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백제(百濟) 성씨(姓氏)의 역사적(歷史的) 전개(展開)와 대성팔족(大姓八族)_오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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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5월(통권 17호)

[나의 학위논문] 

 

백제(百濟) 성씨(姓氏)의 역사적(歷史的) 전개(展開)와
대성팔족(大姓八族)

(2020. 2.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오택현(고대사분과)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지만, 학위를 받은 지 1년이 지났다. 지난 3월에 고대사 분과 총회에서 논문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나의 논문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성과 함께 많은 숙제를 받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박사학위 논문의 핵심 내용과 향후 연구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많은 선·후배 선생님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대사회의 정체성(identity)을 나타내는 성씨(姓氏)

삼국시대의 성씨(姓氏)는 왕실 및 귀족의 전유물로써, 고대국가 지배층의 정체성(identity)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체계이다. 그러므로 성씨(姓氏)는 고대사회의 구조 및 정치를 해명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고대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성씨(姓氏)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마다 칭성(稱姓)의 양상과 성씨(姓氏) 집단의 존재 양태는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이는 성씨(姓氏)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각국의 상황에 따라 변용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고대사회의 성씨(姓氏)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성씨(姓氏) 사용 방법을 참고하되, 그들이 처한 상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백제(百濟) 성씨(姓氏)의 독특함

백제(百濟) 성씨(姓氏)의 양상과 그 역사적(歷史的) 전개 과정은 고대 동아시아 각국과 공통적 기반을 가지지만, 차이점도 많아 독특하다. 백제(百濟) 성씨(姓氏)의 독특함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와 달리 백제(百濟)에서는 왕성(王姓) 외에도 최고 귀족층의 성씨(姓氏)가 다양하게 확인된다.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경우, 왕성(王姓)인 고(高)씨 혹은 김(金)씨가 최고 귀족층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즉 왕성(王姓)과 같은 성씨(姓氏)가 각국의 최고 귀족층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백제(百濟)는 『수서(隋書)』에 특필(特筆)된 ‘대성팔족(大姓八族)’이 잘 대변하다시피, 사비기(泗沘期) 최고 귀족층 구성에 있어 왕성(王姓)인 부여(扶餘)씨보다 ‘대성팔족(大姓八族)’이 더 많이 확인되고 있다. 두 번째로 백제(百濟)에는 특이하게 ‘복성(複姓)’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성씨(姓氏)가 매우 많다. 마지막으로 귀족에 대한 사성(賜姓)의 사례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백제(百濟)의 성씨(姓氏)의 이러한 양상은 이웃한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보다 7세기 말 이후 고대 일본(日本)의 성씨(姓氏)와 더욱 흡사한 면을 띤다.

 

백제(百濟)의 성씨(姓氏) 수용

백제(百濟)의 성씨(姓氏)는 크게 3가지 방향으로 수용되었다.
첫째,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조(高句麗條)에 보이는 성씨(姓氏) 집단이 백제(百濟)에서 보인다는 점에 주목해 그들을 고구려(高句麗)에서 백제(百濟)로 남하한 집단으로 상정해 정리하였다. 그 결과, 고(高), 해(解), 을(乙), 우(優) 등의 성씨(姓氏)를 고구려(高句麗)에서 백제(百濟)로 이주한 집단으로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해당 성씨(姓氏)가 백제(排除)로 수용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둘째, 후대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정립되는 성씨(姓氏)를 살펴보았다. 한성기에 보이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은 진(眞)씨, 사(沙)씨, 목(木)씨이다. 이들은 모두 국가의 위기 상태에서 등장하는 특징을 보인다.
셋째, 중국에서 넘어온 유이민(流移民) 성씨(姓氏) 집단도 다수 보이는데 이들은 낙랑·대방군의 몰락과 함께 백제(百濟)로 유입되었고, 그러면서 백제(百濟)에 성씨(姓氏)가 수용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이 붕괴되자 백제(百濟)는 스스로 대외교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이때 중국(中國)에서 발생한 팔왕(八王)의 난, 영가(永嘉)의 난을 피해 백제(百濟)로 넘어온 인물 및 낙랑(樂浪)·대방군(帶方郡)에서 유입된 인물을 활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대외교류를 추진하던 백제(百濟) 왕실은 중국(中國)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사용하던 복성(複姓)이라는 방식을 차용하여 부여(扶餘)씨를 사용하게 되었다. 아울러 백제(百濟) 왕실이 복성(複姓)의 성씨(姓氏)를 사용한 것처럼 스스로 성씨(姓氏)를 칭하는 사례가 백제(百濟) 내에서 늘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 다양한 성씨(姓氏) 집단이 양산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성(漢城)의 몰락과 웅진(熊津)으로의 천도 : 늘어난 성씨(姓氏) 사용 집단

