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조선 초기 향교 연구_신동훈

0
382
Print Friendly, PDF & Email

웹진 ‘역사랑’ 2021년 8월(통권 20호)

[나의 학위논문] 

 

조선 초기 향교 연구

(2021. 2.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신동훈(중세2분과)

 

「향교의 시대와 서원의 시대」

2013년 10월, 같은 카테고리인 “나의 논문을 말한다”에 석사학위 논문인 「16세기 서원의 성립과 국가의 서원 정책」을 소개했었습니다(http://www.koreanhistory.org/2169). 그때 저는 서원을 바라보는 이황과 이이의 생각 차이를 주목했습니다. 주지하듯 이황은 서원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사림의 자율적 운영 보장을 요청했었습니다. ‘사액’은 이황의 요청에 대한 국가의 수용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황이 생각한 자율적 운영은 현실적으로 구현되지 못했습니다. 견제와 감시가 없는 자율적 운영 속에서 개인의 욕심이 모여 폐단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개선 방안으로 서원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촉구했습니다. 동주ㆍ산장 등 서원 운영을 책임진 자리에, 국가가 임명한 사람을 앉히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이의 제안은 재정이라는 현실 문제와 다수의 사림들이 내켜하지 않는다는 감정적 문제까지 얽혀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교육 기관으로 출발했습니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 전달 뿐 아니라 그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사회화 교육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사회화 교육을 교화라고 할 수 있다면, 지식 전달 부분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교육 기관이 아닌 교화 기관으로 봐야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또, 조선 사회에서 과거 시험이 갖는 의미를 생각했을 때, 서원의 정치적 입장ㆍ위상 등과 별개로 유생들은 과거 시험 합격을 위해 취학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원의 입장에서도 본원의 유생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면 그것이 곧 본원의 명성을 높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교육 기관에 집중하여 서원을 바라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조선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모습들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향교도 유사할 것입니다. 16세기 중반 등장한 서원이 이후 조선 사회의 유력한 교육 기관이었다면, 향교는 고려 말부터 복구되기 시작해 조선의 흥망성쇠를 함께했기에 더욱더 많은 조선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특히 15세기는 서원이라는 구체화된 私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성의 성균관ㆍ사학(四學)을 제외한다면 관학인 향교와 개인적으로 운영한 서재(書齋)ㆍ가학(家學) (혹은 절에서의 교육) 등이 사실상 교육 기관의 전부라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15세기 조선 사회는 고려 말부터 누적된 외적의 침입을 회복하는 시기였고, 과거 시험이 강조되면서 전국적으로 과거 응시자가 늘어나는 시기였습니다. 국가는 유학 이념을 적극적으로 전파하여 유학을 사회 이데올로기로 세우려 했고, 인민들은 그에 따라 자신들의 삶의 행태를 바꿔나갔습니다.

본고는 이러한 인식에서 독립된 공간으로서의 향교 건립, 교관직의 변천과 운영, 향교 운영상의 문제와 개선 방안, 지방 사회와 향교의 관계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15세기 향교를 통해 조선 사회를 파악해보려 했던 것입니다.

그림 1. 경주 향교 대성전(출처 : 필자 촬영). 조선 초기부터 경주 사람들은 경주 향교가 신라의 국학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유구한 전통과 역사는 당시 경주 사람들의 자부심이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에 대한 도성 및 타 지방 사람들의 인정은 별개이지 않았을까요?

 

