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고구려벽화고분(高句麗壁畵古墳)의 묵서(墨書) 연구(硏究)_김근식

0
349
Print Friendly, PDF & Email

웹진 ‘역사랑’ 2021년 8월(통권 20호)

[나의 학위논문] 

 

고구려벽화고분(高句麗壁畵古墳)의

묵서(墨書) 연구(硏究)

(2020. 8.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김근식(고대사분과)

 

1.

대학원을 막 진학했을 당시 필자는 그저 고구려사를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하야시 미나오(林巳奈夫) 중국고대의 신들(中國古代の神がみ)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소위 관심사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 책의 연구 방법처럼 고구려벽화고분을 살펴본다면 굉장히 흥미로울 것이라는 판단 아래, 덕흥리벽화고분의 벽화 중심으로 석사논문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벽화를 역사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일이었고, 이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역사학뿐만 아니라, 고고학·미술사와 같은 인접 학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후 절치부심하며 벽화의 역사화를 꿈꿨으나 여전히 그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 다만 그 실마리를 찾는 과정에서 얻게 된 단서들을 ‘고구려벽화고분의 묵서 연구’라는 박사논문에 정리하고 녹여내 보고자 노력하였다.

 

2.

무덤 제작 시 가장 필수적인 요소는 ‘石工’이나 ‘畵工’ 등으로 불리는 장인들의 존재이다. 당시 고구려의 건축술은 적석총만 보더라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분을 축조할 수 있는 기술자들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고구려에는 권력과 재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크고 웅장한 고분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벽화가 접목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고분의 벽화는 장의미술이었던 만큼, 일반그림과는 그리는 방법에서 차이가 난다. 게다가 애초부터 벽화고분이 주묘제가 아니었던 고구려인들에게 벽화고분은 굉장히 생소한 장법이었음이 틀림없다. 또 4세기 중반 안악3호분(357)에서 처음 확인된 고구려 벽화고분의 묵서도 도저히 고구려의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중국적 요소가 충만하다. 따라서 고구려 초기벽화고분의 제작을 맡았던 장인들은 적석총을 만든 장인들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기술자와 함께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 기술이 고구려로 전이되기까지는 다양한 경로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국 지역의 고분 형식이나 무덤 내 문자문화를 반드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덧붙여 안악3호분이나 덕흥리벽화고분 등 고구려의 초기벽화고분이 탄생한 지역, 즉 낙랑․대방지역의 묘장문화에 대한 이해도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즉 漢代畵像石을 비롯하여, 중국 각지에 퍼져있는 漢魏晉壁畵古墳에서의 문자사용 사례와 낙랑·대방지역의 묘장문화 등을 검토가 필요하다.
그간 고구려 벽화고분의 묵서 연구는 墓誌 분석을 통한 피장자의 국적과 정치적 위상에만 연구가 집중되어왔다. 무덤묘지를 제외한 다른 나머지 묵서들 역시 상당히 연구가 진척된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간단한 정보제공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최근에서야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주목된 몇몇의 傍題조차도 무덤과는 단절된 채 고구려 정치사를 설명하는 자료로만 활용되었다. 이는 그동안 벽화고분의 묵서가 무덤과 관계없이 文字史料로만 소비되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 연구방법은 무덤과 묵서를 분리하여, 무덤 내부에 쓰인 묵서의 본래 기능에 대해서 알 수 없게 만드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무덤과 묵서의 관계 속에서 묵서의 기능을 추적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어째서 무덤 속에 문자를 남겼는지, 해당 문자들을 읽는 대상자는 과연 누구인지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고구려 墓葬文化의 일부를 복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묵서를 해당 무덤의 구조와 함께 바라보면서, 무덤과 묵서의 계통성이나 지역성 등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간 고구려 묵서는 묘장 문화를 탐구하고 복원하는 소재로 쓰인 것이 아니라, 정치사 연구를 위한 자료로만 활용되어왔다. 따라서 벽화고분 내 묵서의 기능과 대상자에 대한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이 논문은 이러한 기존의 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론의 모색과 자료의 확대를 고민하면서 시작되었다. 고구려 벽화고분 연구의 진전을 위해서라도 한 번은 정리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판단하였다.

 

3.

무덤의 축조의뢰자는 죽기 전 본인이거나, 그 후손 내지 가족 친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 무덤 내의 묵서나 문자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일까? 무덤에 묻힌 죽은 묘주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묘주의 가족인가? 그도 아니면 가족을 비롯해 인근에서 장례에 참석했던 사람들인가? 碑石․石刻․銘文塼 등과 마찬가지로 벽화고분의 묵서 역시 누군가에게 정보를 전달한다는 목적은 변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에 남겨진 묵서들의 의미는 훗날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질 것을 대비한 경고 문구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벽화고분은 무덤 안에 상석이나 벽화, 묵서 등으로 喪葬儀禮를 표현하면서 출현한 문화이다. 벽화에 저마다 묵서된 傍題는 모든 벽화와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으며, 일부는 마치 ‘觀覽者’를 염두에 두고 작성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왜냐하면 방제의 역할은 ‘해당 벽화의 내용은 이것이다’라는 점을 명확하기 위해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 벽화고분의 묵서는 무덤이 축조되고 벽화가 그려진 이후 그 벽화를 보는 사람들 즉, ‘觀覽者’의 존재를 의식하고 작성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무덤 완성 후 내부로 들어가 벽화를 구경했을 외부 ‘觀覽者’들을 상정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와 관련하여 漢代畵像石 문화에 나타나는 ‘觀者’의 존재를 주목하였다. 漢代畵像石 祠堂의 명문에서 확인되듯이 畵像石 사당은 ‘觀覽者’를 전제하고 제작되었다. 또 漢代壁畵古墳의 장례문화에서도 ’觀者’의 존재를 명확히 확인하였다. 특히 “보고 싶은 자는 마땅히 신발을 벗고 들어와야 이것을 볼 수 있다”라는 묵서내용을 통해, ‘觀者’가 무덤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와 벽화를 보는 ‘觀覽者’임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중국의 漢代壁畵古墳이 외부 ‘觀覽者’의 존재를 전제하고 만들어진 묘장문화라고 할 때, 고구려 벽화고분은 과연 예외적 존재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면에서 폐쇄적인 관점에서 무덤을 바라봐왔던 현재까지의 사고를 탈피하여, 완전히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고구려 벽화고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즉, 고구려 벽화고분의 묵서에 대한 연구관점의 전환이 요구된다.

