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사를 말한다⑦] 조선후기 산림과 송정(松政) ②_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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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1년 1월(통권 13호)

[생태환경사를 말한다]

 

조선후기 산림과 송정(松政) 

 

노성룡(근대사분과)

이 글은 노성룡‧배재수, 2020, 「조선후기 송정의 전개과정과 특성」, <<아세아연구>> 181의 일부를 대폭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누가 송정을 담당했을까?

마을(村) 단위에서 봉산을 관리하는 것은 산지기(山直)와 감관(監官)이었다. 「제도연해송금사목」에 의하면 30리 이상의 산은 산지기 3명, 10리 이상은 2명, 10리 이하는 1명을 차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30리 이상의 산은 감관 1명을 30리 이하의 산은 1명의 감관이 여러 곳의 산을 감독하도록 했다. 산지기와 감관은 각종 잡역을 면제 받고 산을 순찰하는 임무만 전담하였다. 근무 연한의 경우 감관은 3년, 산지기는 연한이 없었다(「諸道沿海松禁事目」).

군현(郡縣) 단위에서 산지기와 감관을 감독하고 읍내 봉산을 관리하는 역할은 군현의 경우는 수령, 진(鎭)의 경우는 만호가 담당했다. 수령은 매월 한 번씩 향소(鄕所)로 하여금 산을 순찰하도록 하고 때때로 직접 조사하여 향소가 제대로 보고했는지 점검해야 했다. 만호는 수령과 달리 산을 순찰하는 일을 산지기에 맡길 수 없기 때문에 직접 월 3~4회 순찰해야 했다(「諸道沿海松禁事目」).

도(道) 단위에서 수령과 만호를 감독하는 역할은 수사와 감사(監司)가 담당했다. 수사와 감사의 역할 분담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영과정에서 감독 권한을 놓고 양자가 대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1762년 황해도 수사 이일제가 봉산 관리 문제로 장연부(長淵府) 부사(府使)를 파직하였는데 이에 대해 황해감사 조영진이 “수사가 군무(軍務) 외는 수령을 마음대로 파면할 수 없다”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송정이 곧 군무”이며 송정의 권한이 수사에게 있어야 감독이 가능하다면서 황해수사의 조치를 승인하고 황해감사를 처벌했다(『비변사등록』 1752년 3월 22일).

이처럼 수령의 인사권은 원칙적으로 감사가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송정에 관해서만 수사의 인사권이 인정되었다. 삼남지역의 561곳 봉산 중 수영 속읍에 설치 된 봉산이 432곳(77%)에 달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군현단위에서 감독권의 대부분을 수사가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만기요람』). 게다가 봉산의 목적이 전선용 선재를 공급하는데 있었고, 봉산의 대부분이 해안가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송정을 수사가 감독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었다. 실제로 송정을 운영해가는 과정에서 “송정은 오로지 각 도의 수사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간다(『비변사등록』 1769년 6월 1일).

<그림 1> 『만기요람(萬機要覽)』. 『만기요람』 송정 편에는 19세기 당시 전체 봉산의 숫자와 저명한 봉산지를 기록하고 있다(출처 : 한민족대백과사전).

 

수영의 경직된 송정 운영 

하지만 군정기구인 수영이 송정을 담당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우선 안보적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송정 운영은 유연성이 부족했으며, 강압적으로 집행되었다. 1732년 경상도에 흉년이 들어서 7개 읍의 백성들이 몰래 봉산의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은 일이 발생했는데, 통제사 정주승은 송정 관리의 죄를 물어 해당 읍의 수령들을 파면했다. 이에 대해 경상감사 조현명은 주례(周禮)의 예를 들며 “흉년에 백성들의 생명에 관계되는 것은 금지하는 법을 넘나듦이 있더라도 융통성을 보여야 한다.”라며 수령의 구휼행정에 관계된 부분은 참작해 달라고 조정에 상소했다(『비변사등록』 1732년 5월 19일).

송정의 운영을 둘러싸고 안보상의 이유로 원칙을 고수하는 수영과 민정을 고려하여 유연성을 요구하는 감영이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대립에 대해 조선왕조는 최종적으로 수영의 조치가 옳다고 판단했다. 이는 조선왕조 역시 송정에 대해서만큼은 유연성보다 원칙에 입각한 집행을 원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송정을 수영의 재원으로 사용하다

수영에게 있어 송정은 안보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수영은 전토세(田土稅)와 뇌물을 받을 권한이 없어 본래 가난한 진영이다. 게다가 영문(營門)인 까닭에 장교의 숫자가 많은데도 부모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는 살림살이를 달리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오로지 소나무가 잘 자라는 산이 있을 뿐이다”라는 정약전의 말처럼 송정은 수영의 주요한 재원이었다(정약전, 2002). 특히 균역법 이후 배정된 예산의 감소와 어염세의 균역청 이전으로 인해 수영의 재정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재원으로서 송정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졌다(송기중, 2016).

