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사를 말한다⑥] 조선후기 산림과 송정(松政) ①_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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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12월(통권 12호)

[생태환경사를 말한다]

 

조선후기 산림과 송정(松政) ①

 

노성룡(근대사분과)

이 글은 노성룡‧배재수, 2020, 「조선후기 송정의 전개과정과 특성」, <<아세아연구>> 181의 일부를 대폭수정‧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일본인이 바라본 한반도의 산림

1910년 통감부 농상공부 산림국 산림기사로 조선으로 부임한 사이토 오토사쿠(齋藤音作)는 “조선의 관민유 임야의 배치 및 임상(林相)의 개요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임적조사(林籍調査)를 실시했다. 임적조사는 “천고혼돈(千古混沌)이었던 조선 임야의 외모(外貌) 및 내정(內情) 모두 처음으로 그 개요를 명확하게 할 수 있었고 치산정책의 획책 및 실행 상에 많은 편리를 얻게” 해준 “귀중한 사업”(배재수와 김은숙, 2019)이라는 사이토의 자화자찬과 달리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임상의 개요를 알려주는 가장 앞선 자료라는 점에서 현재까지 이보다 신뢰성 있는 자료를 찾기 어렵다.

<그림 1> <<조선임야분포도>>(1910). 초록색이 성림지, 붉은색이 치수발생지, 노란색이 무립목지를 나타낸다(출처 : 연합뉴스).

그렇다면 사이토가 바라봤던 한반도 산림의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한반도 산림은 성림지(成林地)가 32%에 불과하고, 치수발생지(稚樹發生地, 42%) 및 무립목지(無立木地, 26%)가 68%에 육박할 정도로 황폐해진 상태였다. 둘째, 전체 산림의 30%, 남한 지역으로만 한정할 경우 53%의 산림이 소나무 단일수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한반도 산림은 황폐화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자연적으로 난대성 수종이 생장하기 좋은 조건인 한반도 남부에서 침엽수인 소나무가 왜 이렇게 많이 분포하고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 후기 산림정책, 즉 송정(松政)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소나무였을까?

조선왕조가 산림정책을 송정이라고 명칭 한 것은 산림정책에 있어 소나무 관리가 그만큼 핵심이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왕조는 왜 소나무 관리에 그렇게 심혈을 기울였을까? 이를 위해서는 조선왕조 초기의 대외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래 육지로는 명(明), 바다로는 왜(倭)의 안보적 위협에 대응하면서 성장해갔다. 육지로부터의 위협은 태종 무렵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음으로써 해결되었지만 왜에 대한 해양방어(海方)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남아 있었다(장학근, 1986).

<그림 2> <<각선도본(各船圖本)>>에 나오는 판옥선(출처 : 한민족대백과사전).

조선왕조는 해양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일찍부터 전선(戰船) 제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주로 소나무를 전선용 선재(船材)로서 사용했다. 1430년(세종 12년) 병조참의 박안신은 “그 재목은 반드시 소나무를 써야”한다고 주장했고, 나아가 “(선재용) 소나무는 100년을 자라야 배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세종실록>> 1430년 4월 13일). 이처럼 조선왕조는 전선용 선재로서 반드시 100년 이상 자란 소나무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왕조차원의 소나무 관리는 필수적이었다. 전선용 선재로 소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해안가에 곧게 많이 자라는 수종이었기 때문이다. 배는 해안가 또는 섬에서 제작해야 하고 선재는 곧고 굵은 대경재가 많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해안가에 대량으로 분포하고 곧게 자라는 수종은 소나무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기 산림정책 금산제도

전선 제작에 필요한 소나무를 관리하기 위해 조선왕조는 1448년(세종 30년) 연해(沿海)에 있는 300여 곳의 소나무가 잘 자라는 땅(宜松之地)을 금산(禁山)으로 설정했다(<<세종실록>> 1448년 8월 27일). 해안지역의 산을 지정한 것은 선재조달-조선(造船)-전선배치라는 과정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였다. 금산을 관리하는 책임은 만호(萬戶)와 해운판관(海運判官)에 있었다(법제처, 1993). 이처럼 금산 관리자의 관품이 높지 않았고 구체적인 관리지침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효율적인 산림자원 관리체계를 형성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선초기에는 아직 산림자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분출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금산체제로도 충분히 관리가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그림3 > 오늘날 안면도의 소나무 숲. 안면도는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소나무 공급지였다(출처 : 굿모닝충청).

그러나 17세기 이후 양난(兩亂)을 거치면서 시작된 조선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산림자원의 관리체계에도 크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우선 양난 이후 지속되는 안보위기는 전선 확보와 안정적인 선재 공급의 중요성을 증가시켰다. 실제로 정조는 “나라의 대정(大政)은 전함과 조운선보다 더한 것이 없고 궁궐이나 관청의 재목은 오히려 두 번째에 속한다.”(<<비변사등록>> 1787년 12월 22일)라고 했을 만큼 전선용 선재의 확보는 국가의 중대사였다. 하지만 양난 이후 인구증가로 인한 연료용 목재(땔감)와 전후 복구를 위한 건축용 목재 수요가 증가하면서 산림자원을 둘러 싼 사회갈등 역시 격화되고 있었다. 그 결과 “솔밭이 모두 민둥민둥하게 되어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선재(船材)가 장차 반드시 아주 부족해 질 것”(<<비변사등록>> 1732년 3월 12일)이라는 보고가 나올 정도로 안정적인 선재 확보가 어려워졌다.

