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①] 식민과 분단으로 갈라진 ‘평양’의 형제 : 정두현과 정광현_정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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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역사랑’ 2020년 7월(통권 7호)

[근대 한국의 “특별한 형제들”①]

 

식민과 분단으로 갈라진 ‘평양’의 형제 : 정두현과 정광현

 

정종현(인하대 한국어문학과 부교수)

 

평양 개화파 유지의 수재 아들들

‘정두현(鄭斗鉉, 1888-?)과 정광현(鄭光鉉, 1902-1980)’은 평양의 유지였던 정재명(鄭在命, 1861-1947)의 장남과 삼남으로 14살 터울의 형제이다. 해방 후 정두현은 김일성종합대학교 설립을 주도하고 의학부장을 지냈으며, 정광현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한 후 친족상속법 분야의 업적으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전통 사회에서 차별받던 서북 출신 형제가 근대교육의 순례를 거쳐 남북한의 최고 학부 교수가 되는 삶의 행로를 따라가 보자.

형제의 학력은 비현실적이다. 정두현은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거쳐 도쿄제대 농학부(1910.4-1914.7) 유학 후에도, 도호쿠제대 이학부(1927.4-1930.3), 타이완의 다이호쿠제대 의학부(1938.4-1941.12) 등 도합 세 개의 제국대학에서 공부했다. 제국대학 세 곳에서 농학·생물학·의학 등 각기 다른 전공을 이수한 사람은 정두현이 유일하다. 정광현도 형이 다녔던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6고를 거쳐 도쿄제대 법학부(1925.4-1928.3)를 졸업했다.

형제를 이런 엘리트로 기른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형제의 부친 정재명의 이력은 정두현의 이력서와 자서전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북한은 공직자, 노동당원, 학생에게 자서전과 이력서를 요구했다.(주1) 평양의과대학 학장 시절인 1948년 10월에 정두현이 자필로 쓴 이력서와 자서전에 따르면, 형제는 “평양시외 농촌의 유족치 못한 농가에서 출생”하여 “한학의 소양이 있고 조국애가 깊으며 교육열이 왕성한 부친의 엄격하고도 이해 많은 훈도 밑에서” 자랐다.

<사진1,2> 정두현의 이력서와 자서전 (총 9매 중 2매)

자서전은 정재명이 “대한독립협회 평양지회장, 서북학회 평남지부장으로서 조국의 독립보전을 위하여 분투”하였고, 새로운 교육의 진흥을 위해 동지들과 “평양시내에 사범강습소를 개설하여 애국적 신식교원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으며, 당시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재학했던 정두현 자신도 방학을 이용하여 아버지를 도우면서 교육자로서 소명을 다하기로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애국 지사인 아버지에 대한 긍지와 교육자 집안에 대한 정두현의 자부가 느껴진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정재명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독립협회·태극학회·서우학회·서북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공립평양보통학교 학무위원과 평양부협의회 회원, 금융조합장을 지냈다.(주2) 이러한 정재명의 면모를 정광현의 장인인 윤치호는 “품위 있는 신사로서 말과 행동이 기품 있다”(주3)고 평하고 있다. 신사 정재명은 개화파 지사이기도 했지만, 식민지 토착 사회의 유지이기도 했다. 정두현의 자서전은 부친의 식민지 이력은 언급하지 않는다.

집안의 경제력에 대한 이력서의 답변에서도 약간의 축소가 느껴진다. 정두현은 자기 출신을 ‘중농’으로 기재하고, 해방 전 부모 재산을 주택과 토지 2,000평, 토지개혁 때 몰수된 부모 토지도 2,000평으로 기록했다. 집안의 전 재산이 2,000평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아마도 3형제에게 분재한 후 남은 토지였을 것이다. 2,000평 농사로 두 아들의 10여년 유학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형제의 초창기 삶을 3·1운동 전후의 동정을 통해 살펴보자.