한성기의 몰락과 함께 더욱 다양한 성씨(姓氏) 집단이 백제(百濟) 사회에 등장하게 된다. 즉 백제(百濟)가 웅진에 도읍함에 따라 한성에서 옮겨 온 세력과 웅진에 거주하던 세력이 함께 백제(百濟) 사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씨(姓氏) 집단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웅진기 성씨(姓氏) 집단은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 이익을 위해서 반란과 국왕 시해 등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가담한 인물 중 새로운 성씨(姓氏) 집단의 인물이 보여 흥미롭다. 새로운 세력이 백제(百濟) 중앙을 차지하기 위해 기존의 세력을 견제하기도 하면서 연합을 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웅진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성씨(姓氏) 집단은 하나의 성격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을 도모한 세력을 죽인 후에도 그 성씨(姓氏) 집단이 계속 확인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웅진기의 혼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성씨(姓氏) 집단이 등장한다. 개로왕 서(書)에 보이는 인물은 대부분 부여(扶餘)씨인 반면, 동성왕의 서(書)에 보이는 인물은 후대 대성팔족(大姓八族)이 되는 집단, 새로운 성씨(姓氏) 집단, 중국에서 백제(百濟)로 넘어온 姓氏 집단 등이다. 즉 당시 웅진기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이 노력했고, 이를 인정해주고자 동성왕이 將軍號를 요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재검토

대성팔족(大姓八族)은 『수서(隋書)』에 처음 등장하는 용어이다. 중국 정사 조선전의 기록은 앞선 기록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새로운 정보가 있으면 추가 기입한다. 『수서(隋書)』도 이러한 편찬 방향에 맞춰 서술되었다. 따라서 『수서(隋書)』를 편찬할 당시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는 용어는 당시 백제(百濟)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정보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보는 백제(百濟) 왕실에서 직접 중국(中國)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대성팔족(大姓八族)은 『수서(隋書)』가 편찬된 636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600년에 초반에 확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성팔족(大姓八族)은 대성(大姓)이 8개라는 의미이다. 게다가 8개의 대성(大姓)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이는 8개의 대성(大姓)이 백제(百濟)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전까지는 『통전(通典)』에 기반하여 협(劦)과 목(木)을 목협(木劦)씨의 분화로 파악하여 7개의 성씨(姓氏)로 보았다.
『수서(隋書)』 및 그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북사(北史)』와 『한원(翰苑)』(636년에서 660년 사이에 작성)를 보면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성씨(姓氏)가 협(劦)이 아닌 리(刕)로 기록되어 있다.

