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일본 조선대학교 강성은 님④>남북한 그리고 조선족 학자와 교류하다_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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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9월(통권 9호)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

<일본 조선대학교 강성은 님④>남북한 그리고 조선족 학자와 교류하다

 

홍종욱(근대사분과)

한역연 웹진 <역사랑> 창간 기획으로 코리언 디아스포라 역사학자 인터뷰를 연재한다. 면담자 홍종욱은 연구과제 ‘북한 역사학의 성립과 전개’의 일환으로 재일 조선인 및 중국 조선족 역사학자에 대한 구술 조사를 벌였다. 구술은 북한 역사학에 초점을 맞추지만, 동아시아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삶과 학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8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 2018S1A5A8026779)

 

구술자: 강성은(康成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연구고문)

면담자: 홍종욱(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장문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면담일: 2020.1.6. / 면담장소: 히토쓰바시대학 한국학연구센터

녹취: 류기현(서울대 국사학과), 이상현(히토쓰바시대학 언어사회연구과) / 정리: 홍종욱

 

<일본을 찾은 문일평의 손자, 문병우 선생>

면담자: 알고 계시겠지만, 2002년부터 한중일 학자가 역사책을 공동 집필하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처음 나온 게 《미래를 여는 역사》(2006), 그 다음으로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2012)를 냈고 지금 세 번째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세 번째 책 준비할 때부터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그 모임에 선생님이나 다른 조선대학교 선생님이 오시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구술자: 그런 모임이 일본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래를 여는 역사》를 보면 서술이 병렬식으로 되어있죠. 일본에서는 이렇게, 중국에서는 이렇고, 한국에서는 이렇다, 결론은 안 내고. 그러니까 결론 내기 힘든 게지요.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면담자: 네, 그런 평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결과로 나온 책도 중요하지만, 세 나라에서 온 연구자 열 몇 명이 자주 만나 얘기를 많이 나누는 그 집필 과정이 좋더라고요. 그리고 중국 같은 경우는 사회과학원 분들이 주로 나오시는데, 거기에 타이완 분이 한 분 옵저버로 옵니다. 중국 측에서 양해를 해 준 결과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재일조선인 연구자도 참가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구술자: 일본에서 하는 ‘비교사·비교역사교육연구회’라고 아십니까? 거기에 내가 오래 했습니다. 자국사하고 세계사를 같이 보는 관점을 중시하는 곳인데, 나도 세계사 속에서 조선사 이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거기 공부하러 갔습니다. 또 아무래도 역사연구 하는 사람이 역사 교육을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 교원이기 때문에 거기 가서 해보니까 굉장히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언제였든가? 도쿄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교육 심포지움을 했지요. 두 번째, 세 번째 심포지움인가? 그때 공화국에서 두 명이 오셨어요. 참가하게 된 경위를 말하자면, 첫 번째 심포지움 때(1984년) 한국에서 서강대학교의 전해종 선생 등 몇 분이 참가했어요. 재미있는 건 중국, 베트남, 타이완 의견이 좀 다릅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온 사람들은 상당히 공식적인 견해가 많고, 타이완은 좀 다르고. 그런데 의견이 나왔어요. 왜 공화국이 참가 못 하는가? 나도 그거 주장했고요. 그래서 모임을 이끌던 니시카와 마사오(西川正雄) 선생, 도쿄대학에서 현대 도이칠란트 연구하는 선생이 북을 초청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총련 통해서 초청을 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총련 사회과학자협회 부회장 겸 조선신보사 편집국장 하던 돌아가셨는데 오재두 선생하고 둘이서 총련 중앙 통해서 이런 모임 있는데 공화국에 대표 참가해 달라고 요청해서 둘이 왔어요.

면담자: 그게 몇 년입니까?

구술자: 그러니까 그것이 89년인가? 얼마 전에 ‘비교사·비교역사교육연구회’가 해산되었는데, 해산될 때 묶은 책이 있어요. 거기에 그 경위에 대해서 내가 쓴 글이 있습니다.

