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17세기 전반 조선(朝鮮)과 후금(後金)·청(淸)의 국교(國交) 수립 과정 연구_장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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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5월(통권 17호)

[나의 학위논문] 

 

17세기 전반 조선(朝鮮)과 후금(後金)·청(淸)의
국교(國交) 수립 과정 연구

(2020. 8.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장정수(중세 2분과)

 

1. 들어가며

처음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필자의 주 관심분야는 조선후기 군사사였다. 砲手를 중심으로 조선후기의 군사적 변화를 추적한 석사논문을 제출한 뒤에도 한동안 御營軍과 精抄軍을 주목하여 박사논문을 구상했다. 그런데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시기가 16세기 후반~17세기에 걸쳐 있다 보니 한 가지 문제를 절감하게 되었다. 군사적 변화를 수반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에 관해서 군사사적 연구와 대외관계 연구가 충분히 연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조선의 군사적 변화를 추동한 요인으로서 ‘가상의 적’에 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군사사 대신 대외관계 연구에 몰입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조선후기의 군사사와 대외관계 연구는 밀접하게 연관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거대한 전쟁이 조선왕조의 대외관계를 크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왜구에 대한 대비책은 일본에 대한 것으로, 야인에 대한 대비책은 후금‧청에 관한 것으로 조정되었다. 명과의 관계 역시도 의례적인 데서, 실제 인력과 물자가 동원되는 현실적인 것으로 탈바꿈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후기의 대외관계는 청과 일본에 대한 것으로 정립되었다.
이상은 종래의 전문적 연구는 물론 개설서에서도 기본골격으로 갖추어져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이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들이 적지 않다. 지면관계상 이를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적 행위자로서의 조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청관계의 수립 과정은 명조와 청조의 교체를 중심축으로 삼아 부수적으로 다루어지는 감이 있다. 이 거대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동참하느냐 혹은 현상유지를 꾀하느냐를 두고 실리-명분의 프레임이 형성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조청관계는 명‧청교체의 산물로 여겨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의 대명사대가 대청사대로 전환된다는 것이 골자라고 하겠다. 이같은 틀로는 또 하나의 정치 주체로서 조선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다루기 쉽지 않다.
한국사의 대표적인 개설서의 서술을 예로 들어보자. 조청관계의 수립 시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서술되어 있다. 정묘‧병자호란을 설명하기에 앞서 ‘호란 전의 정세’를 기술했는데, 그 대부분이 건주여진의 ‘興起史’로 채워져 있다. 본서가 한국사를 다룬 개설서임을 감안하면 여진 관련 서술이라도 조선과의 접점을 중심으로 서술해야 마땅할 텐데 그렇지 않다. 청대의 ‘입관전사’ 서술을 가감 없이 가져오다 보니, 강한 ‘후금’을 상대로 조선이 실리-명분의 갈림길에 섰다는 것이 핵심논조가 되었다.
조선이 접한 ‘여진’은 전체가 아니라 일부이다. 건주여진의 흥기는 분명 중요하지만 조선이 실제로 접했던 여진 문제에 집중해야 본서의 서술 목적에 좀 더 부합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藩胡나 훌룬(울라)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은 소략하다. 건주여진에 병합된 諸部의 하나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건주여진의 흥기(와 조선의 대응)’, ‘후금의 조선 침입(과 조선의 대응=정묘호란)’, ‘청의 조선 침입(과 조선의 대응=병자호란)’의 흐름으로 서술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항쟁사적 관점이 적용된 탓에, 조선과 건주여진‧후금‧청의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관계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간 이 분야에 대한 연구사적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갈수록 연구에 깊이가 더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병자호란 관련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연구사적 공백이 조금씩 메워지고 있다. 다만, 통설적인 설명에서 조선은 수동적이고 부수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행위주체라기보다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이 시기 조선의 대외관계가 이른바 ‘명‧청교체’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부였던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했다. 여진‧후금‧청조와의 관계 변화를 통해 조청관계의 기원을 추적하되 철저히 조선의 관점을 쫓고자 했다. 이는 일국사적 입장을 견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청조의 흥기를 중심으로 한 관점만큼이나, 조선의 입장을 파악하려는 노력도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해당 시기의 조청관계에 대한 국내외의 연구 성과가 활발히 제출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연구자가 최대한 객관적인 서술을 추구했음에도 여전히 청조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실 조선과 청, 양국의 관점을 균형감 있게 서술하기에는 지금까지 축적된 연구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조청관계의 입체적 규명을 위해서는 양측의 입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부족하지만, 필자의 논문이 이러한 연구사적 진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조선의 대청인식: 여진의 후예 혹은 중국의 왕조

