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⑦] ‘서유견문’의 후예들 : ‘지미(地味)한’ 유만겸과 ‘호화(豪華)한’ 유억겸 형제_정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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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7월(통권 19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 

 

서유견문’의 후예들
: ‘지미(地味)한’ 유만겸과 ‘호화(豪華)한’ 유억겸 형제

 

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1. 창씨개명과 가문(家門) 의식

『경성일보』 1940년 8월 26일자에서 충북도지사 유만겸(兪萬兼, 1899-1944)은 “나는 현재 그대로 창씨했지만 유(兪)는 일본식 씨”주1)라고 주장했다. 창씨를 피했다는 비난에 대한 변명이었다. 해방 이후 유만겸을 다룬 한 글에서는 “현직도지사로서 당당하게 창씨를 거부하였으니 수성(守姓)으로 마지막 민족적 양심을 지켰던 것”이라면서 “이 사건으로 1940년 면직되어 관리 생활을 청산했다”고 평가했다.주2) 과연 ‘兪’씨 성을 고수한 것이 민족적 양심을 지킨 일일까?

당시 창씨개명 제도에서는 6개월의 신고 기간이 지나도 창씨 계출을 하지 않으면 호주(戶主)의 성을 그대로 일본식 성씨로 인정하였다. 기사의 문맥에 따르면, 유만겸은 아예 ‘兪’를 새로운 창씨명으로 적어 제출한 듯하다. 즉, ‘兪’는 그대로지만, 그 ‘兪’는 법률상 이전 성씨와는 다른 일본식 창씨인 셈이다. 충북도지사를 그만둔 것도 사실이지만, 창씨 거부 때문인지는 명확치 않다. 그는 도지사 이후에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총독부 통치에 협력했다.

충북도지사 유만겸이 자기 성씨를 고수한 반면, 식민지 민족의 현실에 괴로워했던 청년 시인 윤동주는 일본식 성씨로 창씨를 했다. 알다시피 윤동주는 일본 유학에 꼭 필요한 도항증을 받기 위해서 연희전문 학적부의 이름을 창씨명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로 바꾼 뒤 「참회록」을 남겼다.주3) 이처럼 일반민중들은 현실적 불이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한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일본식 이름 여부만으로 친일/반일을 가르는 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조선인들의 강한 혈족(가문)의식을 해체하고 일본적인 ‘家(いえ)’로 재편하여 식민지 조선을 천황과 직접 연결되는 가족국가로 재구축하고자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창씨개명 방식은 이런 정책적 의도를 무색케 했다. 조선의 많은 혈족 집단과 가문들이 문중 회의를 통해서 성씨가 발원한 본관을 새로운 창씨명으로 제출하면서 혈연공동체 의식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가령,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임순득 집안의 창씨명은 본관인 풍천(豊川), 즉 도요카와였다.

유만겸은 본관을 활용한 창씨마저도 하지 않고 ‘兪’라는 성을 고수했다. 창씨를 거부했기 때문에 충북도지사에서 해임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후 그가 받았던 ‘훈3등 서보장’과 중추원 참의 및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 그가 맡았던 직함들은 무엇일까? 그 직함들은 유만겸의 성씨 고수가 민족의식의 발로와는 그닥 관련이 없다는 점을 일러준다. 도지사 직위보다 소중했던 건 민족이 아니라 ‘兪’씨 가문 그 자체였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유만겸은 조선조 말기까지 수많은 고관을 배출한 지체 높은 기계(杞溪) 유씨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는 연암 박지원과 쌍벽을 이룬다고 평판이 높던 저암(著庵) 유한준(兪漢雋)의 6세손이었다. 가문이 그의 자부심의 배경이었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천은 아버지 유길준이었다. 최초의 미국 유학생인 유길준은 서양 문명을 소개하며 조선의 근대화 구상을 정리한 『서유견문』의 저자이자, 갑오개혁의 핵심적인 주체였다. 이제부터 유길준의 두 아들 유만겸·억겸 형제의 삶을 통해 전통 시대의 유력 가문이 근대의 격랑을 헤쳐 간 궤적을 따라가 보자.