국가와 민간의 목재수요가 동시에 증가하는 상황에서 안정적인 국용목재 조달의 필요성은 커져갔지만, 기존의 금산체제로는 이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보다 강력한 통제·관리와 행정지침을 갖춘 새로운 산림자원 관리체계의 등장이 필요했다.

 

조선후기 송정의 등장

선재 확보를 위해 민간의 도벌을 막는 제도는 조선 초부터 존재했지만, 송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주요 관찬사료에서 송정이 등장하는 것은 숙종 이후였다. 왜냐하면 산림자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심화가 당대 모순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나라에는 대정이 있는데 송정이 그 중 하나다”라고 (「諸道松禁事目」) 표현했을 만큼 산림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인 송정을 국가의 주요한 정사(政事)로 생각했다.

 

금제정책 (1) – 국용선재(國用船材) 조달을 위한 봉산제도

송정의 핵심은 봉산제도였다. 조선왕조는 기존의 금산을 확대·개편하여 전국 600여 곳의 산을 봉산으로 지정하여 벌채를 금지했다(<<만기요람>>). 뿐만 아니라 봉산관리를 비롯한 송정의 구체적 행정지침을 담은 제도연해송금사목(諸道沿海松禁事目)을 반포하여 관리·감독체계의 강화를 도모했다. 이처럼 송정은 봉산을 정점으로 하는 산림체계의 수립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목재 공급지는 <표 1>에서 보이는 것처럼 크게 봉산과 사양산(私養山)으로 구분된다. 우선 봉산은 용도에 의해 크게 전선용재 조달지인 봉산과 송전, 관곽용재 조달지인 황장봉산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봉산의 91%가 전선용재 조달지였기 때문에 사실상 전선용재 공급지로서 기능했다. 「제도연해송금사목」에서도 봉산의 목적을 “오로지 전선의 제조에 쓰려고 한 것”이라고 한정했다(「諸道沿海松禁事目」).

<표 1> 목재 공급지 별 수요처

물론 왕실의 궁궐 건축을 위한 대경목이 필요할 때 봉산의 소나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른 용도로의 사용은 철저히 금지한 것 같다. 실제로 각 지방에서 관청건축재 조달을 목적으로 봉산을 이용할 수 있는지를 비변사에 문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비변사에서는 전선용재로 사용이 불가능한 풍락송 및 고사목만 이용할 수 있고, 가능한 사양산에서 조달할 것을 명령했다(<<비변사등록>> 1688년 10월 24일).

 

금제정책 (2) 민간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금송(禁松)

이처럼 봉산의 역할이 전선용재 공급지로 한정되면서 국가 및 민간의 목재수요는 사양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사양산은 민간이 금양(禁養)하는 산이었지만, “사양산은 봉산에 비하여 경중이 비록 다르나 삼금(三禁) 안에 있다”(「諸道松禁事目」)는 정조의 말처럼 조선왕조의 산림관리체계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왕조는 민간이 소나무를 벌채할 때도 마음대로 벌채하지 말고 반드시 관아에서 공문을 받도록 하는 등의 강력한 금송 정책을 전개했다.

조선왕조가 사양산을 철저히 관리하고자 했던 이유는 국가 및 민간의 수요가 사양산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봉산을 금벌코자 하면 마땅히 사양산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라는 영조의 말처럼 사양산이 황폐화 된다면 목재수요에 대한 압력이 봉산으로 이동하여 봉산을 정점으로 한 송정의 근간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비변사등록』 1784년 12월 29일). 실제로 송정의 운영이 어려워진 19세기에 이르러 “사양산에 소나무가 없어…더 이상 손을 댈 데가 없어졌다. 하는 수 없이 몇 곳 남은 봉산으로 지게를 메고 떼 지어 몰려들지 않을 수 없는”(정약전, 2002)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기 때문에 사양산에 대한 조선왕조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다.

<그림 4> 신윤복의 송정아회(松亭雅會)에 나타난 조선시대 소나무 모습(출처 : 문화콘텐츠닷컴).

 

수요조절정책 (1) 국가수요를 줄여라! 절용법(節用法)

조선왕조는 산림자원 소비를 절약하려는 수요조절정책도 시행했다. 이는 정조가 특히 관심을 기울였던 정책으로, 크게 연료재수요조절과 선재수요조절로 구분할 수 있다. 우선 조선왕조에서 사용하는 연료재 소비를 줄이기 위해 정조는 이와 관련한 메뉴얼을 만들어 정해진 소비량 이상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권장했다(최주희, 2014). 즉 조선왕조의 연료재 소비량을 정량화 하는 방법으로 수요를 조절하고자 한 것이다.