※康成銀, 「第2回東アジア歴史教育シンポジウムと南北学者の交流」, 比較史・比較歴史教育研究会編, 『「自国史と世界史」をめぐる国際対話 : 比較史・比較歴史教育研究会30年の軌跡』, ブイツーソリューション, 2015. (면담자)

구술자: 공화국에서 누가 왔는가 하면 그때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 전영률, 그리고 중세사 연구실 실장 문병우, 고려사 전문이죠, 그렇게 두 분이 오셨어요. 1주일 동안 같이 생활했습니다. 호텔에서 같이 자고. 남쪽에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장인 이원순 선생, 같은 서울대의 이민호 선생, 전주대학교의 이광주 선생이 오셨죠. 그런데 접촉을 안 해요. 고마바(駒場)에서 가까운 같은 호텔에서 숙박했는데, 만나지도 않고 서먹서먹한 분위기지요. 내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아침 식사할 때 멋대로 같이 만나게 했죠. 남쪽 이원순 선생한테 “같이 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했죠. 그 분들도 원하고 있어요.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분위기 알 수 있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 식사 때 내가 조직할 테니 같이 합시다.” 하고, 공화국 대표 두 분한테는 이야기 안 하고 보통 때 식사처럼 했죠. 아침에 내가 남쪽 사람들 부르니까 공화국 대표는 피할 수도 없고 같이 식사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뭐 1주일간 같이 행동했어요. 그때 사무국에서 북하고 남의 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싸움을 할 거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포지움에서 주로 교과서 문제를 했기 때문에 일본 사람의 발언에 대해서 북하고 남이 똑같은 내용으로서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친숙하게 지내게 됐죠. 그러니까 통일된 조선을 이 자리에서 보는 것 같다고 그렇게 말을 하는 일본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서 헤어질 때 북하고 남이 서로서로 울었어요. 나도 그거 옆에서 보면서 울고.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면담자: 일본이 남북 학자의 만남의 장이 되었군요.

구술자: 73년이었든가? 72년이지요. 다카마쓰즈카(高松塚) 고분이 발굴됐지요. 10월 달에 다카마쓰즈카 국제 심포지움을 했는데, 북에서 김석형 선생을 비롯해 한 열 명 가까운 대표단이 왔어요. 남에서는 김원룡 선생, 고고학 하는 서울대학 교수지요, 그 분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왔고. 그런데 한 번도 자리 같이 못했어요. 심포지움도 따로따로 했고. 기자회견도 따로따로 하고. 내가 그 이야기 쭉 듣고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슬펐어요. 그래서 나는 지금 말한 동아시아 역사교육 심포지움에서 북남이 오면 반드시 같이 있게 하겠다는 생각 가지고 있었어요. 같이 잘 됐죠. 눈물겨운 해후였습니다. 아마 북하고 남의 학자가 한 자리에서 같이 교류를 한 것은 그게 일본에서 처음 보는 경험입니다.

면담자: 북에서 오신 분이 전영률 선생님과 문병우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구술자: 재미난 얘기 내가 좀 할게요. 공화국 역사연구소 중세사연구실장 문병우 선생이 문일평 선생의 손자예요.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문병우 선생이, “내 문병우, 문일평의 손자입니다.”라고 합니다. 내가 너무 놀랐어요. 문병우 선생은 경기고등학교 졸업입니다. 그 분도 의용군으로서 월북했습니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배우고 역사연구소에 배치되었어요, 고려사 전문으로. 《조선전사》 중세사는 그 분이 기본적으로 썼고, 또 《조선병제사》라는 책이 있어요.

면담자: 일본에 문일평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셨을 테니 재미있었겠습니다.

<사진 1>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문병우 선생(왼쪽)과 전영률 선생(가운데). 1989년 일본 도쿄대학에서. (구술자 주)

구술자: 72년 김석형 선생 왔을 때도 조선사연구회, 조선학회가 환영 모임을 도쿄, 오사카에서 했습니다. 김석형 선생 오니까 굉장한 사람들 많이 찾아왔죠. 남쪽 사람도 김석형 선생 만나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답니다. 그리고 89년인가 도쿄대학에서 한 그때도 조선사연구회가 도쿄에서 환영 모임을 해줬어요. 학사회관 있죠? 거기서 식사 모임 했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문병우 선생이 문일평의 손자입니다.”라고 했더니, 하타다(旗田) 선생 비롯해서 모두 놀라 자빠졌어요. 문병우 선생이 일본에서 굉장히 인기 끌었어요. 남쪽 사람도 만나고 싶다 하고. 문병우 선생이 술 좋아하세요.