그림 1. 개화사상가 구당 유길준
그림 2. 1899년 탈고된 <서유견문> 초고, 고려대학교 박물관

 

2. 유길준의 장남, ‘지미(地味)한’ 유만겸

유만겸은 구당 유길준의 장남으로 1889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미국 유학 중이었던 유길준은 갑신정변(1884)의 소식을 듣자 가족의 안위가 걱정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정변에 직접 연루되진 않았지만 원래 개화파의 일원인 데다가 일본 경유 중에 김옥균을 만난 것이 문제가 되어 죽음의 위기에 몰린다. 당시 보수파 정권의 일원인 ‘사종숙(四從叔)’ 유진학 등 그의 역량을 아까워한 이들에 의해 구명되지만 이후 7년 동안 도성 내에서 유폐 생활을 한다.

유만겸이 태어난 때는 바로 유길준이 민영익의 별장인 백록동 취운정에서 귀양살이 하던 시기였다. 유폐 중에 본가의 부인이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보아 외부와의 차단이 엄격하진 않았던 것 같다. 유만겸이 네 살 되던 1892년에 유길준은 7년 유폐에서 풀려난다. 1894년부터 유길준이 주도적 역할을 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지만, 1896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정권이 무너진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탁지부대신 어윤중이 살해되고, 내무대신 유길준은 일본에 망명했다.

망명한 국사범 아버지를 둔 여덟 살 소년의 삶은 얼마나 위태했겠는가. 허나 과묵한 소년은 꿋꿋이 학업에 열중한 듯하다. 소년은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이 가르친 ‘국문문법’ 강의 자료를 열심히 필사하며 공부했다. 그 노트는 훗날 우연히 발견되어 주시경의 초기 ‘국문 문법’ 인식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흥화학교에서는 영어과 시험에서 우등생으로 뽑혀 “New National Reader”(전 5권)를 상품으로 탔을 만큼 특히 신학문과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다.주4)

유길준이 사면을 받아 망명에서 돌아온 두 해 뒤인 1909년, 이번에는 아들 유만겸이 아버지가 건넌 바다를 되짚어 오카야마(岡山)의 제6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스무 살의 청년 유만겸 역시 당시 대한제국의 어두운 현실을 깊이 고민했다. 독립과 자강을 목적으로 한 ‘대한흥학회’의 회원 명부에 남아 있는 그의 이름은 그 흔적이다.주5) 명부에 박힌 유만겸의 이름 몇 자리 건너에서는 김사국의 이름도 보인다. 정반대의 삶을 살아갈 두 청년이 잠시 함께 했던 순간이다.

1913년 6고를 졸업한 유만겸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1917년 3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1년 간 더 대학원에서 연구생활을 하다가 1918년 4월 귀국했다. 대학을 졸업하며 유만겸은 『학지광』에 「9년 星霜」을 기고했다. 그는 일본이 청·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서구화(개화)의 성공에 있다고 단언한다. 이어서 그는 조선이 “폐정의 害”로 망했지만, 조선인 자체는 “우승(優勝)한 인민”이고 “인종개량학상 이상적 인종”이기 때문에 “자조(自助)”한다면 진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주6)

진화론과 자조론에 토대하여 서구화를 선(善)으로 인식하는 그의 세계 인식은 유길준의 세계관을 빼다 박았다. 특히 유만겸은 당대 조선에 시급한 “식산흥업을 통한 부력증진”을 지도할 지식청년들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에게 ‘식산흥업’은 산업진흥을 주창한 아버지 유길준의 유지를 잇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조선의 문명화를 이루기 위한 그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서구화에 성공한 일본적 근대를 조선이 따라야 할 전범으로 받아들였다.

일본 근대화의 성공을 증명하는 각종 통계의 숫자들도 그의 눈을 멀게 했다. 같은 잡지에 실렸던 「지나철도론(附만주총람)」주7)은 중국 철도 현황, 만주의 인구와 산업 등에 관한 통계로 이루어진 논문이다. 유만겸은 대학원 경제통계연구실에서 일본과 중국(만주) 그리고 조선의 현실을 숫자로 표현한 통계를 다루며 생활했다. 유만겸은 일본의 풍요로움과 조선의 빈한함이 극명하게 대조되는 통계 숫자의 숲에서 길을 잃고, ‘독립’ 대신 식민지의 개선 쪽을 선택했다.