<표 1> 百濟 大姓八族 기록 비교

또 목협(木劦)씨의 분화설도 수긍하기 어렵다. 목협(木劦)씨가 분화되었다면 다른 복성(複姓)도 분화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하나인 사(沙)씨는 본래 사택(沙宅), 사타(沙吒)의 복성(複姓)을 축약하여 사용한 것이지 분화된 모습은 아니다. 심지어 왕성(王姓)인 부여(扶餘)氏도 복성(複姓)을 축약해 여(餘)로 쓰고 있다. 즉 복성(複姓)을 축약하여 사용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그것이 분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백제에서 성씨(姓氏) 집단의 분화가 보이지 않은 것을 아니다. 하지만 흑치(黑齒)씨와 귀실(鬼室)씨의 사례로 볼 때 백제에서의 성씨(姓氏) 분화는 복성(複姓)이 각각 분리되기보다 전혀 새로운 성씨(姓氏)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목협(木劦)씨가 목(木)씨와 협(劦)씨로 분화되었다는 주장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설사 목협(木劦)씨가 분화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서에 기록된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순서를 살펴보면 일정한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서상 협(劦)(혹은 리(刕))씨가 3번째로, 목(木)씨는 7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협(劦)씨보다 목(木)씨가 더 많이 보인다. 단편적인 기록이지만 사서에 기초하면 목(木)씨가 협(劦)씨보다 세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순서와 복성(複姓)에서 분화되었을 가능성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목협(木劦)씨가 아닌 협목(劦木)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대성팔족(大姓八族) 8족의 성씨(姓氏)는 무엇인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처음 기록한 『수서(隋書)』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작성된 『북사(北史)』와 『한원(翰苑)』은 대성팔족(大姓八族) 중 3번째 성씨(姓氏)를 협(劦)이 아니라 리(刕)로 기록하고 있다. 『수서(隋書)』 『북사(北史)』 『한원(翰苑)』은 636∼660년에 작성된 사서로 『통전(通典)』보다 먼저 작성되었다. 그리고 당시 음차(音借)를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에서 간단한 글자인 리(刕)를 성씨(姓氏)로 기록했을 가능성을 상정하였다. 이에 중세(中世) 음운(音韻)을 통해 가능성 있는 성씨(姓氏)를 살펴본 결과, 리(刕)를 예(禰)로 볼 수 있음을 확인했다. 한국 고대 음운에서는 첫 글자의 음은 ‘ㄹ’이 나올 수 없어 ‘ㄹ’이 ‘ㄴ’으로 발음된다. 이는 안라(安羅)와 아나(阿那)의 사례와 광개토왕비의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표 2> 安羅伽倻 명칭 비교

즉 ‘li’와 ‘ni’는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음운상으로 li, ni와 연결될 수 있는 백제의 성씨를 살펴보면 예씨가 있다. ‘예(禰)’씨에 대해서는 최근에 발견된 예군 묘지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예군 묘지명을 살펴보면 “公諱寔進 百濟熊川人也 祖佐平譽多 父佐平思善 並蕃官正一品”와 같은 기록이 있다. 이 내용을 해석하면 “공(公)의 휘(諱)는 식진(寔進)으로 백제 웅천인이다. 조부는 좌평(佐平) 예다(譽多)이고 부친은 사선(思善)으로 모두 백제 관리(蕃官) 정1품이다”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禰)씨 집단이 백제 사회에서 좌평을 역임했다는 점이다. 또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난갈 당시 웅진방령(熊津方領)이 예(禰)씨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볼 때 예(禰)씨는 후기 백제 사회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대성팔족(大姓八族)의 기록 순으로 본다면 예(禰)는 기록 순서상 3번째에 위치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대성팔족(大姓八族)의 8개 성씨(姓氏)를 파악하였다.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서의 예(禰)씨

