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 사람이 칠하는 만 가지 색깔을 상상한다_정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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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3월(통권 15호)

[미디어 비평] 

온 세상 사람이 칠하는 만 가지 색깔을 상상한다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미디어팀, 『만인만색 역사공작단』, 서해문집, 2021.)

 

정대훈(현대사분과) 

어느 자리에 가서 역사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노라고 자기소개를 하면 이런 질문이 따라오는 경험, 아마 역사 연구자라면 십중팔구 한번쯤은 겪어보셨을 거다.

“설민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쩌다가 ‘역사’라고 하면 곧바로 ‘설민석’부터 따라 나오게 됐을까.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한 역사가들이 얼마나 많으며(어쩌면 그 이름들로 끝말잇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설민석이 획일화시켜버린 대중강연 시장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자면 밤도 꼬박 샐 수 있을 것 같은데(어딜 가서 무슨 강의를 하건 담당자는 왜 한결같이 설민석처럼 강의해달라고 하는 걸까)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역사’라고 하면 곧장 설민석부터 떠올리는 걸까.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꽤나 야속하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보면 이런 상황이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당신 입장이 이해가 갑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비전공자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자. 역사에 대해 막연하게 관심은 있는데 마땅히 어디부터 공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서점에 가도 어떤 책을 골라 들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마침 TV에 나오는 설민석이라는 사람이 유쾌하고 이해하기도 쉽게 역사 이야기를 풀어준다. 들어보니 아주 틀린 이야기 같지도 않고 꽤나 논리적이기도 하니 이보다 더 매력적인 콘텐츠가 또 어디에 있겠나. (여기서 “설민석”은 단지 설민석 개인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도 든다. 설민석이 사료를 들춰보고 논문을 쓰는 연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 거침없고 명쾌한 이야기가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과연 온전히 반영하고 있는지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알 도리가 없으니 내심 불안한 것이다. 그런 불안감을 갖고 살아가던 차에 직업적인 역사연구자를 만난다면 이렇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설민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질문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전히 당혹스럽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이유는 비전공자가 역사학계의 목소리를 직접 접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학술지에 게재되는 논문을 직접 찾아 읽는 것일텐데, 학계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논문을 어디서 구하는지조차 알기 어렵다. 서점에 가서 연구서를 찾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어지간한 열정이 아니고서야 ‘XXXX 연구’ 류의 딱딱한 제목에 몇 만원의 돈과 며칠의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보니 결과적으로는 역사학계의 꼴이 좀 우습게 됐다. 각종 매체에서는 ‘인문학’이니 ‘역사’니 하는 것들이 범람하지만 정작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는 그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개토왕비의 비문이 조작되었다거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의 토지가 대거 수탈되었다는 식의, 학계에서는 진작에 폐기된 이야기들이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다. (JTBC의 ‘벌거벗은 세계사’ 사태를 생각해보시라.) 그러다 보니 ‘역사’란 으레 ‘잘난 척을 위한 아재들의 넓고 얕은 지식 대잔치’ 내지는 ‘민족사의 웅장함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예비군 정훈교육과 별 다를 것 없는 이야기들’에 머무르곤 한다. 연구자들은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대중매체에 대한 불신이 더욱 깊어지고, 그래서 대중매체는 다시 학계와 멀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반복된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악순환 ㅠㅠ

그런 점에서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이하 만인만색) 미디어팀이 꾸려가는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이하 역사공작단)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역사학계의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인 만인만색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운동 과정에서 탄생한 연구자단체로 출판과 시민강좌 등 젊은 연구자들의 문제의식을 사회공동체와 공유하기 위한 여러 활동을 벌여왔다. 팟캐스트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이하 역사공작단)은 만인만색의 미디어팀이 꾸려가는 주요 활동 중 하나로,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2월 말 현재 380여 에피소드를 송출했고 에피소드당 2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여 현재 누적 조회수는 수백만에 달한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이 순간에도 수천 회씩 쑥쑥 올라가고 있다!) ‘역사학’이라는 비교적 좁은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기획에서 제작과 편집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연구자들 스스로 꾸려가고 있음을 생각하면 적지 않은 성과다.

역사공작단의 이러한 양적 성취는, 역사공작단의 내용이 학계의 연구성과에 기반하고 있다는 질적 측면 때문에 더 빛난다. 역사공작단은 개별 연구논문으로 제출된 연구성과를 각 시대 및 주제 전공자가 재가공하여 2~4시간 분량의 음성 콘텐츠로 가공하여 송출하기 때문에 학계의 연구성과를 학계 바깥의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유용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연구논문을 평균 2만 명 이상의 청자에게 직접 들려주는 셈이다.

논문 발표회에 이 정도 사람이 모였다고나 할까

이렇게 보면 역사공작단은 역사학계의 오랜 고민이었던,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어떻게 사회와 공유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각의 연구논문으로 파편화되어 있는 연구성과를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묶어내어, 이를 다른 시대 및 주제 전공자와 이야기하며 의미를 배가倍加하고, 그러한 연구성과들의 연구사적 의의 혹은 사회적 의미에 대해 학계 바깥으로 송출한 후, 댓글이나 라이브 방송을 통해 청중의 반응을 다시 확인하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었다.