1918년 귀국한 그는 총독부 고등관의 사회적 경력을 시작했다. 「9년 星霜」의 논리로 말해보면, ‘우승한 인민’을 가지고도 나라를 망하게 한 조선 왕조의 ‘폐정을 혁신’하여 조선의 진보를 추구하는 청년의 책임을 수행하는 길이었다. 1918년 4월부터 조선총독부 ‘속’으로 농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1920년 문경군수를 비롯 조선총독부의 이사관, 사무관, 참여관 등을 두루 거친 후 1939년 충북 도지사가 되었다. 총독부 관료 시절 그에 대한 평판은 어떠했을까?

한 잡지의 도지사 인물평에 따르면, 선각자 유길준의 아들이며 강원도지사 유성준의 조카로 명문 양반가의 후예이자 도쿄제대 학사 출신임에도 유만겸은 “순후(淳厚), 겸양(謙讓), 고결(高潔), 침정(沈靜)”한 성품을 지녔다. 그의 배경에 비해 도지사 승진이 늦었던 까닭도 청탁을 싫어하는 그의 “지미(地味)한 성격”에서 찾고 있다. 글쓴이는 조선 민중을 위해 일해 왔던 조선인 도지사 유만겸이 “민중이 미혹하는 일을 거듭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주8)

유만겸은 사교와는 거리가 먼 내성적 성격의 은둔형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세속의 공명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거나 청탁을 싫어했다는 평가는 약간은 미화된 것처럼 보인다. 최근 간행된 『모리야 에이후(守屋榮夫) 관계문서』는 식민지 정계 막후에서 일어난 여러 흑막을 알려준다. 정무총감 비서과장 모리야는 내무성 관료 50여명을 조선총독부 요직에 인선하는 작업을 주도한 인물로, 사이토 총독과 미즈노 총감의 이른바 ‘문고리 권력’이었다.

모리야 에이후 문서 중에는 1930년 2월 13일 유만겸이 보낸 편지도 한 통 남아 있다. 유만겸은 모리야의 중의원 출마를 응원하며, 그의 정견 발표가 “동양의 현상을 밝히고 가장 적합한 의견”이라고 추켜세운다. 자신도 “그것을 숙독하며 감격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면서, 모리야가 미즈노 렌타로를 이사장으로 추대하며 설립한 ‘소화연맹’의 취지서에도 공감을 표했다. 무엇보다 이 편지의 가장 큰 목적은 향후 청탁을 위한 보험인 정치자금을 보내는 것이었다.주9)

1944년에 죽을 때까지 유만겸이 맡은 여러 경력 중에서도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부회장과 성균관을 개편한 경학원 부제학은 각별히 눈여겨 볼만한 직책이다. 유만겸은 비록 총독부의 관변단체일망정 유림 단체의 수장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다. 유만겸에게 조선(인)의 ‘식산흥업’에 기여하는 총독부 관료의 삶이 아버지의 개화 이념을 실현하는 길이었다면, 유림 단체들의 직함은 가문과 아버지의 한학 전통을 계승하는 의미였을 것이다.

 

3. 유길준의 차남, ‘사교적인’ 유억겸

유억겸(1896-1947)은 유길준이 망명을 떠난 8개월여 뒤인 1896년 10월 23일에 태어났다. 형 유만겸과는 7살 터울이다. 한문을 사숙하다 1907년 한성사립계산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에 졸업했다. 경성중앙기독교청년회 학관 중등과에서 잠시 배우다가 1912년 교토의 도시샤중학 보통부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한다. 이어서 교토 제3고에서 수학하고 1919년 7월에 도쿄제대 법학부에 입학하여 1922년 3월에 졸업했다. 이후 1년여 간 대학원에서 법학을 연구했다.

1922년 4월 귀국한 그는 변호사 등록을 하고,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교육계 생활을 시작했다. 중앙고보에 근무한 지 4개월 만에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수에 임용되었으며, 이후 부학감을 거쳐 학감 및 부교장 등 중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1938년에 비밀 결사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강제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나 있던 시기도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 다시 교장 직을 맡는 등 사회 경력의 대부분을 ‘연희(전문)대학’에서 교수와 행정가로 보낸 교육자였다.