조명관계는 의례 면에서 군신관계로 정착한 ‘특수한’ 외교관계였다. 조명관계는 관념과 현실이 상당히 일치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사실 현실에서 이와 같은 사례는 ‘조선 케이스’가 유일했다. 의례적 전형이 곧 ‘보편적’ 형태의 외교관계는 아니었음을 뜻한다. 조청관계 역시 ‘전형적 (조공) 관계’에 해당한다고 보는데, 이는 병자호란 이후 청이 요구한 ‘明朝舊例’를 조선이 충실히 이행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조선과 명‧청의 관계는 관념과 가장 합치된 형태의 의례로 전개된 ‘전형’ 혹은 ‘모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이 명이나 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보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신중하게 고려할 요소가 남아 있다. 의례가 아닌 면에서는 조명관계와 조청관계의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점이다. 조명관계는 의례적 부분이 관념적 지향과 상당 부분 일치했던 반면, 조청관계는 그러지 않았다. 청을 건설한 만주족이 한족의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조선 역시 사대의례의 이면에서 중화를 계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는 하지만 그 대상이 중화는 아닌, 이 같은 모순을 조선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떨까.
현대인들과 달리,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한국, 중국, 일본’으로 구성된 ‘동아시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라는 것 자체가 만들어진 개념이다. 페어뱅크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는 유럽과 같은 Interstate relations가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조공시스템’을 중심으로 구축된 ‘Chinese World Order’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이후 이 용어는 널리 통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지나치게 광범위한 시기를 대상으로 삼았고, 그 시간 동안 중원을 차지한 주인공은 다양했으며 무엇보다 수용자인 ‘주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중국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이 용어를 뒷받침할 실증적인 후속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 1990년대 중반 이후 ‘New Qing History’가 큰 호응을 얻으면서 청제국의 건설자로서 만주족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청조가 ‘漢化된 북방민족의 왕조’로서 명조를 계승한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는 추세이다. 신청사에 따르면 청조가 중국의 한 왕조였다기보다는 중국이 청 제국의 일부였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주장은 조선인들의 사고와 유사한 면이 있다.
조선인들은 ‘대청제국’이라는 거창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륙아시아라는 개념도 당대인들에게는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기존의 중국에 한정되지 않는 대국이라는 것은 분명하게 인지했다. 그보다 중요한 사실은 조선은 청나라를 ‘중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인들에게 중국은 중화문물의 적통을 이은 국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청나라는 여진인들이 건설한 ‘大國’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앞에서 언급한 개설서의 내용 일부를 언급하겠다. 본서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묶이는 이른바 ‘兩亂期’ 전후 조선시대 대외관계가 별도의 지면으로 정리되어 있다. 조선전기는 대명‧대일‧대여진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조선후기는 대청관계‧대일관계로 정리되어 있다. 류큐나 동남아시아 諸國, 조선후기의 대서양 관계는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조선전기의 ‘한중관계’는 조명관계이며, 여진과의 관계는 그와 결이 다른 북방민족사로서 서술되었다. 그에 반해, 조선후기의 한중관계는 조청관계이다. 즉, 조선과 명‧청의 관계가 한중관계사에 해당한다. 여기서 청나라를 건설한 만주족이, 북방민족으로 분류되던 여진족의 후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청나라의 다원적 종족성은 일단 차치한다. 그 개념 자체가 조선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편찬된 『존주휘편』에서도 “청나라 사람들은 바로 여진의 한 부족이다[淸人卽女眞之一部族也].” 라고 기술되었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한중관계사와 달리, 조선인들에게 명조와 청조는 전후의 계승관계에 놓인 중국왕조가 아니었다.