면담자: 문일평 선생님도 일기가 남아 있는데 읽어보면 매일 술입니다(웃음).

구술자: 아 그래요? 문병우 선생은 술 마시면 시조를 읊으세요. 기분 좋아서 시조를. 그런 자리에서 내가 많이 들었어요. 일본에 와서 사람들한테 굉장히 인기가 있었죠. 그 후 내가 공화국 갈 때마다 문병우 선생 만났는데 지금 돌아가셨어요. 문병우 선생 아버지가 신문 기자를 하셨든가, 교토대학 졸업입니다. 44년에 돌아가셨는데, 좀 진보적인 생각 가지고 있었던 게지요. 문병우 선생 그때 아직 학생이죠. 월북을 했어요. 리종현 선생도 의용군으로서 월북. 그러니까 고등학생이지요.

 

<연변을 찾은 조선대학교 교원들>

면담자: 선생님, 연변에는 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구술자: 열 번 정도 갔죠.

면담자: 그러시군요, 처음에 가신 게 언제죠?

구술자: 처음 간 것은 2000년, 역사학부 학부장 되었던 해지요. 학부장 되었을 때 학부 학생들 실습 있잖아요. 답사죠. 늘 교토나 규슈나 일본 국내에서만 했는데, 연변 지역은 종합적인 답사를 하면 좋은 게, 고구려, 발해 유적도 있고, 근대사, 현대사라면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항일 빨치산도 거기서 벌어진 일 아니에요? 그래서 한 번 그걸 하자고 하니 학생들이 꼭 실현해 달라고 하죠. 그래서 기획을 했는데 우선 조사를 가야지요. 그러면 예산이 있어야 되니까, 졸업생들에게 호소를 했어요. 그래서 200만 엔 정도 돈 모았어요. 그걸로 다섯 명 정도의 교원이 10일 정도 쭉 돌았습니다. 연변대 선생 안내도 받아야 하고. 연변대 현대사 하시는 박 모 선생님…

면담자: 박창욱 선생님이신가요?

구술자: 네, 박창욱 선생님이 나와서 자기들도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베이징부터 열차를 타고 심양, 장춘 거쳐, 그 근방 쭉 답사를 하고, 길림 가서 철도로 연변에 갔습니다. 돌아갈 때는 대련에 가서 여순 감옥에 가고. 일본에 돌아와 답사 코스를 결정해서 총련 중앙의 비준도 받았어요. 그래서 학생들도 공부시키고 답사 준비를 쭉 하고 있었는데 한 달 전에 중지되어 버렸어요. 뭐냐면 탈북자 문제예요.

면담자: 아, 이북에서 연변 쪽으로 온 탈북자 문제군요.

구술자: 그때가 이른바 탈북자 문제가 가장 우심할 때지요. 조대 학생들 거기에 가면 이용당할 수 있으니 당분간 중지하라고.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우리도 그러한 걸 경각성 높여서 만단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지만, 실현하지 못했어요.

면담자: 안타깝네요.

구술자: 지금도 학부장 그만뒀지만, 학부에다가 꼭 실현해달라고 지금도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도 원하고 있고 좋은 답사가 될 겁니다. 우리 역사와 지리 종합적인 것 되지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면담자: 조대 학생들인데 남호두 회의 장소 이런 데 가 보고, 또 연변에 사는 조선족 분들과 만나 이야기 해보면 배우는 게 많을 텐데요.

구술자: 혁명 운동 사적지 그때 거의 돌았어요. 그 후에도 연변에 국제심포지움 주로 가고 했지요. 꼭 실현시키고 싶은 게, 역사교과서 쓰고 싶다, 학생들 교육의 일환으로서 답사 과정을 꼭 설정하고 싶다, 그런 겁니다.

 

<재일조선의 말과 글>

면담자2: 저는 한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말이나 글, 그리고 책 이런 데 관심이 많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언어 경험이 어떠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구술자: 공화국에서요?

