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학사반 세미나 <<최남선 연구>>(류시현, 2009)_박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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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11월(통권 11호)

[연구반 탐방] 

 

한국근현대사학사반 세미나

<<최남선 연구>>(류시현, 2009)

 

박진서(근대사분과)

 

일시 : 2020년 10월 17일(토) 15:00~17:30

장소 : 한국역사연구회 회의실

 

COVID-19로 어수선했던 여름을 뒤로하고 10월 11일 정부가 전국 사회적 거리두기를 1단계로 완화하였다. 이에 발맞춰 10월 17일 연구회 산하 한국근현대사학사반에서는 오랜만에 오프라인 세미나를 가졌다. 필자는 현재 한국근현대사학사반 소속이 아니지만 웹진에 실릴 탐방기 작성을 위해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감염 확산 상황이 엄중하기 때문에 세미나 시작에 앞서 발열 체크를 했고 회의실 내에서도 마스크를 낀 상태로 간격을 두고 앉았다. 개인적으로 올해 들어 오프라인 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방역수칙에 따라 세미나에 참석해보니 COVID-19로 인해 달라진 시대상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근현대사학사반은 한국 근현대 역사학의 기원과 전개를 두루 살피는 데에 기본적인 목표를 두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한국 근현대 문화사상 전반에 대한 이해로 확장하려는 연구자들이 꾸린 연구반이다. 이러한 관심과 취지에 걸맞게 전번의 세미나에서는 <<한국 근대 문화사상사 연구>>(이지원, 2007)를 읽었고, 이번의 <<최남선 연구>>에 이어서 다음 세미나의 대상도서로는 신채호를 다룬 <<근대지식과 역사의 발견>>(김수자, 2017)이 예정되어 있다.

이번 세미나에는 연구반의 반장과 총무를 각각 맡고 계신 박종린, 위가야 선생님을 포함한 총 6분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분들의 면면을 보니 고대사에서부터 근대사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 그 중에서도 특히 고대사 전공자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 돋보였다. 언뜻 한국‘근현대’사학사반이라고 하여 으레 근현대사 전공자분들이 많을 것이라 섣불리 짐작했는데, 외려 고대사 전공자분들이 가장 큰 비중이었다. (공교롭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하신 분들이 하필 대부분 근대사 전공자분들이었다.) 주지하듯 한국 역사학의 핵심과제 중 하나는 ‘식민사관’의 분석과 극복이고, 고대사는 그 최전선에 위치한다. 연구반 내 고대사 전공자분들의 약진에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자리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미나는 반장인 박종린 선생님의 사회로, 미리 지정된 발제자들이 선정도서인 <<최남선 연구>>의 내용을 요약‧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정빈 선생님은 서론과 1부를 맡아 초창기 최남선이 펼쳤던 출판과 번역활동과 아울러 당시 최남선이 ‘조선’에 대해 가졌던 관심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어서 노영구 선생님은 2부와 3부를 맡아 1910~20년대 근대적인 방법 위에서 ‘조선학’의 가능성을 타진한 최남선의 연구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가야 선생님이 4부와 5부, 결론을 맡아 1930년대 이후 최남선의 ‘조선학’ 연구의 굴절 과정과 해방 이후 ‘친일지식인’으로서 최남선의 행보를 살펴보았다.

이어진 토의에서는 좁게는 단행본 <<최남선 연구>>에 관한 논의, 넓게는 최남선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 사학사 주요 인물들의 계보에 관한 논의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오고갔다.

