도 이 같은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산업조사회는 近近 개최될 터인 바 조선의 치산사업은 조선 산업 개발상 중대한 긴급문제이라. 이 기회에 시민 유지가 일치하야 立하면 적극적 치산사업의 개시는 단지 경성시민을 위할 뿐 아니오 평양, 대구, 부산 기타 각 도시 거주자를 위함이 아니라 전조선 1천7백만 민중을 위함이라. 조선의 중심 도시에 거주하는 吾人은 이 기회에 노쇠한 조선을 還少케 하야 1천7백만 민중의 대행복을 가져오기 위하야 협력일치하야 목적의 달성에 노력치 아니치 못할지라. 이 같이 하야 비로소 경성의 도시계획은 유의의하게 될지라. 적극적 도시계획의 실시도 안심하야 단행키 得하기에 이를지라. (終)

1921년 조선총독부는 전후 공황 타개책의 일환으로 본토 자본과 기술을 끌어들이기 위해 산업조사위원회 개최를 계획했다. 이에 대해 조선인 부르조아 세력은 조선인 산업대회를 조직하여 대응하고자 했다. 조선인 산업대회는 처음 과거 계몽운동 세력이 중심이 된 자치파 단체인 유민회(維民會)가 주도했으나, 곧 동아일보 측에 주도권을 빼앗겼다고 한다. 조선인 산업대회는 산업조사위원회 개최에 맞추어 조선인 산업 보호를 요청하는 건의안을 제출했다. 이런 활동의 중심에 동아일보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연재물 마지막 기사의 마지막 단락이 “산업조사회는 近近 개최될 터”라는 말로 시작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이 연재물은 동아일보에만 게재된 것이 아니다. <<매일신보>> 1921.9.7.~14.에 8회 연재된 <도시계획의 근본책, 공업자원을 함양함이 필요>는 사실상 같은 기사이다. 사이토는 이미 1921년 초 산업조사위원회 개최 결정에 즈음하여 “산업의 대방침을 결정하려할 때, 우선적으로 다수 산업의 근저에 큰 관계가 있는 치산 방책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작성한 바도 있었다. (<産業調査會に就て>, <<경성일보>> 1921.1.28.)

그림 3. 동아일보와 동일한 내용의 매일신보 연재기사

동아일보가 연재물 마지막 기사를 게재한 9월 15일은 산업조사위원회가 개막하는 날이었다. 이 날에 맞추어 사이토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 동시에 적극적 치산 사업을 통해 경성 도시계획은 의의를 가지게 되며 (재정 투입이 큰) 적극적 도시계획을 안심하고 실시할 수 있을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노쇠한 조선을 還少케 하”는 길임을 역설하는 연재물을 게재한 것이다.

그림  4. <都市計劃과 工業資源涵養(八), 齋藤音作氏談>, <<東亞日報>> 1921.9.15. (이 기사 바로 옆에 산업조사회 개최를 알리는 공고가 보인다.)

1936년 사망한 사이토 오토사쿠는 망우지 묘지에 묻혔다. 현재 망우리공원에는 그의 묘비가 남아있다. ‘재등음작지묘(齋藤音作之墓)’ 글자 위에 십자가 표식만 들어간 단순한 비석이다. 당시 인명록은 사이토를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일본기독교회의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무교회주의자로 잘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도 깊은 교우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우치무라는 1925년 일기에 사이토가 알려준 치산 사업 실적을 듣고 매우 기뻤다고 쓰기도 했다. 임업가로서 사이토의 열정적인 활동의 밑바탕에는 기독교적 소명의식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림 5. 현재 망우리공원의 ‘齋藤音作之墓’

하지만 사이토의 눈에 비친 조선은 늘 (말하자면 자신과 같은) ‘선각자’의 계몽이 필요한 노쇠한 나라였다. 그는 조선의 산림 녹화를 염원한 임업가였지만, 민족차별적 시선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식민지 관리였고, 식민지 개발로 부를 추구한 자본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연재물이 보여주듯이 사이토의 활동은 조선인 사회와 단절되어 일방향적으로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문화통치가 막 시작되는 시점, 그리고 전후 공황의 경제난 극복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시점, 식민지권력과 조선인 부르조아 세력의 다르면서 같기도 한 ‘개발주의’가 이 무렵 조선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수도 경성의) ‘도시계획’이라는 기표를 매개로 교차하고 있는 지점에 이 연재물 <도시계획과 공업자원함양, 재등음작씨담>은 놓여 있었다.

 

 

참고문헌

고태우, <개발과 이윤 추구에 갇힌 산림보호 – 식민지 임업가 사이토 오토사쿠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03, 2017
김영식, <한반도에 포플러와 아카시아를 심은 일본인>, <<그와 나 사이를 걷다>>, 호메로스, 2018
염복규, <1920년대 경성도시계획운동의 전개와 성격>, <<국사관논총>> 107, 2005
이태훈, <<일제하 친일정치운동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2010
竹本太郎, <日本帝国における植民地森林官の思想と行動 – 齋藤音作の前半期の足跡から>, <<林業經濟硏究>> 67-1, 2021.
竹本太郎, <朝鮮総督府官僚・斎藤音作の緑化思想>, 일본 임업경제학회 추계학술대회 발표문, 20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