 

3. 국가와 국가의 관계

본 논문은 조청관계의 성립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조선과 후금의 ‘국교’를 중심으로 내용이 구성되어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조금관계를 맹약체제, 형제관계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최근 중국학계를 중심으로 준종번‧반번속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에 반해, 국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묘호란 이후 양국의 관계가 불완전 혹은 불안정한 ‘과도기’였다고 보는 데 있다. 특히 조청관계 수립의 계기인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를 ‘파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맹약체제는 맹약이 가진 의미나 그 규정력을 과도하게 해석한 인상이 없지 않다. 후금의 요구를 중심으로 한 맹약체제라면, 그 이후 맹약을 둘러싼 상이한 해석이나 갈등이 지속된 그러면서도 군사적 충돌로 비화되지 않은 이유를 납득하기 힘들다. 맹약에 대한 양국의 해석이 다름에도 양국관계를 ‘맹약체제’로 이해하는 것은 모순이다.
형제관계라는 개념도 재고되어야 한다. 이는 정묘호란 당시 후금 측에서 제안한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훗날 양국의 국서에는 ‘兄弟之國’, ‘兄弟之義’ 등의 말이 쓰였다. 아마도 정묘호란 자체가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굴복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에 형제관계라는 말을 널리 쓰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필자는 정묘호란 이전 선조~광해군대 조선과 여진‧후금의 관계를 자세히 다루면서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후금은 정묘호란 이전부터 줄곧 조선에 국교를 요구해왔다. 따라서 정묘호란 당시 조선이 굴복한 것이라기보다 ‘비로소’ 후금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좀 더 사실에 부합하는 설명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형제관계’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한 연구자가 없다는 것이다. 후금 측의 제안, 국서 안에 쓰인 표현을 근거로 삼은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후금 측의 제안을 조선이 실제로 받아들인 것인지, 또 국서 안의 표현이 수사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형제’라는 용어는 양국 관계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양국이 의도한 형제의 뜻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은 부모의 여러 자식이라는 의미로 형제를 사용했고, 후금은 형과 아우의 관계를 의도했다. 즉, 조선은 명조에 ‘아버지’라는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전제 하에, ‘그 자식들’이라는 의미로 형제라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대등한 관계를 암시하는 수사로 쓰였다. 반면, 후금은 실질적인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양국을 오간 국서를 검토해보면 후금에서 조선국왕을 弟라고 부른 경우는 단 2차례 있으며, 國書式이 정해진 1629년에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조선은 당연히 金國汗을 兄이라 부르지 않았다. 결국 관계상의 두 주체가 달리 생각한 형제라는 용어가 양국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최근 중국학계에서는 준종번, 반번속이라는 용어로 조선과 후금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는 철저히 후금의 관점을 쫓은 것일 뿐만 아니라,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조선은 애초 후금과 종번이라는 개념을 고려해본 적조차 없었다. 후금 역시 1629년 이후 양국관계에서 형이라 자처하지 않았다. 도리어 국서에는 조선국왕을 ‘殿下’로 지칭한 경우가 2차례 확인되는데, 조선의 국서에서는 그보다 격이 낮은 閣下를 1번 사용한 것이 확인될 뿐 전하라는 존칭은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결국 준종번‧반번속이라는 표현은 한중관계 자체를 종번관계로 이해하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리어 조금관계를 종번관계로 이해할 수 없음을 반증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조금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표현은 없을까. 