다음으로 선재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선박의 건조 및 수리에 필요한 소나무 수량을 줄이거나 연한을 늘리는 절용법을 1767년(영조 43년)부터 크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선박 건조에는 대송(大松) 103주(株), 수리는 대송 40주를 사용했는데, 통제사 이국주에 따르면 이는 지나치게 많이 사용되는 것이었다. 이에 영의정 김치인 역시 “한정이 있는 소나무로 한정이 없는 용도에 쓰고 있으니 어찌 잇대서 쓸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라며 과다한 선재사용을 비판했다. 따라서 건조는 대송 80주를 기준으로 삼은 다음 수사(水使)로 하여금 필요한 재목을 실제대로 계산하고, 만일 초과할 경우 처벌하도록 상주했다(<<비변사등록>> 1767년 2월 16일). 이외에도 나무못(木釘) 대신 철못(鐵釘)을 사용하여 수리 연한을 36개월에서 84개월로 늘리는 방안이 도입되기도 했다(『정조실록』 1787년 4월 2일). 하지만 현장에서 절용법은 잘 지켜지지 못했다. 조운선 운영을 담당하는 조졸과 전선운영을 담당하는 수사가 여전히 배를 관행대로 건조‧수리했기 때문이다(<<비변사등록>> 1800년 5월 28일; 1800년 8월 16일).

 

수요조절정책 (2) 전선을 조운선으로 활용하는 통용법(通用法)

절용법에도 불구하고 목재수급이 개선되지 않자 조선왕조는 선재용 수요를 줄이기 위해 전선을 조운선으로 활용하는 통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통용법은 오래 사용하지 않은 전선의 부패를 방지하고 선재 소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를 수요조절 정책의 핵심적 사안으로 생각한 정조는 비변사에 구체적 실행방안을 논의하도록 했다(<<비변사등록>> 1798년 11월 30일; 1798년 11월 30일).

<그림 5> <<각선도본>>에 나오는 전선(좌)과 조운선(우), 노(櫓)와 삼판(杉板)의 숫자, 저판(底板)의 형태 등에서 전선과 조운선은 차이가 존재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통용법이 해안방어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전선을 조운선으로 사용할 경우 선체를 축소시켜야했는데, 이럴 경우 병기의 적재가 제한되고 화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컸다. 또한 조운기간과 수군훈련 기간이 모두 3~8월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안보공백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층루 등 갑판 위의 여러 구조물을 조운선으로 운영할 때 떼어냈다가 전선으로 운영할 때 다시 붙이는 등의 작업을 반복해야 했기 때문에 불편할 뿐만 아니라 배가 상할 가능성도 있었다(송기중 2016, 216).

위와 같은 군사상의 문제로 인해 통용법 방안을 마련해야 할 담당자들은 매우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우선 통용법의 실무를 담당해야 할 각도 수사들은 통용법 방안에 대한 회답을 회피하거나 통용이 매우 불편하다는 의견을 전달하는 등 통용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비변사 역시 수사들의 회피를 핑계로 “여러 사정과 크고 작은 절목은 모두 급히 억측으로 결정해서는 안 되니, 우선 통제사와 수사의 논보를 기다려 다시 제도에 관문해서 그 이해를 분명히 한 후 자세히 상확(商確)하여 품처”해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고 있을 뿐이었다(<<비변사등록>> 1798년 12월 30일).

이에 대해 정조는 “요즘 재상들에 대한 일은 대체로 해괴하다 … 묘당(廟堂)이 일개 수사에 대해 믿고 의지함이 이와 같단 말인가?”라고 비판하면서 계속 비변사를 압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변사가 수사들의 회답을 핑계로 통용법 논의를 지연시키자 다음과 같이 대신들에게 일갈하기도 했다.

“비록 백번 수사에게 따지고 감사에게 묻더라도 하나로 지적해 재처(裁處)할 자는 묘당인데 묘당이 양쪽 끝을 쥐고 그 중간을 쓰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결말이 나겠는가? 오늘 연석에서 하교하려고 했는데 마침 날이 저물어서 우선 그만두었다. 통영의 새 수사가 제갈공명이나 충무공이 아닌데 다시 논보하게 하더라도 신기(新奇)한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일을 처리하면서 신중히 하는 것이 비록 좋기는 하나 오래 끌어안고 있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비변사등록>> 1798년 12월 30일)

정조의 정력적인 추진에도 불구하고 군사상의 이유로 인해 정조 재위기간 결국 통용법은 시행되지 못했으며, 그의 사후 이와 관련한 논의는 당분간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통용법은 헌종 때 다시 논의되었는데, 비변사와 삼남의 수사들에게 통용법에 대해 문의한 결과 대부분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전선과 조운선의 용도와 운용하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병용이 어려우며 게다가 전선을 조운선으로 사용할 경우 전쟁에 대처가 어렵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비변사등록>> 1840년 6월 17일; 1841년 5월 29일). 이처럼 통용법이 안보상의 이유로 인해 좌절되면서 수요조절정책은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고, 그 결과 금제정책만이 유일한 정책수단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