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답사기: 포항 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_박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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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9월(통권 9호)

 

금석문 답사기: 포항 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

 

 

박수진(고대사분과)

 

1. 포항 냉수리 신라비

모처럼 떠나는 휴가였다. 코스는 이랬다. 서울출발 → 경주 → 포항 → 울진 → 강릉 → 삼척. 명분은 경치가 그렇게 좋다는 7번 국도를 가본다는 것이었지만, 경주, 포항, 울진에서 직접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경주는 국립경주박물관, 포항은 냉수리비, 울진은 봉평비였다. 뭐 말이 휴가지 답사에 가까운 코스였다. 그래도 휴가는 휴가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왔다. 문제는 다음이었는데, 한국역사연구회 미디어출판위원장에게 전화가 왔다. 답사를 다녀왔으니, 답사기를 내 놓으라는 것이었다. 휴가기를 조금 쓰긴 했는데, 거기에 답사와 관련된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을 늘려서 써 달라는 것이었다. 있는 거 활용하는 건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은 아니지 않냐고 반문도 해왔다. 뭐, 아무튼 쓰기로 했다. 그로 처음부터 기억을 더듬어 가며 다시 글을 쓴다.

<그림 1> 태풍급 비바람이 불던 포항

경주 일정을 마치고 포항으로 향했다. 태풍급 비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그 와중에 경주에서 포항까지는 40분 남짓한 거리였다. 멀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다. 가는 길도 형산강 줄기를 따라 갔기 때문에 큰 언덕을 넘거나 산을 넘는 일도 없었다. 지천(支川)인 기계천, 또 그 기계천의 지천인 내단천을 따라가면 용천저수지가 나오고, 그곳에는 영일 냉수리 고분이 있었다. 용천저수지를 지나면 다시 신광천이라는 작은 개천이 나오는데, 그 물줄기를 따라 난 길을 가다보면 신광초등학교가 나온다. 다 온 것이다. 초등학교를 끼고 좌회전을 하면 신광면사무소가 나오는데 국보 제264호 <포항냉수리신라비(이하 냉수리비)>는 바로 그 앞에 비각(碑閣) 안에 있다. 돌아보면 계속 하천을 따라 온 셈이다. 그 사이 지형이 변했을 리 없기 때문에 1600여 년 전 신라 사람들도 하천을 따라 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때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곳 신광면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지역이 일찍부터 신라의 지배를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게 비바람을 해치며 도착한 <냉수리비>는 10년 전 쯤 와봤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니 이름이 바뀌었다. 본래 ‘영일’ 냉수리비였는데, 행정구역이 정비되면서 앞에 붙는 지역 명칭이 ‘포항’으로 바뀐 것이다. 그 사이 날씨도 바뀌어서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고 있었다.

<그림 2> 포항냉수리신라비

<냉수리비>에는 우리가 아는 유명한 인물이 등장한다. 지증왕이다. <냉수리비>에는 지증이 아니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나온다. 그럼 지도로갈문왕이 지증왕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기록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의 이름으로 지대로(智大路), 지도로(智度路), 지철로(智哲老) 세 개의 이름이 등장한다. 뜻이 아니라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겨 썼기 때문에 비슷한 음이 나는 여러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도로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에도 나오니 <냉수리비>의 지도로갈문왕은 지증왕인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갈문왕이다. <냉수리비>는 계미년(癸未年)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대개는 503년에 만들어 진 것으로 생각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모두 지증왕이 서기 500년에 즉위했다고 기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때 지도로는 ‘왕’이어야 했지만, 여기선 갈문왕이라는 생소한 지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자들에 따라서는 <냉수리비>가 503년보다 60년 앞선 43년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503년에 세워진 것이 맞지만, 여러 이유로 당시까지 왕이 못되고 갈문왕에 있었다고도 한다. 학자들에게 국보에 걸 맞는 연구 주제를 남겨둔 것이다.

