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성찰 사이에서_강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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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10월(통권 10호)

[서평]

 

비판과 성찰 사이에서 

(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 기획,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뉴라이트 역사학의 반일종족주의론’ 비판』, 푸른역사, 2020)

 

강재구(경희대 사학과) 

 

 

뉴라이트 역사학에 대한 종합적 비판

부제 ‘뉴라이트 역사학의 반일종족주의론 비판’이 알려주듯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는 『반일 종족주의』(이하 『반일』)와 뉴라이트 역사학을 비판하는 책이다. 19개 주제에 걸쳐 18명의 저자가 참여한 이 책은 『반일』을 전방위적으로 비판한다. 역사학, 의사학, 법학 등 다양한 전공을 가진 연구자들의 참여를 통해 식민지 근대화, 토지조사사업과 식량수탈,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청구권 협정, 독도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지난해 『반일』 출간 이후 나온 비판서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 책처럼 다양한 주제를 한 권에 담은 책은 없었다. 2019년 12월 출간된 ‘정혜경 외, 『반反대를 론論하다 –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는 강제동원을 중심으로, 2020년 2월 출간된 ‘강성현,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는 일본군‘위안부’를 중심으로 『반일』을 비판했다. 2020년 7월에는 다양한 주제에서 비판을 시도한 ‘전강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이 출간되었으나, 토지조사사업, 식량 수탈, 청구권,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을 다룬다. 따라서 다양성과 폭넓음을 고려할 때 이 책은 『반일』과 뉴라이트에 대한 본격적인 ‘종합적 비판서’라 할 수 있다.

구성과 내용: 구체적 비판과 자기성찰

이 책의 글들은 명시적인 분류나 체계 없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에는 각 글들이 나름의 역할을 맡고 있다. 여기서는 19개 장을 역할과 주제에 따라 분류하여 간단히 정리한다. 먼저 총론과 도입부다. 이영훈과 『반일』 필진들의 지적 궤적과 정치성을 논하는 이철우의 글(「자기 부정의 역사서술-반일 종족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의 말놀이」)과 전반적인 뉴라이트 역사관과 그 특징을 설명ㆍ비판하는 박한용의 글(「뉴라이트의 기괴한 역사인식」)은 뉴라이트 역사학의 배경과 맥락을 제시하면서 총론의 역할을 맡고 있다.

3~5번째로 제시되는 글은 일종의 도입부다. 세 번째로 나오는 전재호의 글(「민족주의와 반일 종족주의」)은 『반일』의 핵심 개념인 ‘종족주의’를 비판한다. 『반일』의 ‘종족주의’ 개념이 학술적 의미와 괴리되었다는 비판이다. ‘ethnicity’의 번역어인 종족은, 그것을 ‘야만성’으로 활용한 『반일』과 달리 중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네 번째로 나오는 홍종욱의 글(「일본제국주의 식민 통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은 ‘식민 통치’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짐으로써 뉴라이트의 식민지 인식을 비판한다. 홍종욱은 식민 통치가 비록 비식민화의 모습을 보이며 합리성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식민지 조선인은 본질적으로 일본인과 차별받았으며, “지배의 합리성은 지배가 위협받지 않는 한에서만 가동”되었다고 지적한다(67쪽). 나아가 홍종욱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특히 민중을 대하는 『반일』의 시각은 흡사 식민자의 시선을 방불케 하는, 위로부터의 눈길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고 비판한다(69쪽). 다섯 번째인 황상익의 글(「식민지 근대화론의 통계지표의 허구」)은 『반일』에서 가장 자주 활용되는 논증 방식인 통계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황상익은 식민지 조선의 의사 1인당 환자 수 감소라는 통계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들의 건강관리는 실질적으로 전통의사에 의해 수행되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 파악해야 할 통계는 전체 의료인 1인당 인구다. 하지만 이 수치는 1914년 전체 의료인 1인당 환자수 2,427명에서 1943년 3,613명으로 훨씬 악화되었다.