그렇지만 그의 활동 영역이 연희전문 및 교육계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유억겸은 형에 비해 “사교적인 호화면도 있”주10)던 활동적 성격의 인물이었다. 순정효황후의 여동생과 결혼한 그는 순종과는 동서지간이었다. 유억겸은 조선 왕조 마지막 임금을 손윗동서로 둔 명문 양반 귀족 가문의 후예라는 화려한 배경에 더해 도쿄제대 법학사라는 돋보이는 학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배경을 터전 삼아 식민지의 수많은 명사들과 교유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유억겸의 사회 활동은 우선 YMCA 등 기독교 단체와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식민지 내내 윤치호의 최측근이었으며, 이상재와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 중심의 자치운동에 반대했고, 안재홍·홍명희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했다. 1927년 1월에는 신간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대체적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그룹과 발을 맞춘 유억겸의 정치적 활동의 근간에는 무엇보다도 ‘흥업구락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흥업구락부는 1925년에 결성된 조직이다. 구성원은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유성준 등 대부분 기호 지방의 기독교 세력이 주축이었고, 유억겸도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흥업구락부 사람들은 거의가 이승만과 관련된 인사들이었다. 흥업구락부는 하와이에서 결성된 이승만 ‘동지회’의 국내 조직처럼 인식되었다. 당시 경찰 당국의 표현을 빌면, 이승만과 흥업구락부는 “숙명적 우정 관계”주11)였다. 그 우정 관계는 구한말 독립협회 활동과 감옥 생활에서 시작되었다.

윤치호와 이상재 그리고 이승만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을 함께 한 정치적 동지였다. 신흥우는 배재학당 동문이며 형의 친구인 이승만을 의형으로 따랐다. 유성준은 형 유길준이 일본에서 군인 유학생 결사인 ‘혁명일심회’와 쿠데타를 모의한 사건 때문에 투옥되는데, 이승만과 같은 감방에 갇혔다. 이때 이승만의 감화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후 유성준은 YMCA 교육부 위원으로 일하면서 조카 유억겸이 이승만 추종 세력이 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이승만의 국내 인맥들은 생사의 고비를 같이한 동지들로, 정치적으로 친미 개화파, 종교적으로 기독교도, 지역적으로 기호 지방의 양반 출신 명망가들이었다. 이상재, 윤치호는 신사유람단 수행원 때부터 유길준과 함께 일한 사이였다. 중립외교와 서구화(미국화)를 통해 독립과 문명화를 주창한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그 사상과 서술 구조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흡사했다. 유억겸이 이승만이 정점에 있는 기호파의 중심인물이 된 것은 당연해 보인다.

1925년 11월 유억겸은 신흥우, 송진우 등과 함께 세계기독교단체가 주축이 된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조직하고 위원을 맡았다. 유억겸은 이 단체가 개최한 태평양회의의 제1회부터 3회까지 모두 참석한 유일한 조선대표였다.주12)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의 경찰 발표에 따르면, 유억겸은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회 태평양회의에 참가했을 때, “동지회 수령 이승만에게 흥업구락부 조직의 경과를 보고”하고, 이후 국내에서 일본을 전복할 “책모를 계속”했던 주모자였다.주13)

그림 3. [위] 제3회 태평양회의 조선대표 3인, 좌로부터 유억겸, 김활란, 백관수
[아래] 하와이동포의 환영회, 가운데 모자 쓴 이가 이승만, 그 옆이 유억겸
『동아일보』 1927년 8월 22일
윤치호는 일기에서 유억겸이 “5일 동안이나 혐의를 부인하는 바람에 취조기간이 길어졌”주14)으나, 결국 혐의를 인정하고 당국의 요구대로 “전향 성명서를 집필해 번역”주15)하고 있는 서대문경찰서의 당시 풍경을 전하고 있다. 그 성명서는 무망한 조선독립을 도모하고 이승만을 지원하기 위해 흥업구락부를 결성했던 사실을 후회하고, 앞으로 천황을 위해 살면서 열심히 일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다짐하는 내용이었다.주16) 이후 유억겸은 친일 협력의 길을 걷게 된다.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본부 상임감사·교양부장·경성지부3분회장, 흥아보국단 경기도 준비위원, 임전대책협의회 준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이사, 채권가두판매대 대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 식민지 말기 유억겸이 맡았던 단체의 직함들이다.주17) YMCA청년회, 청구회, 흥업구락부, 신간회, 조선체육회 등의 임원을 도맡으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순양함’이라 불릴만큼 ‘勤의 人’주18)이었던 유억겸은 친일 활동에서도 근면했다.