아마도 국교라는 말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사료에서 양국관계를 상징하는 표현은 ‘隣國’이다. 말 그대로 ‘이웃나라’라는 뜻이다. 실제로 조선과 후금은 경계를 접한 인접국이었고, 애초부터 양국의 핵심적인 외교현안은 접경에서 비롯된 犯越 행위, 인물 쇄환 등이었다. 또한 양국이 주고받은 국서라는 것은 각 국의 군주가 서로 주고받은 공식문서로서 명‧청 황제에게 올린 表‧箋‧奏 등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조선은 일본에 대한 國書式을 준용하여 후금에 보낼 국서를 작성했다. 양국 모두 국서 안에서 스스로를 我國‧本國, 상대방을 貴國, 아울러 칭할 때는 兩國이라고 했으며 양국관계를 거론할 때는 인국이라고 했다. 그러니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뜻하는 국교라는 말 대신 ‘맹약’‧‘형제’‧‘종번’이라는 키워드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명과의 단절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금의 화친 요구에 동의했다. 이는 조금관계가 조명관계와 결을 달리함을 시사한다. 이 경우 조선이 모방할 수 있는 유일한 외교적 관계는 대일국교였다. 실제로 국서나 사절 파견에 있어서 조선은 대일국교를 모방했으며, 일본 사신은 접대해본 경험이 거의 없는 만큼 후금 사신 접대는 명 東江鎭 차관 즉, 唐差를 접대하는 규례를 쫓아서 金差를 접대했다. 이런 실질적인 요소를 감안하면 ‘종번’이라는 키워드는 병자호란 이후의 관계를 고려한 결과론적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조선과 후금의 10년에 걸친 관계가 형성된 배경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이는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의 변화라는 프레임보다 ‘여진에 대한 기미책’을 버리고 후금을 국가로 공식 인정한 것이야말로 관계상의 거대한 진전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조선은 국왕이 후금국의 汗과 집적 통교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천명했다. 이는 선조, 광해군 모두 마찬가지였다. 만포첨사‧회령부사, 잘해야 평안도 관찰사가 통교의 주체가 될 수 있었고 그나마 명의 이목을 피해서 이루어진 배후교섭‧비밀교섭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묘호란 이후의 조금관계는 국왕과 國汗이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하고 국서를 주고받는 정례적인 관계로 접어드는 추세였다. 조선 내부에서조차 이 같은 형태의 국교를 부정하지 않았다. 사료적 표현을 빌리자면 ‘對夷之道’에서 ‘隣國之道’로의 외교적 변화였다.
엄격히 말해서 병자호란은 이러한 틀을 벗어나 金國汗이 아닌 淸皇帝로 인정해달라는 일방적인 후금의 요구 때문에 발생했다. 홍타이지의 稱帝는 조선과의 국교를 재편하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조선에서 쌍수를 들고 이를 반길 리는 없었고 자연스럽게 국교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국교의 단절 이후에도 조선은 현실적인 힘의 열세를 인지하고 관계의 회복을 꾀하였다. 이를 위해서 후금의 우위를 일정 정도 인정하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내비쳤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아예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심산이었고, 남한산성에서 조선국왕의 출성항복과 척화신[三學士]의 압송을 관철시켰다. 삼전도에서의 항례와 그에 이은 정축조약으로 양국관계는 새롭게 출발했다.
새로운 국교는 대등한 관계가 아닌 군신의례에 입각한 것이었다. 10년 간 지속된 국교의 관성은 남아 있었다. 조선과 청측의 담당자들은 대부분 그대로였고, 여러 압박조항들이 존재했지만 정작 외교적 현안은 종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명을 노골적으로 부정할 것을 강요한 점, 소현세자‧봉림대군을 비롯한 질자를 데려간 점이다. 나머지는 이전부터 지속된 문제이거나 혹은 소소한 현안들이었다. 1644년 명이 멸망하고 청이 북경을 점령하게 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이후 조청관계는 철저히 사대의 틀 안에서 전개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국가와 국가의 관계였다는 점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4. 논문의 전체적인 구성