면담자2: 아니요 그냥 선생님께서 실제로 살아가시면서 어떠셨는지, 집에서는 조선어를 쓰시다가, 처음에는 학교 가셨을 때는 당연히 일본어를 쓰셨을 테고, 혹은 어렸을 때부터 어떤 언어를 많이 썼는지, 특히 학교 다니시면서 책 읽는 문제랑 관련해서, 일본어 책을 보셨는지, 조선어 책을 보셨는지, 조선어 책을 보시면 ‘공화국’에서 나온 책을 보셨는지, ‘남조선’에서 나온 책을 보셨는지, 이런 것들을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구술자: 내가 어릴 적에는 부모님은 일본 말 거의 못했기 때문에, 제주 사투리지요. 그런 속에서 자랐고, 그래서 제주 사투리는 말은 못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주 사투리라는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1926년에 일본에 오셨으니까 1920년대 제주 사투리죠. 제주도에 이복 누님이 계세요. 그래서 일본에 한 번 오셨는데, 어머니하고 회화를 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제주에서 거의 듣지 못하는 1920년대 사투리라서.

면담자: 제주도 분들은 테레비 보고 이러니까 다 서울말 비슷하게 돼버렸는데, 오히려 오사카에 옛날 말이 남았네요.

구술자: 집에서 식사도 제주 요리이지요. 완전히 그랬습니다.

면담자: 일본어는 어떠셨나요?

구술자: 생활에서는 일본어 한다는 그런 정도였지요. 일본 학교 가서 일본 교육을 받았으니까.

면담자2: 학교 가시기 전에도 뭐 간단하게 물건 사고, 이 정도 일본어는 하시는 상태에서 학교를 가셔서…

구술자: 일본어야 뭐 일상적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일본 말이니까. 아버지, 어머니하고 이야기 할 때는 일본 말이고, 그거에 대해서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말로서 이야기하고. 소통은 그런 식이었죠.

면담자2: 선생님께서 일본어로 말씀하시면 부모님께서는 조선어로 말씀하시고.

면담자: 6학년 때 조선학교로 옮기셨을 때까지는 조선 글은 못 읽으셨겠네요?

구술자: 읽지 못했죠. 조선말도 못했지요. 제주 사투리는 알아들을 수 있는데…

면담자: 그러니까 말은 못하시고 듣기만 하시는 거죠. 그럼 조선학교에서 배운 조선말이신 거네요. 조선학교 교육이 대단하네요.

구술자: 그, 느, 드, 르부터 6학년에서 배웠죠.

면담자2: 책 같은 건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아까 말씀하신 시바 료타로라든지 일본 역사 같은 거 읽을 때는 일본어 책을 읽으신 거죠.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의 독서 경험을 좀 말씀을 해 주시고, 대학 들어간 이후를 좀 말씀해 주시면 약간 더 구분해서 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구술자: 주로 고등학교까지는 일본어 책을 읽었죠. 조선 것은 《김일성 저작집》은 고등학교 때 많이 읽었습니다. 의무적이었으니까.

면담자2: 그래도 민족학교를 다니시고 그랬으니까 교과서뿐만 아니라 ‘공화국’에서 나온 책도 좀 같이 읽거나 그러진 않으셨나요?

구술자: 교과서하고 《김일성 저작집》 외에는 없지요.

면담자: 소설책 없었나요? 혁명소설 이런 거.

구술자: 소설은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읽었지요, 공화국 소설. 고등학교 때는 주로 일본 책이었습니다. 아까 이야기 했지만 집에 형이 그러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이 총련 산하의 일본 대학 다니는 학생 단체인 유학생동맹을 거쳐서 총련 일꾼으로서 조선신보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나도 자연히 형의 책을 많이 읽어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면담자: 형님이 리츠메이칸 대학 들어가시고 선생님도 조선대학교 가시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아버님이 몸도 불편하신데 돈은 괜찮았나요?

구술자: 그래요, 우리 집은 생활적으로는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팔을 잃었지만, 직업은 뭐냐 하면 오사카에서는 흔히 요세야(よせや)라고 하는데.

면담자: 요세야?

구술자: 도쿄에서는 시키리바(仕切り場)라고 하는데, 신문지나 종이 주워서 바타야(ばたや)라고 하죠, 골동품…

면담자2: 고물상이군요.

구술자: 네, 고물상, 그걸 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생활 자체는 뭐 빈곤하지는 않았죠. 내가 돈으로서 고생한 경우는 없어요. 아버지로부터 용돈 받고 형한테 용돈 받고, 그렇게 이중적으로 받고 있었어요. 제가 제일 어렸기 때문에 막내이니까, 형들은 상당히 고생한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고생 거의 안 했고.