<냉수리비>는 지도로갈문왕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당시 진이마촌이라고 불리던 이곳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재산 분쟁을 정리해 준 내용을 적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절거리라는 사람의 재산이었다. 그의 재산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최고 권력자와 고위관리들이 관여할 만큼 큰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니 죽고 나서 분쟁이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지도로갈문왕 이하 7명의 고위 관료들은 이전 두 왕들의 결정을 일종의 판례로 삼아 결정을 내렸다. 결정의 내용은 제아사노(弟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말추(末鄒)·사신지(斯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이었다[제아사노는 동생(弟)의 아들(兒) 사노(斯奴)일 수도 있다]. 결정 후에는 소를 잡아서 제사까지 지냈고, 그 판결 내용은 돌에 새겨 사람들이 보게 했다. 이 이 결정은 끝났다는 선언이었다.

<냉수리비>를 보고 밥을 먹기 위해 신광초등학교 앞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무엇이 당시 최고권력자들을 관여하게 했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한편 ‘과연 말추와 사신지는 납득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그럴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강력한 권력이 결정한 것을. 그들에게는 이 판결을 뒤집을 권력이 없었다. 아마도 그들은 이곳 어딘가에 누구나 볼 수 있게 세워 놓은 이 비석을 꼴도 보기 싫어 피해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본다. ‘지금은 논밭 밖에 없는 이곳까지 신라는 정말 열심히 통치했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리고 이런 작은 지역까지 열심히 통치하려는 자세가 훗날의 강한 신라를 만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림 3> 신광초등학교 앞의 모습. 아까의 비바람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그림 4> 역대급으로 맛있었던 식사. 사진으로 맛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다

이제 점심을 먹어야 했다. 배가 많이 고팠다. 신광초등학교 앞에 있는 조금은 허름한 식당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귀찮은 듯 우리를 받았지만, 받고 나서는 친절하게 우리를 ‘손님’으로 대해주었다. 된장찌개는 더 할 수 없이 맛있었고, 가짓수가 많지 않은 반찬 역시 모두 별미였다. 밥을 먹다보니 절거리의 재산 같은 것은 잠시 잊었다. ‘다음에도 이곳에 오면 여기서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다시 <냉수리비>를 찾았다. 차를 거기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뭔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10년, 아니 1,600년이 지나도 저 비는 이곳을 지키겠지.. 또 나 같이 사람들이 찾아오겠지..’ 이런 상념에 잠시 빠졌다. 나보다 더 오래 존재하며 후대에 더 많은 이야기들을 전해줄 말 없는 이 비석에게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시동을 걸었다. “안녕”

 

2. 울진 봉평 신라비

전날 숙소는 백암온천이었다. 조식을 먹고 짐을 챙겨서 바로 찾아간 곳은 <을진봉평신라비(이하 봉평비)>였다. 백암온천은 드나드는 곳이 모두 험했지만, 일단 바다 근처로 가니 대체로 평탄한 길이 나왔다. 경주에서 <냉수리비>를 갔을 때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쪽 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가기 어렵겠구나.’와 ‘신라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길을 이용했겠구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을 갔다. 그리고 ‘봉평신라비전시관(이하 전시관)’에 도착했다. 5년 정도 전에 갔었는데, 역시 그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번엔 내가 직접 운전을 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지형을 조금 더 신경 써서 봤다는 것이다.

전시관은 봉평해수욕장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해수욕장 쪽에서 전시관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비의 발견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주차를 하고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원 봉사하는 전시해설사가 나를 보고 놀란다. 그러면서 “사람이 잘 안 찾는 곳인데..”라고 말했다. 나는 이곳을 찾은 이유를 구구하게 설명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봉평비를 보고 싶어서였다. 그는 이후 나를 계속 따라 다녔다. 처음에는 설명을 하려고 따라다녔는데, 내가 전공을 이야기하자 다음에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따라다녔다. 친절하고 열의가 있는 분이었다.

전시관에 들어가자 <냉수리비>가 떠올랐다. <봉평비>와 <냉수리비>는 모두 국보였는데(<봉평비>는 국보 제242호이다), 하나는 비바람에 노출된 비각 안에 있고, 하나는 번듯한 전시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조명까지 홀로 받고 있으니 그 자태는 그야말로 당당하다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봉평비>의 내용과 판독문, 탁본은 이미 온라인으로도 볼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직접 찾아 간 것은 비의 크기와 글씨가 새겨진 정도 등을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림 5> 울진봉평신라비