필자의 논문은 총 3장, 10개의 절, 33개의 소절로 구성된다. 이를 장절별로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장은 “對女眞 정책과 藩胡規例의 성립”이다. 1절은 “對女眞 정책 수립의 배경과 내용”으로 조선의 건국 이후 대여진 정책이 형성되는 과정과 실상을 검토하고(1소절), 16세기 말 건주여진의 누르하치가 通交를 요구해오면서 실행한 배후교섭의 의미를 살펴보았으며(2소절) 또 다른 여진 부족인 훌룬이 조선을 압박하면서 종래의 대여진 정책이 무력화되는 과정을 살폈다(3소절).
2절은 “對明 ‘虜情’ 보고와 明의 대응”으로 조선이 건주여진‧훌룬의 압박을 받아 명의 요동아문에 관련 내용을 보고하게 된 경위(1소절)와 명 요동아문과 조선의 상호작용(2소절), 명 조정의 개입과 그에 따른 여파(3소절)를 검토하였다.
3절은 “藩胡規例의 적용과 이원적 對女眞 정책”이다. 본 절에서는 조선이 건주여진과 훌룬 가운데, 훌룬과 먼저 화친하고 그들에게 종래의 대여진 정책과 유사한 형태의 통교 관계(藩胡規例)를 구축했음을 밝히고(1소절), 동일한 방식을 건주여진에 대해서도 적용했다는 사실을 논증했으며(2소절), 이러한 ‘이원적’ 교섭이 건주여진의 훌룬 병합으로 인해 종언을 고하게 되기까지의 과정(3소절)을 다루었다.
4절은 “對女眞 정책의 일원화와 藩胡規例의 형해화”이다. 본 절에서는 훌룬을 제압하고 세력을 비약적으로 신장한 건주여진이 명 변경 인근의 여허部를 공격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던 점(1소절)과 이러한 흐름에 공명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이 명의 중개기구라 할 수 있는 요동아문과 더욱 친밀해지면서 동시에 불신감이 고조되는 과정을 살폈으며(2소절), 조선이 후금의 건국 이후에도 이전의 對건주여진 관계와 다름 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적인 외교노선을 걸었고 이 때문에 조‧명의 공조관계는 처음부터 불안정했음을 논증했다(3소절).
2장은 “對明・對後金 二重外交의 전개”이다. 1절은 “明의 徵兵 요구와 對後金 배후교섭”이다. 본 절에서는 먼저 명이 對후금 협력을 요구하기까지의 배경 및 명 조정 내부에서 조선을 활용하겠다는 움직임을 살폈고(1소절), 이어서 조선 조정에서 촉발된 助兵 관련 논쟁의 실상을 5가지의 쟁점을 토대로 再考하였으며(2소절), 그 와중에도 조선이 후금과의 배후교섭을 유지하는 이중적인 자세를 보였다는 점을 논증했다(3소절).
2절은 “朝・明 연합군의 出兵과 對後金 비밀교섭”이다. 본 절에서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인 東路軍과 深河戰役에 대해서 살피되 出兵 당시 조선 조정의 내부 논의를 정밀하게 검토하고(1소절), 이 전투 당시 光海君이 내렸다는 密旨의 진위 및 실상에 대해서 종전에서 살피지 못한 지점과 사료들을 통해서 그것이 實在했음을 논증했으며(2소절), 전투 직후 후금에서 通交를 요구해오자 조선이 제한적으로 응하여 화친은 아니라도 대화의 창구가 열리게 되었음을 밝혔다(3소절).
3절은 “二重外交의 전개와 對後金 國書”이다. 본 절에서는 조선이 명‧후금과 동시에 벌인 이중외교를 검토하고 그것이 ‘중립외교’로 설명될 수 없음을 밝혔으며(1소절), 명에서 조선‧후금의 교섭을 알게 되자 조선이 명에 대해서는 변무외교, 후금과는 口頭 교섭을 벌이는 이중외교를 이어간 점을 검토하였고(2소절), 1621년 후금이 요동 일대를 점령하면서 이중외교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경위를 구체적으로 다루고(3소절), 광해군이 후금의 압박으로 인해 마침내 국왕 명의의 서신 즉, 國書를 발송했음을 살폈다(4소절).
3장은 “對後金 國交의 수립과 對淸 관계의 적용”이다. 1절은 “仁祖反正과 對後金 교섭의 단절”이다. 본 절에서는 먼저 仁祖反正 이후 조선이 대외정책으로 시행했다는 ‘親明排金 정책’의 실상을 살피고(1소절), 그것이 퇴조하게 된 경위와 방어전략의 변화를 검토했으며(2소절), 단절된 대후금 교섭의 복구가 필요하다고 인식하게 된 사실과 그 배경 등 조선의 타협적인 정치를 다루었다(3소절).
2절은 “丁卯胡亂과 國交의 定例化 논의 과정”이다. 본 절은 이 논문의 핵심이 되는 절이다. 먼저 후금의 침입과 조선의 대응을 살핌으로써 양국이 정묘호란 당시 서로 타협적인 자세로 화친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음을 밝혔고(1소절), 맹약‧화친‧국교를 3단계로 구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하에 講和와 盟約의 실상을 재고했으며(2소절), 화친의 성립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하는지 후금군의 철수와 各守封疆의 관철이라는 측면에서 논증했다(3소절). 또한 4소절에서는 조선이 후금국의 칸을 부른 ‘國汗’이라는 명칭의 기원, 양국의 國書, 사신의 파견, 사신의 접대, 開市, 歲幣의 6가지 항목으로 양국의 국교가 정례되어가는 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했다.
3절은 “丙子胡亂과 對淸 ‘君臣儀禮’의 수용”이다. 본 절은 병자호란의 발발 원인으로 홍타이지의 稱帝에 따른 종래의 정례화 된 國交가 유지될 수 없었던 점을 들었으며 이는 전쟁이 조선의 絶和에 의한 것이라는 기존의 평면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1소절). 아울러 병자호란 직전 후금이 아닌 청조와의 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보고 척화론의 이면에 숨겨진 타협적인 외교의 실상을 들여다보았다(2소절). 3소절은 본 절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조선이 청의 황제 홍타이지에게 보낸 7차의 국서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講和의 전체적인 흐름과 조선의 변화된 자세를 정밀하게 제시했다. 마지막으로 병자호란 이후 형성된 조선과 청의 국교가 소현세자 등의 인질, 피로인 쇄환, 명과의 전쟁에 대한 助兵 요구 등으로 인해 급속도로 체계화된 점, 1644년 명이 멸망한 뒤로 청의 압박이 수그러들면서 양국의 국교가 새로운 형태이지만 정상적인 궤도로 오르기 시작한 점을 살폈다(4소절).