『반일』의 개념, 식민통치의 본질, 통계의 허구성 등을 지적한 뒤에는 세부 주제별 비판이 이루어진다. 『반일』의 고종론에 대해서는 강성은(「고종, 그리고 일제 강압 속의 조약들」), 청구권협정에 대해서는 김창록(대법원 ‘강제동원 판결’ 공격은 문제투성이)과 조시현(「청구권협정과 ‘글로벌 스탠더드’」), 식량수탈, 조선 공업화에 대해서는 이송순(「쌀을 팔아 다른 소비를 늘렸을 것이라고?」)과 정태헌(조선 공업화는 한반도 경제에 무엇을 남겼나), 전시체제기 특별지원병과 일본군 ‘위안부’는 김상규(「조선인 병력 동원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강성현(「일본군‘위안부’가 돈 잘 버는 ‘매춘부’였다고?」), 독도문제는 허영란(「독도를 역사적 현실로서 이해하기」)이 각각 비판하고 있다.

『반일』이 다루지 않은 지점들도 비판한다. 박찬승은 교육 차별을(「한마디로 ‘교육 억제’ 정책이었다」), 황상익은 일제의 전염병 관리 문제와 도립병원의 일본인 중심 운영을 비판했다(「도립의원 늘었다고 조선인 의료 혜택도 커졌을까」). 이 두 글은 식민지 근대화의 수혜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또한 변은진은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다(「왜 항일 독립운동을 언급하지 않는가」). 변은진은 ‘반일’이라는 화두를 던지는 뉴라이트 역사학이 식민지 조선인의 반일의식과 저항, 항일 독립운동 서술을 배제함을 비판했다. 또, 『반일』이 한국 종족주의를 ‘장기지속의 샤머니즘’과 연결시키면서도, 그것이 근대 전체주의적 성격으로 변화하는 데 있어 전시체제기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영향을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세부 주제별 비판에서 드러나는 장점은 구체성이다. 저자들은 『반일』 필진들이 신뢰하는 무기인 통계와 수치를 활용하여 비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몇몇을 소개한다. 이송순은 김낙년의 식량 ‘수출’론을 비판한다. 김낙년은 식민지 조선이 일본에 식량을 수출했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의 1인당 쌀 소비는 감소하지만 농민들이 “비싼 쌀을 팔아서 값이 싼 잡곡으로 바꾸어 소비”했으며, 쌀을 판 대금으로 다른 소비나 저축이 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반일』, 50쪽). 즉, 쌀 ‘수출’이 오히려 농민의 소득 증가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송순은 농민들의 1인당 쌀 소비량뿐만 아니라 잡곡 소비량 역시 2.03석(1915~1919)에서 1.64석(1930~1936)으로 감소했으며, “일제시기 어떠한 자료도 농민들의 삶의 수준이 향상되고 가난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16쪽)

박찬승 역시 세부적인 수치를 통해 식민지 근대화를 비판한다. 그는 보통학교 1면 1교제 실시 이후에도 1931년 기준 조선인 아동 취학률은 19.9%로 재조선 일본인 99%와 큰 차이가 있었으며, 중등교육에서도 조선인은 1,239명당 학생 1명, 재조선 일본인은 39명당 학생 1명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고등교육 역시 1931년 기준 조선인은 인구 1만 3,322명당 1명, 재조선 일본인은 275명당 1명의 큰 차이를 보였다. 박찬승은 이를 통해 “총독부의 교육정책은 한마디로 ‘교육 억제’ 정책”이었음을 지적했다(137쪽). 강성현은 일본군‘위안부’가 고수익 직종이었다며, 당시 문옥주 할머니의 수입이 2만 6,551엔이고 현재 가치로 약 8억 3,000만 원이라는 이영훈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문옥주가 돈을 번 버마는 1945년 6월 기준 물가지수가 도쿄의 200배였으며, 종전까지 1,800배의 인플레가 있었다고 한다(도쿄는 1.5배). 이를 통해 계산하면, 문옥주 할머니가 번 2만 560엔은 당시 도쿄에서 102엔의 가치에 불과하다. 강성현은 “경제사가인 이영훈이 전시 하이퍼인플레 맥락과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 없”으며, “그는 자신이 정해놓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일본 극우파의 의도적 선별과 왜곡 수법을 실증주의 외양으로 단순 활용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172쪽).