<그림 2> 조선 후기 송정의 폐단을 기록한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출처 : 동아일보)

그러나 송정에 대한 수영의 권한이 강화되고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질수록 송정운영에 폐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수영이 송정을 빌미로 백성들을 수탈하는 상황이 다수 발생했다. 수영은 백성들의 집, 관 등을 만들 때마다 “공산(公山)의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억지를 부리며 백성들에게 속전을 징수했다. 한 집안에 징수하는 양이 많은 것은 수백 수천 냥에 이르기도 했기 때문에 재산을 탕진하고 유리걸식하는 자가 10명에 3, 4명은 되었다고 한다. 정약전은 이와 같은 상황을 한탄하며 송정을 감영에 맡기고 수영에서 간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정약전, 2002). 위와 같은 무리한 속전징수는 속전을 갚기 위해 소나무 도벌을 부추기는 악순환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정약용은 이 악순환이 계속 될 경우 “상앙 같은 엄한 법관이 다스린다 하더라도 결코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며 우려하기도 했다(정약용, 2018).

또한 전선의 수리를 핑계로 소나무를 필요 이상으로 베어 착복하는 일도 발생했다. 1800년 충청수사 이현택은 전선 수리에 필요한 소나무 213그루를 베어 사용한 후 남은 47그루를 내다 팔아 착복했다. 물론 소나무 대금은 이현택이 개인적으로 사용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수영 장교의 봉급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수영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확충한다는 의미가 강했다(『비변사등록』, 1800년 8월 16일). 그런 점에서 볼 때 수영의 비위는 수사의 개인 품성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

수영의 강압적 운용과 재정부족에서 나오는 각종 폐단으로 인해 백성들은 “소나무 보기를 독충과 전염병처럼 여겨서 몰래 없애고 비밀리에 베어내서 반드시 제거”(정약전, 2002)할 정도로 송정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 군사력이 강한 것이나 먹을 것이 풍족한 것보다 급하다…신뢰를 얻지 못하는 명령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경우는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정약전의 말처럼 지나치게 강압적인 금제정책이 도리어 백성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송정 운영의 비효율성을 증대시켰던 것이다(정약전, 2002). 이로 인해 조선왕조의 금송(禁松) 명령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산림자원을 도벌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그 결과 1910년대 남한지역 산림의 79%가 치수발생지와 무립목지였을 정도로 조선후기 산림황폐화가 심화되었다(배재수와 김은숙, 2019).

 

송정에 대한 부정적 평가, 하지만 송정의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왕조의 송정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특히 강압적 금제 중심의 정책을 전개하여 조선사회의 많은 반발과 비효율성을 초래했다는 점이 큰 비판을 받았다. 물론 조선후기 산림황폐화의 심각성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평가는 결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서양의 ‘근대적’, ‘과학적’ 산림정책 및 제도와 비교할 경우 그 후진성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당시 산림황폐화의 모든 책임을 송정으로 대표되는 조선왕조의 산림정책과 제도의 실패로만 돌릴 수 있을까?

케네스 포메란츠의 연구에 의하면 산림황폐화는 당시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생한 인구증가 현상에 대해 토지 이용의 집약화라는 방향으로 대응하면서 전세계 산림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산림지가 경작지로 대체되었으며 연료채취로 인해 산림자원은 급속도로 황폐화되었다. 산림황폐화는 농업생산력의 약화를 초래했고 생태적 위기를 더욱 부추겼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서양 역시 산림황폐화로 인한 심각한 생태적 위기에 직면했다. 서양이 이와 같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적’, ‘과학적’ 산림정책과 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케네스 포메란츠는 석탄이라는 새로운 에너지원의 등장과 막대한 자원을 공급해주는 신대륙의 ‘발견’으로 인해 이와 같은 생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케네스 포메란츠, 2016).