면담자2: 재일조선인 그러니까 자이니치(在日) 문학자들의 작품을 보시거나 그러진 않으셨습니까? 이회성이라든지 허남기라든지.

구술자: 그건 거의 다 읽었지요.

면담자2: 그거는 뭐, 대학 오신 이후에?

구술자: 허남기 선생의 그런 것들은 고등학교 때 읽었어요.

면담자2: 아, 고등학교 때 《화승총》 뭐 이런 걸 읽으셨군요. 선생님 외에도 주변에 같이 학교 다녔던 친구분들도 많이 읽고 그러셨습니까?

<사진 2> 재일조선인 작가 김석범 선생과 함께. 1999년 일본 오끼나와에서. (구술자 주)

구술자: 그때는 그런 분위기 있었죠. 당시는 운동적인, 진보적인 책을 일본 사람들도 그렇고 거의 다 대학생들이 읽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80년대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 많았지요. 그때 유학생 많이 사귀었죠.

면담자: 그때 뭐 강창일 선생님이나 이런 분들 얘기하셨었죠.

구술자: 히토쓰바시나 도쿄대학이나 뭐 그때 상당히 깊이 사귀었어요. 히토쓰바시 그룹하고 특히 그랬지요.

면담자: 이규수 선생님이나.

구술자: 규수, 규태, 그리고 뭐 이름 잊어버렸지만, 지금 대체로 대학교수가 되어 있어요. 상당히 가난하게 생활한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그분들은 한국의 학술, 교육, 사회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죠.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와 일본 정부의 제재>

면담자: 조선대학교 퇴직을 하셨는데도 계속 연구를 하시네요, 존경스럽습니다.

구술자: 내 퇴직을 했는데 아직 조대에 연구센터 센터장 하고 있죠, 조선문제연구센터. 전임이 아닌데 센터장, 그것도 이상합니다만.

면담자: 조금 더 봉사하시다가 이제 좀 편하게 한국도 다니시고. 이어서 일을 맡으실 후배나 제자분들이 많이 계시면 좋을 텐데요.

구술자: 조대에는 후계자를 만드는 게 간단치 않아요. 내가 퇴직을 했지만도 수업은 내가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공화국에 못 가는 형편입니다. 언제인가 하면 3년 전인가 4년 전인가, 2016년입니다. 그 해 12월 달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학장을 했는데, 일본 외무성에서 재입국 허가는 취소한다고 통지가 왔습니다. 그러니까 공화국 가면 일본에 재입국이 어렵죠,

면담자: 그러니까 북에 가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거네요.

구술자: 제재의 일환이지요. 주로 총련의 간부들에게 하는데, 저한테 온다는 건 나도 생각 못했기 때문에 놀랐지요. 그러니까 2016년 이후는 공화국에 못 가고 있습니다. 퇴직한 후에, 공화국 가면 재입국 안 되지만 다른 해외에 가는 것은 어떤가 하고, 외무성에 문의를 했어요. 저쪽에서 여러 가지 하다가 외국에는 학회 같으면 재입국 허가 내린다. 그런데 단 한 번만. 그것도 수속이 굉장히 복잡해요. 스무 장 정도 서류를 내야 해요. 심의하는 데 두 달 걸립니다. 가는 직전에 법무성에서 허가가 나옵니다. 퇴직한 후 그렇게 해마다 가고 있죠, 외국에. 카자흐스탄도 갔고 연변에는 자주 갔고 칭다오도 가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신청해야 합니다. 그래도 비행장 출국할 때, 마지막 수속을 할 때 거기서 늘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별실에서 한 시간 정도 대기를 해야 돼요. 정식으로 허가 나왔지만 재확인한다는 의미지요. 비행기 출발하는 직전까지 그거 해요. 변소 갈 시간도 없어요(웃음). 비행기 타면 먼저 위생실로 갑니다, 그런 식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면담자: 좀 심하네요.

구술자: 퇴직한 사람한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내가 퇴직했는데 왜 아직 제재가 되는가 하고 이유를 물으면 저쪽에서도 말 못하는 게지요. 출입국관리국의 간부들도 모르겠다고, 법무성에서 판단하니까. 내가 퇴직하고 1년에 한 번 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 다니며 의논을 하고 싶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면담자: 선생님, 오늘 말씀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