마지막 3개의 글은 과제와 전망, 그리고 맺음말로 기능한다. 김정인과 김헌주는 『반일』에 대한 비판을 넘어, 앞으로의 과제와 전망을 제시한다. 여기서 역사학계는 자기성찰을 시도한다. 김정인은 교과서를 둘러싼 뉴라이트와 역사학계의 논쟁과 과제를 정리했다(「교과서와 역사 사이」). 그에 따르면 뉴라이트의 주장에 대한 역사학계의 비판은 늘 “그래서 한국인은?”이라는 주체의 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221쪽). 하지만 한편으로 역사학계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사학계는 한국인이 수탈당한 것만은 아니며 능동적으로 대응했다는 것, ‘한국인’이라는 주체에만 집착하는 것의 한계 등을 인식했다. 하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러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만을 대상으로 ‘강박적 비판’을 하고 있다. 문제는 역사학의 이런 성찰적 접근이 교과서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경제정책 전반이 여전히 수탈과 침탈로만 서술되고 있다. 김정인은 “이제 교과서에 실리면서 대중적 상식이 되어버린 식민지 수탈론은 『반일 종족주의』의 비판 대상이기도 하지만, 역사학의 성찰과 그에 기반한 연구성과와도 엇박자를 보이고 있다”며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교과서에 반영해야하는 과제를 제시한다(224쪽).

나아가 김헌주는 역사학계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반일 종족주의 사태’와 한국사 연구의 탈식민 과제」). 그는 책에서 사용된 용어, 그리고 그 수사적 사용 사례들을 통해 『반일』을 ‘선전물’로 규정한 후, 그들의 선동성이 “말뚝 신화론자들의 거울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232쪽). 또한 『반일』논리의 자가당착을 비판한다. 『반일』의 표적인 ‘반일 종족주의’가 그들의 영웅 이승만ㆍ박정희 대통령 시기에 절정에 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되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집요하리만치 이어진 이승만의 반일 독립운동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근대문명 세력’인 이승만은 왜 일본 어민을 살상하면서까지 독도에 집착했는가”라는 홍종욱의 비판과도 연결되는 것으로(63-64쪽), 『반일』 논리의 허술한 기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아가 김헌주는 『반일』이 한국사 연구자들을 ‘반일 종족주의’로 비판하면서도 그 연구성과를 적극 수용하는 것, ‘위안부’에 대해 “피해의 맥락을 폭력적으로 소거”한 시선을 비판한다.(238쪽) 김헌주는 『반일』을 무시하거나, 수탈론을 소환하는 것으로 대응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극단적인 반일 신화와 인종주의적인 자민족 혐오는 동전의 양면”이므로(240쪽), 탈식민을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으로 트랜스내셔널 역사학, 성소수자를 비롯한 마이너리티에 관한 역사, 생태환경사등을 제시하며, 새로운 문제의식을 통해 “식민주의에 내재된 근대/전근대, 문명/야만, 발전/정체라는 인식론을 극복할 수 있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243쪽).

이 책은 『반일』진영을 규정하는 서승의 글로 마무리된다(「일제와 한몸인 《반일 종족주의》 진영」). 서승은 “구구절절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찬양하고 우리 겨레를 거짓말과 사기가 몸에 밴 구제불능의 무지몽매한 ‘종족’으로 매도”하는 『반일』 진영은 일본 제국주의와 한몸이라고 비판한다(255쪽). 나아가 그는 일제의 지배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그 유산속에서 성장한 『반일』 진영을 ‘친일 레짐(Regime)’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쉬운 지점들

아쉬운 점도 있다. 먼저 다루어지지 않은 주제다. 앞서 이 책의 장점이 폭넓은 필진에서 기인하는 주제의 다양성에 있다고 서술한바 있다. 하지만 강제동원에 관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현재 일본과 쟁점이 되는 문제이기도 한 강제동원에 대해서는 김창록, 조시현의 글에서 다루고 있지만, 하지만 청구권 협정과 관련된 법적인 문제들에 한정된 서술이다. 즉 청구권 협정 문제에 선행되어야 할 지점으로서 강제동원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이는 『친일』이 강제동원과 관련해 「‘강제동원’의 신화」, 「과연 ‘강제노동’ㆍ‘노예노동’이었나?」, 「조선인 임금 차별의 허구성」의 3개 장을 할애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강제동원에 관해서는 ‘정혜경 외, 『반反대를 론論하다 –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가 있으나, 이 부분이 이 책에 포함되지 못한 것은 끝내 아쉽다.