「조선 사회의 압축판이자 종합선물세트, 학교」

본문의 첫 장이라 할 수 있는 2장 ‘여말 선초 향교의 설립과 발전’은 고려 말 향교 복구 양상부터 15세기 향교 설치 및 건립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향교 설치는 제도적으로 향교 교육의 시작을, 향교 건립은 독립된 공간 마련을 의미합니다. 결과적으로 향교에서의 교육은 건립보다 빠르게 시작되었고, 교육 공간은 각 군현의 사정에 따라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각 군현마다 제각각인 고려 말부터 누적된 외적의 피해와 복구 정도, 군현의 재정 규모, 수령의 의지, 군현의 사회 분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군현의 재정이 열악하지만 수령과 군현의 인민들이 의기투합하여 향교를 짓기도 하고, 군현의 재정이 풍족하지만 향교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건립 시기가 늦어지는 경우 등이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3장 ‘향교 교관직제의 성립과 변천’은 교수-훈도-교도-학장 등 네 직책이 『경국대전』의 교수-훈도 두 직으로 바뀌는 과정을 추적한 것입니다. 특히 500호 이상 고을에 교도를 파견하며, 교도는 이조의 취재를 통해 선발하기로 한 세종의 조치는, (비록 500호 이상이라는 전제 조건을 두었지만) 사실상 전국의 모든 향교에 정식 관료로서 교관을 설치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경국대전』 이후 교수-훈도는 문과 출신의 교수, 취재를 통한 훈도로 양분화 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교관의 낮은 수준은 취재를 통해 선발된 훈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장은 향교의 교관에 대한 부분이지만, 경관직과 외관직, 문과와 취재, 생원ㆍ진사들의 입사(入仕) 경향, 입사 경로에 따른 유생들의 인식 등 관료제 전반에 관련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관료제 연구는 주로 과거ㆍ음서 및 청요직 관련 관서에 집중되었는데, 좀 더 다양한 관서 및 관료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장 ‘향교의 폐단과 조정의 개선책’은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향교의 폐단들이 나타나게 된 원인, 그에 대한 조정의 인식과 개선책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태종~문종 대는 향교가 건립되고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기 때문에, 안정적인 연착륙을 위해 향교 재정 지원 및 서적 보급 등에 무게중심이 있었습니다. 세조 대 액외 유생의 군역 편제 시행 이후, 예종~성종 대는 세조가 취했던 조치를 수정함과 동시에 그동안 누적된 운영상의 문제를 개선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취해진 액외 유생 군역 부과 철폐는 항식으로 정해지지 않았고, 액외 유생 군역 부과 정지로 시행되었습니다. 철폐가 아닌 정지는 이후 액외 유생 군역 부과와 관련된 문제를 낳게 되었습니다. 교생의 세공생도 차출에 대해 지역 유력자들은 과거 응시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조정에서 파악한 지역 유력자들의 향교 이탈 원인이었습니다. 교생의 세공생도 차출을 철폐하자는 논의가 제기되었지만, 이 규정이 없으면 서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철폐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은 당시 지역 유력자들과 과거 응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대략 조선 건국 100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지역 유력자들의 중앙 진출 ‘니즈’와 국가의 향교 활용 방안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5장 ‘향교를 통한 교화와 향촌 사회의 변화’는 지방 사회에서 향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향교는 교육 기관인 만큼 강학과 제의를 통해 교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교생들이 습득ㆍ체득한 유학적 삶은 그들의 삶의 모습을 바꿨을 것이고, 이는 곧 그들이 속해 있는 사회 곧 지방 사회를 변모시켰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지방 유력자들은 향교 건립에 참여하거나 자제들을 향교에 보내 새로운 사회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려 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국가 권력과 관계를 맺으려 했습니다. 이 장은 유학적 삶이 낯설던 15세기 지방 사회에서 향교가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것이며, 유학 보급을 위한 거점으로 작용한 향교의 역할을 부각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 사회의 특질을 파악하기 위해선 유학을 어떻게 접근할 것이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조선은 유학(혹은 성리학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사회였다는 명제는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유학 사회란 무엇이냐에 대한 답은 하나로 귀결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꼭 하나로 일치된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조선 사회에게 유학이란?’이라는 질문에 답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본 논문은 조선이 유학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첫 단추로서 향교를 주목했습니다. 15세기 향교는 조선이 유학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변화는 느렸지만 거대했고, 어느 일부분이 아닌 구성원 모두 및 사회 전체의 변화를 지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미흡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사회의 변화의 출발점에 향교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림 2. 나주 향교 대성전 (출처 : 필자 직접 촬영). 나주 향교는 임란 이후 불타버린 성균관을 복구하는 데 모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주 향교와 월대의 크기도 차이가 나지만, 지붕의 형태가 다릅니다. 대성전 대신 대웅전으로 되어 있으면, 절의 대웅전이라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 사진으로 전하는 개성 향교는 임란 이후 복원된 것이라고 하는데, 일설에 따르면 예전 형식을 그대로 복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성 향교 곧 고려 성균관 대성전 형태와 현 전하는 서울 성균관 대성전, 그리고 나주 향교 대성전의 형태가 사실상 같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경주 향교 대성전의 형태가 이질적인 것입니다.

 

「갈 곳을 잃어버린 미아(迷兒)가 되지 않기 위해」

향교를 통해 조선 사회를 바라보면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은, ‘향교와 직ㆍ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향교와의 관계가 끝난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초적인 의문인 ‘어떤 사람들이 향교에 취학할까?’, ‘교생들은 향교에서 떠난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에 답을 하려면 과거 응시, 취재, 서리 차출 등 임용 방식과 삼관 분관부터 임용, 승진, 경ㆍ외관의 차이 등 관료제 운영. 교생들의 사회적 지위로부터 연결된 신분제와 그들의 계층과 연결된 경제사. 중앙과 지방을 연결해 줄 교통ㆍ통신. 각 군현이 처한 환경 차이와 자연 개발에 따른 경관의 변모 등. 질문의 질문이 꼬리를 물면서, 논문 작성 시 가졌던 의문의 대해 지금도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차로의 한 복판에 서서, 어느 길로 가야할지 첫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세기 서원으로 시작한 연구는 15세기 향교를 통해, 새로운 출발점이자 전환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다만 본 논문은 15세기 후반까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16세기 초ㆍ중반에 대한 연구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이 시기를 우선적으로 천착해 한발 내딛는다면, 미아(迷兒)가 되지 않고 ‘나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초심과 중심을 잃지 않고 후속 연구를 통해 나의 길을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