<봉평비>는 법흥왕 11년(524년)에 세워진 비석이니 이미 1,500년 가까이 된 비석이었다. 여기에 법흥왕은 <냉수리비>의 자기 아버지가 그랬듯, 모즉지 매금왕이라는 어색한 칭호로 등장한다. 모즉지와 매금왕. 모즉지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책부원귀』라는 책에 모진(募秦)이라고 적혀있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역시 한자의 뜻이 아니라 불리던 이름의 음을 따서 이름을 표기했으니, 모진은 모즉지와 같다고 본다. 문제는 매금왕이다. 매금왕. <광개토왕비>와 <충주고구려비>에도 등장하는 단어 ‘매금’에 왕이 붙은 단어이다. 매금은 신라의 왕호 가운데 하나인 ‘마립간’으로 해석된다. 그러니 매금왕을 글자 그대로 풀면 ‘마립간왕’이 되고 의역하면 ‘왕왕’이 된다. 당연히 연구가 될만한 주제이다.

<봉평비> 매금왕으로 불리던 법흥왕과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 그리고 중요한 다른 신라의 핵심 인물들이 당시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男称只村), 갈시조촌(葛尸條村), 아대혜촌(阿大兮村) 등으로 불리던 이곳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 관련자를 처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장100대, 장60대.. 처벌의 내용들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노인법(奴人法)이라는 법도 등장한다. <봉평비>에는 바로 이 노인법에 따라 처리하라는 내용도 나온다. 21년 전 만들어진 <냉수리비>가 이 전 두 왕의 교(敎)를 바탕으로 판결을 내린 것을 생각해보면 법에 따라 처벌한다는 <봉평비>의 내용은 그 사이 신라 사회의 발전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보니 법흥왕은 이 비가 세워지기 4년 전인 520년 율령, 즉 법을 만들어 공표했고, 관등이라고 불리는 신하들의 위계를 정리했다. <봉평비>는 그 결과물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다.

‘법흥왕은 이곳을 와보기는 한 것일까?’ ‘이곳 사람들은 이 판결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봉평비>를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최소한 법흥왕과 그의 신료들은 이 판결로 이 지역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사건의 경위와 판결을 다룬, 그것도 판결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이름까지 넣은 비를 만들어 세웠을 것이다. 기록이 없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지역의 반란 소식 같은 것은 찾을 수 없으니, 당시의 판결이 최소한 이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에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법흥왕은 4년 후인 528년 불교를 공인한다. 이후 그는 성스러운 법흥대왕(聖法興大王)으로 불린다.

다시 나와서 이곳에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이 수습되고, 보고 된 후, 사람들이 모여 판결하고, 판결이 집행되고, 비를 만들고 세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장100대라는 큰 형벌을 당하다 죽는 사람도 혹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 비는 그런 수많은 상상의 영역을 담고 있다. 한참을 이곳에 머물렀다.

전시해설사는 나에게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 봤는데, <봉평비>의 내용보다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북한산비>에 있었던 김정희의 ‘낙서’에 관심을 가졌다. 전시관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한국사에 유명한 여러 비석들을 같은 크기로 만들어 놓은 정원 같은 곳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 큰돈을 쓴 것이 아쉽다고 했다. 다 모아두긴 했지만 잘 만든 것 같지도 않고, 사람들이 찾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도 동감을 하며 공원 한 바퀴를 훌쩍 돌았다. <광개토왕비>의 모조품만은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 6> 비석을 복각하여 모아둔 공원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고 정말 휴가를 즐기기 위해 나왔다. 그때 한 가족이 이곳을 찾았다. 부모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자녀 둘로 구성된 4인 가족이었다. 갑자기 ‘이곳에 초등학생이 재밌어할 전시 내용이 있었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부디 이곳에서 역사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기’를 기원했다.

차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릉으로 가는 7번국도의 길은 아름다웠다. 신라인들도 이 길을 따라 하슬라로 불리던 강릉으로 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전쟁을 하러,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누군가는 그곳을 통치하기 위해 이 길을 갔을 것이다. 그렇게 가던 그들도 이 아름다움을 느꼈을까? 나처럼 가다가 중간중간 멈추고 풍경을 마음에 담았을까? 군인으로 차출되어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던 한 젊은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는 저 넓고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그리고 신라의 통치를 증명하던 저 당당한 비석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답도 할 수 없는 물음이 강릉으로 향하는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림 7> 7번국도 어딘가에서 바라본 바다

 

<그림 8> 비가 개고, 햇살이 비추고 있다.(7번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