그렇다면 조선왕조의 ‘후진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은 어땠을까?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대체 에너지원을 민간에 보급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식민지기내내 산림자원이 주요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강력한 치산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기 조선 산림의 지속성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전국적 산림통계를 최초로 알 수 있는 1927년의 입목축적(立木蓄積)을 보면 275,461,262㎥에 달했지만, 1943년에 이르면 212,238,273㎥로 급격히 감소했다(63,222,989㎥ 감소). 자연상태에 있는 입목의 연간생장량을 4%로 가정한다면 그대로 놔둘 때 1943년까지 150,353,704㎥가 증가할 수 있었던 산림이 도리어 감소한 것이다(배재수‧김태현, 2020). 조선총독부 스스로 자신들의 산림정책을 ‘녹화주의’에 입각한 훌륭한 정책이라고 극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의 관점에서 볼 때 식민지기는 조선왕조와 마찬가지로 산림자원의 지속성이 악화되는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유럽과 조선총독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 에너지원의 발견 및 보급, 혹은 새로운 자원을 수급할 수 있는 신대륙이 없는 이상 정책과 제도만으로는 원칙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 역시 당시 사회구조, 기술발전, 지리적 조건 등을 고려했을 때 정책이나 제도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지점이 분명 존재했다. 따라서 산림황폐화의 원인으로서 송정의 한계를 지적하기보다는 산림황폐화가 그렇게 심각하게 진행되는 와중에도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정책과 제도를 고수했는지를 밝히는 일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금제 중심의 송정이 가진 한계와 비효율성을 지적해왔지만, 왜 조선왕조가 그러한 제도를 계속 고수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사실 금제 중심의 송정은 조선 내에서도 많은 비판이 존재했다. 우선 실학자들은 금제 중심의 송정을 비판하며 이를 완화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조정 내에서도 폐기된 봉산을 개방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으며, 수사를 대신하여 감사가 송정을 감독하도록 하는 제안도 존재했다. 특히 정조 같은 경우는 다양한 수요조절 정책을 통해 금제 중심의 정책적 흐름을 바꿔보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 송정은 산림정책이면서 동시에 군사정책의 성격이 강했다. 그건 소나무가 전선 제작의 재료라는 군사상의 특수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송정의 성격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군사적인 이유로 인해 좌절될 수밖에 없었으며, 금제 중심의 정책적 기조는 계속 유지‧강화되었다. 조선왕조가 송정을 군사정책의 연장으로 접근한 이상 가용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산림정책의 시각에서 송정을 바라보기보다 당시 송정이 가진 특수성을 고려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림 3> 1900년대 서울 북한산성 한북문(漢北門, 위)과 경상북도 팔공산(八公山) 동화사(桐華寺, 아래)의 산림 비교, 산림이용도가 높은 북한산의 산림은 심각하게 훼손된 반면 산림이용도가 낮은 동화사의 산림은 울창하다. 대체 연료가 보급되지 않는 한 사람들의 산림이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출처 : 조풍연, 1987).

송정이 한반도 임상구성에 미친 영향

송정은 한반도의 임상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소나무가 생장하는 적지(適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1910년 한반도 남부 산림의 53%가 소나무 단일수종으로 이뤄진 가장 큰 이유는 소나무의 공급을 왕조차원에서 관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봉산이 모두 한반도 남부에 분포하고 있었다는 점이 바로 이를 증명해준다.

산림이용을 둘러 싼 관습도 임상구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양난 이후 급증하는 민간수요를 무조건 억제할 수만은 없었던 조선왕조는 사양산의 경우 상목(上木)의 이용을 제한했지만 시초(柴草)에 대한 이용은 자유롭게 허용했다. 사이토 오토사쿠에 의하면 “현지민의 다수가 일정한 지역을 한정하지 않고 자유로이 임의로 시초를 채취해 왔던 것과 같은 관습”이 조선에 존재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림이용에 대한 일제의 관습조사 결과 역시 백성들이 자유롭게 송지(松枝), 시초 등을 채취하는 관행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강정원, 2018). 소나무는 건조하거나 지력이 낮은 곳에서 견디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비탈지고 산성화되고 암질의 자갈땅에서는 낙엽 활엽 수종과의 생존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지만, 지력이 좋고 토양습도가 알맞은 곳에서는 도리어 밀린다(이어령 외, 2005). 위와 같은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자유로운 시초 채취 관행은 지력을 낮추고 토양을 건조하게 만듦으로써 소나무가 우점(優占)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4> 『조선임야분포도』에 나타난 임상 구분. 소나무(赤松)의 분포는 특히 한반도 남부에서 압도적으로 나타난다(출처 : 배재수와 김은숙, 2019).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만기요람』

장학근, 1986, 「朝鮮時代 海防史 硏究」,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조풍연, 1987,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생활과 풍속(속)』, 서문당

법제처, 1993,『經國大典』, 한국법제연구원.

「諸道沿海松禁事目」(1684), 2002, 『조선후기 산림정책사』, 임업연구원.

「諸道松禁事目」(1788), 2002, 『조선후기 산림정책사』, 임업연구원.

정약전, 「松政私議」(안대회, 2002, “정약전의 ‘송정사의(松政私議)’.” 『문헌과 해석』 20).

최주희, 2004, 「17~18세기 왕실정부의 연료 소비 증대와 땔감 조달 방식의 변화」, 『역사와현실』, 94.

이어령 외, 2005, 『소나무』, 종이나라.

송기중, 「朝鮮後期 水軍制度의 運營과 變化」, 충남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케네스 포메란츠, 2016, 『대분기』, 에코리브르.

강정원, 2018, 「일제의 조선 산림 관습조사와 그 성격」, 『한국민족문화』 68.

정약용, 다산연구회 역주, 2018, 『역주 목민심서 5』, 창비.

배재수와 김은숙, 2019, 「1910년 한반도 산림의 이해: 조선임야분포도의 수치화를 중심으로」, 『한국산림과학회지』, 108(3).

배재수‧김태현, 2020, 「일제강점기 조선의 목재수급과 산림 : 빈약한 산림자원, 과도한 목재생산」, 미발표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