가장 먼저 이른바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책’이 갖는 특징들이 <<최남선 연구>>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는 평가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의 면모는 변화하기 마련이므로 인물의 생애를 종합하면 그 양상이 복합적일 수밖에 없으며 심지어 때로는 모순적이다. 그런데 이를 하나의 책을 엮어내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정합성과 통일성이 있기 마련인데, 여기에서 일정한 긴장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최남선의 경우 워낙 많은 저작을 남겼고, 그 사상의 궤적이 일견 상충되는 면이 다소 있다고 보았다. 이에 연구자가 인물의 대표 저작을 선정하여 심도있게 분석하는 방식이 거론되었는데, 아울러 인물의 행적을 부조적으로 재구성할 우려도 언급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대상 인물에 갖는 개인적 ‘애정’이 어떻게 투영되는지도 중요한 고려대상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최남선과 같은 친일지식인의 경우, 이들의 생애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떠한 평가를 내릴지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의 태도가 단연 핵심적인 관건이 된다는 데에는 좌중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어서 새삼 최남선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한국사 인식의 뼈대란 결국 이 시기 최남선이 이미 구축해놓은 얼개가 확장되고 보완된 것이며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는 곧 이를 구체화하고 세밀화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근대 역사학이 여전히 최남선의 자장 안에 있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대체로는 공감하는 바였으나, 반드시 여기에는 엄밀한 사실 관계 확인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이를 위해서는 최남선이 남긴 수많은 저작들을 모아 전집 형태로 정본화하고 최남선 이전의 한국사 통사 체계와 최남선이 제시한 통사 체계를 엄격하게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해방 이후 최남선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논의도 나왔다. 해방 후 최남선은 대학에 진입하지 않고 해군전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등에서만 활동했다. 아마 친일 문제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 최남선의 경력과 연배를 감안하면 오히려 훨씬 요직에 어울리지 대학교수는 걸맞지 않다는 반론도 있었다. 당시 대학교수의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봤을 때 오히려 이병도의 활동을 예외적인 사례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주국 건국 이후 최남선의 만주 경험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최남선의 활동은 개인의 지향을 드러내면서도 나아가 당시 지식인을 비롯한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 인식을 일정 반영한다. 이들에게 만주는 무장투쟁 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가 만주국 건국 이후 제국의 이상인 오족협화가 체현되는 공간, 기회의 땅으로 탈바꿈하였다. 이 시기 만주국에서는 대아시아주의에 동화되어 ‘2등국민’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처했던 조선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남선의 ‘불함’ 또한 반드시 조선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현실의 대동아공영에 비춰봤을 때 조선에서 일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감으로써 이론의 정합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해방 이후 한국 내 만주관의 추이도 언급되었다. 50년대까지는 친일 문제가 민감했으므로 만주를 언급하지 않고 쉬쉬했는데, 60-70년대 들어서는 만주의 기억이 다시 소환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뿌리라든지, 최동‧문정창‧안호상 등의 활동 같은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최남선의 ‘조선학’을 둘러싼 가장 핵심적인 쟁점인 보편과 특수의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최남선이 그리는 궤적을 살펴봤을 때 초창기 ‘조선’이라는 특수를 지향했다가 이윽고 문명으로서의 보편을 좇아 친일로 돌아서고, 해방을 기점으로 민족을 표방하는 특수로 다시 선회한다. 그런데 주목할 점이 최남선이 보편에 관심을 두던 시기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백남운 또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듯 백남운 또한 조선사를 역사적 보편법칙에 따라 재구성하고자 한다. 여기서 최남선과 백남운이 공통적으로 표방하는 ‘보편’이 서로 다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최남선의 보편은 근대문명인 데 비해, 백남운의 보편은 역사전개 상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한편, <<최남선 연구>>에서는 시종일관 ‘조선적’이 특수이고 근대문명이 보편이라는 도식을 견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도식에도 다소 의문이 제기되었다. 보편과 특수의 구분과 실상에 대해서는 당대의 시각과 현재의 관점, 그리고 연구 대상으로서의 인물과 연구자 본인의 소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남선 연구>>에서는 오로지 최남선의 사상이 그리는 궤적에만 집중했다는 아쉬움도 이야기되었다. 