유억겸에게 해방은 새로운 기회였다. 그는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등과 함께 미군정청 학무국 교육위원에 임명되었다. 1946년 2월에는 교육정책을 총괄하는 교육부장이 되었다. 유억겸은 국립서울대학교안(‘국대안’)을 주도하여 국립대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격렬한 갈등을 불러일으킨 ‘국대안’은 유억겸에게는 아버지 유길준이 『서유견문』에서 열망했지만 이루지 못한 ‘국가 주도’의 근대 교육기관을 실현한 것이다. 그는 ‘국대안’을 남기고 1947년 11월에 죽었다.

 

4. 유길준 부자와 ‘친미 개화’

유길준의 삶에서 문명화와 (민족)국권 수호라는 두 목표는 자주 갈등을 일으켰다. 문명화를 위해 밀어붙인 개혁은 오히려 국권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개화는 투철하게 했는데 한국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를 취한 것은 없”는 “자기를 망치는 개화”주19)를 했다는 홍이섭의 평가는 주체성이 결여된 유길준의 개화론에 대한 비판의 한 사례다. 반제·반봉건이 함께 요구되는 상황에서 문명화에 대한 유길준의 조급함이 제국주의에 이용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외세의존적인 한계는 비판하더라도, 그의 공적 모두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통해 세계로 향한 문을 열었고, 갑오/을미개혁을 통해 근대화를 시도했다. 1907년 망명에서 돌아온 유길준은 교육과 식산흥업 운동에 몰두했다. 각종 학교를 운영했고, 제국실업회 등을 설립했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망했지만, 유길준은 일본이 하사한 작위와 합방은사금을 거절하는 것으로 망국의 신하로서 최소한의 의리를 지켰다.

아들들의 삶에 드리운 유길준의 영향은 깊고도 컸다. 집안의 전언에 의하면, 유길준의 “침착하고 과묵하며 정확한 성품의 일면은 장남 유만겸이 물려받았고,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것은 차남 유억겸이 나누어 물려받았다.”주20) 형제가 물려받은 것이 아버지의 성격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길준의 개화론과 엘리트 교육과정을 가능케 한 경제적 지원, 공직과 사회활동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사회적 자본 등 정신적·물질적 자산을 상속받았다.

먼저, 형제는 아버지의 개화론을 계승했다. 진화론적 세계관에 토대한 유길준 개화론의 논리에서는 뒤처진 조선의 도태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유만겸이 ‘식산흥업을 통한 부력증진’을 주장하며 총독부 관료가 된 것은 유길준 개화론이 지니고 있던 약점이 극단화된 사례이다. 유만겸은 유길준 개화론의 현실적 추진력을 총독부에서 구한 것이다. 반면 유억겸은 문명화와 국권 수호의 방안을 교육에서 찾은 유길준을 이어서 연희전문 및 교육계 활동에 주력했다.

다음으로 형제가 받은 것은 경제적 지원이다. 1907년 귀국한 유길준에게 고종은 노량진의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하사한다. 정조가 사도세자릉을 참배하러 갈 때 묵던 이 행궁에는 노량진, 흑석동과 상도동, 대방동의 막대한 토지와 산림이 딸려 있었다. 한 저서에서는 계몽 사업에 재산을 모두 쏟아 부어 유길준 사후에 작은 한옥 한 채만 남았다고 칭송한다. 또한, 순종의 동서 유억겸이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한 사실을 적으며 이들 일가의 청빈함도 강조했다.

유길준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재화의 많은 부분을 계몽 운동에 사용한 건 사실일 것이다. 허나 공익만을 위했다는 건 다소 과장되어 보인다. 유만겸과 유억겸 형제는 일본에서 꼬박 10년씩 유학을 했다. 그 긴 세월 동안 형제의 일본유학 비용을 무엇으로 충당했겠는가? 1937년 한 신문기사는 등기되어 있지 않은 유길준 명의의 대방정 7천평을 대리상속자를 내세워 편취한 사기사건을 보도하고 있다.주21) 사후 20여년 뒤까지 유길준의 재산이 남아 있던 흔적이다.