가장 아쉬운 지점은 일관성이다. 일관된 관점이 책 전체를 관통하지 못하고 있다. 한 권의 책에 조금은 다른 경향성이 병존하는 느낌이다. 앞서 보았듯, 몇몇 글들에서는 식민지 시기에 대한 복합적이고 풍부한 이해를 교과서에 반영해야 하고, 나아가 탈식민을 위한 연구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기존 수탈론적 서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다. 그런데 다른 글들에서는 식민지 시기에 대한 다소 단정적이고 강한 서술들이 보인다. “일제의 조선 개발은 조선 땅 위에서 이루어진 개발이었음에도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고, 한국인에게는 전혀 그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39쪽)거나, “조선인은 ‘민도가 낮은 야만’의 민족이므로 이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은 당연한 것이었다”(117쪽), “이렇게 일제는 강점기 내내 최대의 보건의료 문제였던 피식민지인들의 전염병을 완전히 방치했다”(145쪽) 등의 서술이다. 식민지 근대화 혹은 식민지 발전에 대한 완전한 부정처럼 보이는 서술이다. 이러한 단정적인 서술들은 시대에 적극적으로 적응해나간 한국인, 피식민인을 두려워한 식민권력 등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상할 여지를 차단하는 것은 아닐까? 요컨대 “동요하고 고뇌하는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여러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홍종욱, 「3.1운동과 비식민화」,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 편,『3.1운동 100주년 총서 3 권력과 정치』, 휴머니스트, 311쪽).

이러한 단정적 서술이 나타난 원인은 상황의 심각성 때문일 것이다. 『반일』 곳곳에 드러나는 폭력적 역사인식, “아베도 감히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못”하는 지점까지 나아간 뉴라이트의 주장들(106쪽), 그리고 2개월 만에 10만부가 팔린 영향력 등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강한 비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탈과 방치, 폭력으로만 식민지시기를 설명하며 비판하는 것은 오히려 『반일』이 만든 경기장 위에서만 싸우는 것일 수 있다. 식민지 시기에 대한 역사학계의 풍부한 연구성과를 활용하여, 교과서와는 다른 이야기로 대중들을 설득시킬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반일』이 그토록 추앙하는, 식민지시기 형성된 근대가 ‘어떤 근대’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소한 아쉬움이 있다. 책의 구성이다. 앞서 설명했듯, 이 책은 독립된 19개의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독립된 글들은 나름의 기능과 역할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각 장들 간의 관계나 역할을 알 수는 없다. 그러다보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 전체 구성의 체계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다소 불친절한 인상이다. 이는 특히 “이해하기 쉬운 대중적인 글”을 표방한 책으로서 아쉬운 지점이다(7쪽). 글의 순서에서도 의문이 있다. 김창록, 조시현의 글은 책의 7번째와 15번째로 배치되어 있는데, 사실 두 글은 모두 청구권 협정에 관한 것이다. 왜 두 글의 위치를 나눈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한편 황상익은 이 책에 2개의 글을 썼는데, 두 글을 하나로 합쳤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두 글 모두 식민지시기 의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통계의 허구성을 잘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2권을 기대하며

최근 『반일』 저자들은 후속작으로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들이 계속해서 ‘역사전쟁’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출간되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시의성 있는, ‘의미 있는 반격’이다. 『반일』 저자들은 지속적으로 책을 출간하며 폭력적 역사인식을 꺼내들 것이다. 역사학계의 종합적인 반격도 다시 한 번 있어야한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의 2권을 기대하는 이유다. 1권에서 보여준 성찰과 비판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한, 묵직한 반격을 다시 한 번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