리(刕)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자이다. 실제로 협(劦)이 더 많이 사용되며, 현대 중국어에는 이러한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리(刕)와 협(劦)은 발음상 같을 수 없다. 특히 협(劦)의 경우에는 ‘-p’라는 반절음이 있어 리(刕)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글자이다. 그렇지만 현재 중국어 발음에는 협(劦)의 발음에 ‘xié’ 뿐만 아니라 ‘liè’의 발음이 같이 나온다. 현대 중국어에서 사용되지 않는 한자를 비슷한 자형을 가진 한자에 발음을 추가해 정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리(刕)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한자로 하여 리(刕)와 비슷한 협(劦)에 과거의 리(刕) 발음을 추가해 정리하였기 때문이다.
리(刕)가 현대에 사용되지 않는 한자가 된 이유는 이미 과거부터 흔히 사용하지 않는 한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 사용되지 않았던 이유는 리(刕)가 잘 사용되지 않는 벽자(僻字)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백제에서는 음훈만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리(刕)를 간단한 글자라고 생각해 사용했고, 그 결과 백제에서 중국에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알려줄 때 리(刕)를 쓴 것이다.
하지만 점차 한자에 대한 지식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리(刕)라는 한자의 의미 및 벽자(僻字)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다시금 발음이 같은 한자로 성씨(姓氏)를 변경했을 것이다. 실제로 벽자(僻字)를 피하는 방식은 중국에서 여러 차례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성씨(姓氏)를 사용할 때 발음은 같지만, 좋은 의미의 한자를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이에 예(禰)라는 한자가 제사와 관련되었으며, 아버지(조상)라는 특정 대상에 중점을 둘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리(刕)를 성씨로 사용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성씨를 예(禰)로 바꾸어 사용했고, 그 결과 예(禰)씨가 백제 사회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성씨(姓氏) 동향을 통해 본 백제(百濟)의 멸망

무왕(武王)은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인정하면서 국정 운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왕대(武王代)에 나타나는 성씨(姓氏) 사용 집단의 기록을 보면 70% 정도가 대성팔족(大姓八族)이다. 이는 일본이 율령국가로 진입할 때 팔색성(八色姓)을 제정하여 그들은 우대해주고 다른 귀족들을 통제한 사례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즉 무왕(武王)은 대성팔족(大姓八族)을 우대해주면서 백제 사회의 중앙에서 활동하게 했고, 이를 통해 난립(亂立)하고 있던 성씨(姓氏)를 안정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후 의자왕대(義慈王代)에 들면 무왕대(武王代)와는 다른 분위기가 연출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의자왕(義慈王) 즉위 2년에 국주모(國主母)가 죽자 왕족 4명과 신하 40명을 일본(日本)으로 내쫓는다. 또 기록된 성씨(姓氏) 집단을 살펴보면 대성팔족(大姓八族)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특히 『주서(周書)』에 기록된 좌평(佐平) 5명보다 많은 41명의 왕(王) 서자(庶子)에게 좌평(佐平)을 준다. 좌평(佐平)이 5명이라고 하는 것은 좌평(佐平)이 특권계층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자왕(義慈王)이 왕(王) 서자(庶子) 41명에게 좌평(佐平)을 줌으로써 특권계층을 붕괴시켰다.
과거 한성기부터 백제(百濟)는 금동관모, 중국제 도자기, 환두대도와 같은 위세품(威勢品)으로 사람들을 포섭했다. 그리고 이들은 성씨(姓氏) 집단의 난립(亂立)과 함께 대두되면서 백제(百濟) 중앙으로 진출, 좌평(佐平)과 달솔(達率)을 가진 집단으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자왕(義慈王)은 이러한 왕(王)-좌평(佐平)-달솔(達率)이라는 구조를 깨고 王이 세력의 중심에 서고자 했다. 이에 왕(王)-좌평(佐平)-달솔(達率)로 구성되던 공존구조가 깨어지고, 당(唐)의 13만 대군, 신라(新羅)의 5만 대군이 백제(百濟)를 향해 공격함에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멸망하게 된 것이다.

 

논문의 아쉬움과 향후 과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백제(百濟)의 멸망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으나, 당시 필자의 역량상 그러지 못했다. 실제로 박사논문에서 마지막 장은 간단하게 상황만 언급했을 뿐 고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점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체제’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사전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제 사회가 성씨(姓氏)의 동향으로도 설명됨을 확인하고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하지만 성씨(姓氏)로 한 사회를 보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에 필자의 시도는 과감할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산적해 있다. 성씨(姓氏)로 백제 사회를 보는 것이 처음이기에 생겨나는 오류라고 생각되며, 이에 대해 차츰차츰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여전히 부끄럽지만, 웹진을 통해 논문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선·후배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신 웹진위원회분들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리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많이 부족한 글이기에 선·후배 선생님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수정·보완해 성씨(姓氏)로 백제 사회를, 나아가 고대사회를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