역사공작단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한 『만인만색 역사공작단』이 갖는 의미 역시 그러한 맥락 위에서 평가받아야 한다. 책에 담긴 각각의 내용은 고조선의 멸망부터 박정희의 등장까지 한국사 전반에 걸쳐 있지만 이 책의 의의는 단지 광범위한 주제를 젊은 감각으로 쉽게 풀어냈다는 것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들은 그에 더하여 역사학이 사고를 확장하고 세상을 좀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있음을 보여주고자 노력하는 듯하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컨대 고조선의 멸망을 다룬 최슬기의 「흉노의 왼팔을 잘라라! 첫 왕조의 마지막 순간」은 나라의 명운을 걸고 한나라의 침공에 맞섰던 고조선이 전쟁 초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고 마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전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글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이 흉노를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였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즉, 당시의 동북아시아는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된 세계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는 이미 ‘한국사의 첫 왕조’부터 ‘한국만의 역사’가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트랜스내셔널 역사의 일부’였던 셈이고, ‘한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관점은 지금보다 공간적으로 더 확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위가야의 「교과서와 상식 너머의 가야 이야기」는 사실 고대국가의 성립에 관한 우리의 상식을 뒤집는다. 우리는 으레 부족국가니 연맹국가니 하는 것들이란 당연히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이행한다고 그에 ‘실패’했던 가야는 결국 ‘미완’에 그쳤던 존재였다고 인식하곤 했다. 하지만 이 글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은 결과론적인 해석 내지는 단선적 역사관에 불과할 뿐, 고대의 국가는 훨씬 더 다양한 양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즉 가야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뒤집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학이란 현재의 관점에서 결과를 정당화하는 학문이 아니라, 미처 현실화되지 못했던 여러 가능성들을 다시금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점에서 가야를 다룬 역사책을 보면 ‘미완의’란 수식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미완의 제국 가야’, ‘미완의 왕국 가야’ 등등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가야에 대한 상식 중 가장 보편적이면서 그 실상과는 가장 동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미완’이란 말은 곧 가야가 완성되지 못한 어떤 실체였음을 말한다. 이때 가야라는 나라가 이루었어야 할 완성이란 고대국가를 말한다. 가야와 같은 시기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완성됐지만, 가야는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지 못했기에 고대국가의 이전 단계에 머물렀으며, 이 때문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끼여 시달리다가 멸망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고대의 정치체가 당연히 지향해야 할 종착점으로 상정한 도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발상을 전환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즉 고대의 정치체가 고대국가로 전환하는 데는 다양한 형태의 과정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주는 사례가 가야 여러 나라가 걸어온 길이라는 것이다. 가야는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일 수도 있다. (…) (위가야, 「교과서와 상식 너머의 가야 이야기」, 42쪽.)

당연한 듯 보였던 상식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기경량의 「‘삼국통일’은 통일일까?」와 강진원의 「만들어진 실학」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 글은 그간 우리가 이미 자명한 진리로 알고 있었던 ‘삼국통일’이나 ‘실학’ 같은 개념조차도 역사학의 관점에서는 다시 해석할 여지가 얼마든지 더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역사학이란 옛날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학문인 동시에 당연한 듯 보이는 사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의문을 제기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발굴해내는 ‘사고의 방식’에 관한 학문이기도 하다.

발해사는 간단하게 ‘우리 민족의 역사’ 개념으로 편재하기에 곤란한 역사다. 그렇다고 해서 발해사가 결함이 있는 역사라는 뜻은 아니다. 이 세상이 또렷한 원색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듯, 역사에서도 여러 색이 겹치거나 혼합된 영역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것을 발해사가 가진 소중하고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발해는 고구려의 유산을 상당 부분 물려받았고, 그 영토의 일부는 한반도에 걸쳐 있었다. 또한 멸망 이후 많은 유민이 고려로 넘어와 한국사의 흐름에 합류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발해사를 한국사의 영역에서 다루는 것 자체는 가능하겠지만, 이 나라가 품고 있는 ‘비한국사적’ 요소들 역시 외면하거나 가치절하하지 말고, 공정하게 평가하며 조명해야 할 것이다. (기경량, 「’삼국통일’은 통일일까?」, 448~449쪽.)

임동현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임시정부 선거제도」는 임시정부의 선거제도를 논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게끔 한다. 임시정부의 수립은 3.1운동을 통해 수립된 임시정부가 표방했던 ‘민주주의’라는 것이 단지 선언적인 구호에 그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내내 몸소 실천해왔던 정치이념이었으며 독립운동 내부에도 다양한 정치적 노선들이 병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독립운동이란 단지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건국’을 1회적인 사건으로만 보고 ‘건국’의 시점이 언제인지를 묻는 것에만 매몰된 ‘건국절’ 논쟁이나 독립운동을 국가정통성에만 관계된 문제로 보곤 하는 법통성 논쟁 등에 대해서 역사학계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도 이 글을 답으로 제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의미를 발굴해내자면 아마도 책에 실린 열아홉 개의 꼭지 모두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의미가 더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책은 그 책을 읽는 독자의 숫자만큼의 의미를 가지고, 이는 역사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이 책의 소재가 된 과거의 사실들은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넓게 보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독자들이 이 책에서 (저자가 의도한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캐내는 것이 이 책의 진짜 목적일 것이다.

이 책의 제목과, 저자들이 속한 단체의 이름과, 팟캐스트의 이름에, 공히 “만인만색”이라는 표현이 쓰인 것이 새삼 눈에 띈다. 나는 그 ‘만 가지 색깔’이 단지 저자와 연구자들만이 낼 수 있는 색깔이 아니리라 믿는다. 이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에 따라 각자의 의미를 뽑아내는 독자 역시 그 만 가지 색깔 중 하나의 주인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지금 역사학계가 세상을 향해 던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 놓인 자명한 사실과 상식을 넘어서, 더 많은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 역사학은 지금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어제의 그들에게서 찾아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라, 어제 그들의 모습을 담담히 바라본 뒤 오늘의 우리가 처한 현실과 나아갈 길을 생각해보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강진원, 「만들어진 실학」, 4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