마지막으로 유길준은 아들 형제에게 유용한 인맥을 물려주었다. 장남인 유만겸이 조선인으로써 최고위직인 도지사가 된 데에는 일본 정관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한 유길준의 후광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또한 유억겸은 유길준이 닦아 놓은 개화파 네트워크를 승계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인 주류 사회에서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이처럼 형제는 아버지의 개화론(이념) 및 경제적 유산, 일본과 조선의 인맥에 토대한 사회적 자산을 활용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 세 부자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은 서구 근대를 전범으로 삼은 조선의 문명화를 지향했다. 그 중에서도 유길준-유억겸 부자의 이상적 국가 모델은 미국이었던 듯하다. 조선 독립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접은 형과는 달리 유억겸은 1938년 전향 이전까지는 독립된 조선을 목표로 삼은 정치사회적 활동을 이어갔다. 유억겸은 일본의 작위를 거절한 아버지에 대한 긍지를 가슴에 품고, 아버지와 유사한 세계관과 정치적 행보를 보였던 이승만을 좇았다.

그 아버지 유길준과 마찬가지로 아들 유억겸에 대해서도 그 공과에 대한 합당한 평가가 필요하다. 그의 친일 행위는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전향 전까지 기독교와 미국식 민주주의, 민족의식을 배경으로 그가 한 활동을 모두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승만과 기독교 그리고 미국이라는 조합을 두고 한편에서는 무조건적인 숭배가 이루어지고, 반대편에서는 만악의 근원으로 혐오하는 양극단의 진영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적어도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5년여의 감옥 생활을 한 투사였다. 이후 비판받을만한 행적도 많지만,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 모두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길준 삼부자를 포함하여 이들 친미 개화파의 공과를 합당하게 평가하고 공정하게 비판할 때, 도덕화된 양분법을 넘어서 한국 근대를 만들어 온 다양한 계통의 흐름들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미주)

  1. 「創氏せぬとは心外 兪をそのまま氏としたのだ」, 『京城日報』 1940.8.26.
  2. 유동준, 『유길준전』, 일조각, 1987, 313쪽.
  3. 송우혜, 『윤동주 평전』, 서정시학, 2018, 306-309쪽.
  4. 김명배, 「개화기의 영어」, 『월간영어』, 1979. 10. 여기서는 유동준 앞의 책, 312쪽 재인용.
  5. 「본회 회원록」, 『대한흥학보』3호, 1909년 5월 20일.
  6. 유만겸, 「9년 星霜」, 『학지광』13호, 1917. 7, (特別大附錄)2쪽.
  7. 유만겸, 「지나철도론(附만주총람)」, 『학지광』13호, 1917. 7, 68-79쪽.
  8. 광화학인, 「도지사 인물평(一), 충북지사 유만겸론」, 『삼천리』 제11권 제7호, 1939. 6, 16∼18쪽.
  9. 유만겸의 “1930. 2. 13 편지”, 이형식 편저, 『守屋榮夫關係文書』, 아연출판부, 2021, 265-266쪽.
  10. 광화학인, 앞의 글, 16쪽.
  11. 「李承晩對興業俱樂部幹部トノ宿命的友情關係」(地檢秘 제1253호)(소화 13년 8월 9일) 여기서는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84쪽 재인용.
  12. 제1회의 조선대표는 송진우, 신흥우, 윤활란, 서재필, 김양수, 유억겸, 제2회의 대표는 백관수, 김활란, 유억겸, 제3회 대표는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송진우, 백관수였다.
  13. 「흥업구락부사건」, 『동아일보』 1938년 9월 4일자.
  14. 윤치호 일기, 1938년 8월 22일 월요일.
  15. 윤치호 일기 1938년 9월 3일 토요일.
  16. 「성명서」, 『동아일보』 1938년 9월 4일자.
  17.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인명편2』, 2010, 601-603쪽.
  18. 변영로, 「勤의 人 유억겸」, 유동준, 앞의 책, 320쪽.
  19. 홍이섭, 「인물로 본 한국사 좌담」, 『중앙일보』
  20. 유동준, 앞의 책, 315쪽.
  21. 「호경기와 지가고로 악성뿌로커 발호-대경성을 중심으로 시중에 난무 법망도 교묘히 도피」, 『조선일보』, 1937.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