 

5. 나가며

필자는 조선이 명 질서에서 이탈하여 청 질서로 편입된다는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탈피하여 조선인들의 당대적 컨텍스트에서 조청관계의 수립 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에 따라 정묘호란 이후의 조금관계를 과도기로, 병자호란 이후 조명관계를 대신한 조청관계라는 틀에도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선이 여진을 기미의 대상으로 치부하던 데서, 공식적인 통교의 대상 즉 하나의 국가로 인정한 것을 중대한 관계상의 진전으로 보았다. 조선과 후금의 국교는 통념에 비해 상당히 정제되어 가는 추세였고, 병자호란 이후의 정축약조 내용 역시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의 조청관계가 가지는 의미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주목하지 못한 조금관계를 국교라는 관점에서 조망함으로써 조청관계의 Genesis를 인과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조‧청 국교의 수립 과정은 조선이 대여진 변경정책을 대후금 국교로, 다시 대청국교로 전환하는 연속적이고 단계적인 과정이었다. 근 50년에 걸친 관계상의 변화는 조청관계를 조명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게 했다. 조선인들에게 명은 관념과 현실이 일치한 사대의 대상인 반면, 청은 사대 자체가 의례적인 영역에서 계승된 것과 달리 내면에서는 夷狄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유지했다. 사대의 예를 행하는 대상이지만, 청은 중화의 적통으로 인정되는 명의 계승자일 수 없었다. 조선은 오히려 스스로를 중화의 적통으로 여겼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조청관계를 국교라고 한 것은 양국의 관계가 대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국교라는 것이 반드시 ‘대등한 주권국’ 간의 관계에서만 적용되어야 하는 생각 자체가 근대적인 개념이다. 다만, ‘入版圖’한 정치주체와 外國으로 남은 정치주체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이를 구분하지 않고 ‘질서’라는 모호한 말만 사용할 경우, 조선의 대외관계라는 것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조선을 국제관계의 한 행위자로서 국가로 보고 청과의 관계를 ‘사대의 틀’ 안에서 조망해야 한다. 조선은 청과의 의례적 상하관계를 인정했고 또 사대의 틀 안에서 외교했지만 그들을 중국이 아닌 ‘他國’, ‘彼人’으로 여겼고 그 안에서 타자와 구분된 자의식을 가다듬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대청사대라는 정치적 현실과 대명의리라는 관념적 이상이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을 소개했다. 분량도 적지 않고, 잘 정돈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장에 비해 미비한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학위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앞으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필자의 한계를 극복하고, 실증적인 논문들을 통해서 부족한 연구를 보완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