 

4.

이에 제2장에서는 고구려 벽화고분의 묵서는 積石塚을 고유묘제로 하는 高句麗로부터의 영향관계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고구려 벽화고분의 묵서 이해를 위한 기초 작업의 하나로 중국 墓葬文化와 文字를 탐구하였다. 그 속에서 畵像石․壁畵古墳․銘文塼의 文字文化를 검토하고, 특히 주문자․제작자․觀者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墓誌와 傍題로 구성된 중국 墓葬의 문자문화는 묘지로 볼 때 이미 樂浪·帶方故地 전축분 문화에 수용․정착되고 있었으며, 또한 주문자․제작자 시스템 역시 이미 갖추어진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중국의 벽화고분들은 탄생된 중심부보다 주변부로 전파되면서, 주변부에서 오히려 더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고 더불어 많은 방제가 쓰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제3장에서는 安岳3號墳의 축조와 성립에 영향을 준 墓葬文化의 계보를 검토하고자 하였다. 동수의 흔적과 요양벽화고분의 구조적 특징분석을 통해, 안악3호분의 축조가 낙랑·대방고지의 기존 묘제와는 완전히 다른 획기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무덤의 구조면에서 안악3호분이 요양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은 사실은 분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당시 낙랑·대방고지의 墓葬制는 塼築墳으로, 안악3호분을 축조할 만한 기술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따라서 안악3호분이 낙랑·대방고지에 축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축조기술자가 동수와 함께 남하하였거나, 요양지역 축조기술자를 초빙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즉, 안악3호분은 당시 낙랑·대방고지에 새롭게 등장한 묘장문화였다는 것이다. 당시 안악3호분은 하나의 획기를 이루며 낙랑·대방고지에 안착하였고, 이후 고구려벽화고분의 새로운 싹이 되었다.

제4장에서는 평양지역 벽화고분의 淵源과 묵서문화의 變容過程을 논해보고자 하였다. 이에 德興里壁畵古墳의 墓誌와 傍題를 명확히 정리․소개하여 그 판독과 해석을 확정하였다. 이에 더해 구조적인 면에서 遼陽壁畵古墳․안악3호분과는 전혀 다른 계통의 벽화고분임을 강조하였다. 이후 연도에 쓰인 ‘觀者’라는 묵서를 통해 고구려벽화고분에서 관람자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이와 관련된 주문자․제작자․관람대상자 등의 諸문제에 대한 분석을 진행하였다. 또한 평양지역 벽화고분의 천상세계와 묵서서술의 관계를 도출하기 위해, 천정구조의 여러 단계를 면밀히 분석하였다. 이후 덕흥리벽화고분의 연원을 살펴 가면서, 그것이 초래한 문화적 변용에 대해 기술하였다.

제5장에서는 평양천도를 계기로 하여 평양과 집안지역의 묘장문화에 나타나는 상호간의 영향관계와 변화양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집안 지역의 고구려 중심문화는 애초 무덤 내부에 묵서를 쓰지 않고, 무덤 밖에 묘비를 세우는 문화였지만, 평양천도를 전후해 평양지역의 묘장과 묵서문화가 집안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 단적인 사례가 바로 모두루총이었다. 그런데 모두루총 내부에 묘지가 묵서되었지만, 내용을 보면 집안지역의 묘비 서사문화가 보다 강하게 작용하였다. 한편 평양지역에도 평양천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고구려의 중심문화가 전파되었고, 이는 평양지역의 묘장과 묵서문화에도 상당히 큰 변화를 만들어내었다. 궁극적으로는 평양지역의 묘장문화, 특히 고분 내 묵서문화의 소멸을 가져온 커다란 변화가 포착되었다.

 

5.

이상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을 간략하게 소개하였다. 이 논문은 중국 묘장의 문자문화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고구려 벽화고분과의 연결 접점을 찾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고구려로 전파-수용-정착-소멸되는 일련의 과정을 조명하였다. 나아가 주문자․제작자․관람자 각각의 관점에서 묵서의 기능을 서술하였다. 주장에 비해 해명이 미비한 부분도 많고, 여전히 벽화의 역사화라는 지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 논문을 밑거름으로 삼아 부족한 점을 계속 보완해 나아갈 것이다. 앞으로 지금보다 의미 있는 벽화 연구를 내놓을 것을 약속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