최남선을 그의 생애 전후의 다른 인물과 비교하면서 분석했다면 담론의 역사적 지형 위에서 최남선의 위치를 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최남선의 역사학에 대한 사학사적 평가가 누락되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예컨대 최남선에 대한 연구 중 가장 이른 것에 해당하는 이기백의 경우 자신만의 한국사 틀을 수립하면서 실증성과 과학성을 최우선에 두었다. 그는 민족에 속성을 부여해 유구성을 찾는 것은 종교나 신앙의 차원이지 과학이 아니라며 민족의 고유한 성격을 전제하는 입장들을 배격하였다. 그리하여 낭가사상을 주장했던 신채호와 민족성론을 제기했던 이광수, 불함문화론을 주창한 최남선까지 모두 이기백의 비판의 대상이 된다. 새로운 역사학을 모색했던 60-70년대 이기백의 신민족주의는 보편성과 과학성, 국제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그 기준에 따르면 최남선의 역사학은 비과학적인 것이었다. <<최남선 연구>>에서는 최남선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민족의 고유성론에서 단군은 단연 핵심이 된다. 그리하여 단군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되었다. 식민지기 백남운은 단군신화를 부정하고 고조선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단군은 고구려 이후 창조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해방 이후 특히 1952년 이후 백남운의 글로 추정되는 <<조선역사>>에서는 단군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보이고 1957년 이후에는 단군신화의 역사성을 인정한다. 이를 원시공동체사회와 고대사회의 중간과정 과도기로 이해하고 고조선을 노예제 국가, 삼국을 봉건국가로 맞춰서 북한의 내재적발전론을 구성함으로써 북한의 자주성 강조에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북한의 민족주의 역사학으로 한층 선회한 것이다. 그리하여 단군과 김일성을 연결지어 민족의 시조, 공화국의 시조로 나란히 두게 된다. 백남운에 비해 신채호의 경우에는 단군을 대단히 긍정하여 이를 포함하여 시대구분을 따로 할 정도였다. 사실 고조선에 대한 논의는 이미 조선후기부터 있었는데, 이것이 20세기 초까지 이어지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신채호였다. 다만 여기서 유의할 점이 조선후기 단군에 관한 논의는 봉건적 왕조라는 규정성 안에서 이뤄진 것이었지, 아직 근대적 민족의 기원에 대한 논의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20세기 전반 대종교의 탄생은 이러한 이행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에 20세기 전반에 오고갔던 단군 논의의 기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향후 어떠한 계보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문제 또한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토의가 거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 <<최남선 연구>>가 최남선이 사용한 용어와 개념의 역사성에 다소 소홀하지 않았나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를테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국가, 민족, 문명, 문화 등은 원래의 원어가 있는 근대의 번역어이다. 또한 현재도 사용되는 사회과학 용어이기도 하다. 원래의 원어, 최남선의 번역어, 그리고 현대어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불일치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최남선이 견지한 ‘조선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 시각과 방법론’에 대해서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설명되지 않은 인상을 받았는데, 이것이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아서 이후 최남선의 선회가 갖는 의미가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최남선 조선학의 내용이 불분명했기 때문에 최남선의 친일의 의미가 평면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이날 <<최남선 연구>>에 대한 논의는 책의 안팎과 시대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이뤄졌다. 소속 연구자분들끼리 개인적인 친분도 있어서인지 농담과 웃음도 곁들어지면서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책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고 제기되었던 비판은 날카로웠다. 참가자분들 모두가 각자의 연구분야에서 이미 입지를 다지신 분들이라서 최남선을 둘러싼 쟁점에 대한 논의에서도 그 폭과 깊이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미처 몰랐던 내용을 알아갈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동시에 필자가 최남선과 그를 둘러싼 문화사상적 지형에 밝지 못한 탓에 세미나에서 오고갔던 값진 이야기들을 제대로 담지 못하지 않았나하는 우려도 있다.

한국의 역사학계에 몸담고 있는 연구자라면 전공을 불문하고 한국의 근현대사학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연구회 내 연구반에 관한 소개에서 한국근현대사학사연구반은 특정 시대 분과로 분류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한국의 역사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필자로서도 사학사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이번 탐방기 작성을 계기로 새로운 자극을 얻게 되었다.

COVID-19와 관련하여 벌써부터 ‘뉴 노멀’이 운운되고 비대면 화상 세미나가 급속도로 자리잡고 있다. 방역당국이 경계해왔던 동절기에 접어들고 있는데,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어 훗날 이날의 오프라인 세미나를 막간의 요행이었다고 기억하는 일이 없기를 모쪼록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