 

3·1운동과 형제는 용감했다

1888년 10월 27일에 출생한 정두현(鄭斗鉉)은 3·1운동 당시 이미 32세의 장년이었다. 1907년 ‘현해탄’을 건너간 정두현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를 거쳐, 1910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실과)에 진학해서 1914년 7월에 끝마쳤다.(주4) 이후 도쿄제국대학 농학부 동물학연구실에서 2년간 연구생으로 공부하다가 1916년 9월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광성고등보통학교 교사, 숭덕학교 교감으로 근무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맞이하게 된다.

정두현은 자서전에서 “1919년 평양에서 일어난 3·1운동이 내가 당시 책임자로 시무하던 숭덕학교 교정에서 봉화를 들게 된 관계 이외에 해외 독립운동 기관과도 약간의 연락이 있던 사실에 의거하야 평양형무소에서 수 개월간 구금생활을 하게 되었다가 특별한 공작실행이 없었던 관계로 방면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진술은 3·1운동 당시 검거된 숭덕학교 교사 곽권응(郭權膺)의 신문조서와 당시 검사국의 ‘조선소요사건’ 관계 서류에서 실제로 확인된다.(주5)

3·1운동 후 4개월여 간 구금되었다가 7월에 출옥한 정두현은 청년들의 애국 사상 고취와 교양 향상을 목적으로 ‘평양청년회’를 조직하는 데 참가했으며, 그 단체의 회장을 맡아 수년간 청년 운동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이후 1923년부터 1927년까지 4년 동안 평양 숭인학교 교장으로 일하다가 다시 “생물계의 현상과 그 이법(理法)을 알아보기 위하여”(주6) 1927년 4월에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부 생물학과에 진학한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동생 정광현은 3·1운동 당시 18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1912년 평양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한 후, 곧바로 평양관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학년 때인 1919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 3·1운동 당시 소년 정광현이 시위에 참여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3·1운동이 그에게 준 감격이 어떠했을지는 한 해 뒤 일본에서 맞은 3·1운동 1주년 때의 행동을 통해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20년에 생산된 일본 경찰문서인 「在京朝鮮學生ノ獨立萬歲ニ關スル件(第二報)」에 정광현의 행적이 남아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약 80여명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기념일을 일본의 ‘기원절’처럼 기념하는 집회를 열고 만세를 부르는 등 소요를 일으켜, 이 중 53명을 히비야 경찰서에서 검속하여 주모자 6명을 구류 15일에 처하고 나머지는 ‘설유훈방’했다. 석방자 명단에는 메이지학원 중학부의 정광현도 포함되어 있었다.(주7)

해방 이후 정광현은 3·1운동에 적용된 법률에 대해서 연구한 「3·1운동 관계 피검자에 대한 적용법령」(주8), <<3.1독립운동사; 판례를 통해서 본>>(주9) 등을 발표했다. 평생 가족법 분야에 대한 연구에만 몰두했던 그가 3·1운동과 관련된 법률 논문을 썼던 데에서도 그가 3·1운동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감회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아마도 3·1운동에 대한 그의 기억에는 자신뿐만 아니라 형 정두현의 체포와 투옥에 대한 소회도 포함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1921년 3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4학년을 수료한 정광현은 4월에 와세다 제1고등학원 이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다니다가, 1922년 4월 오카야마(岡山)에 있는 제6고등학교 문과 갑류에 들어가 1925년 3월에 졸업했다. 같은 해 4월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영법과)에 입학하여 1928년 3월에 끝마쳤다. 졸업 후 정광현은 다시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에 편입하여 한 학기를 더 공부하다가 9월부터 고향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문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 시절 겔다트(Geldart)의 <<영국법 개요>>, 젠크스(Jenks)의 <<영국법 요약>> 중의 친족법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며(주10), 이러한 관심이 해방 이후 친족상속법의 권위자로 성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정광현이 일본 관료 배출의 산실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도 고등문관시험이나 수입이 보장된 변호사 자격 시험을 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점은 각별히 강조되어야 한다. 그는 법학을 출세의 도구가 아니라 근대적 학문으로 배우고 실천한 것이다.

 

평양과 경성, 엇갈리는 형제의 행보

학업을 마친 형제는 3년여의 시차를 두고 고향인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먼저 정광현이 1928년에 문과 교수가 되었고, 3년 뒤인 1931년 4월에는 도호쿠제대 이학부를 졸업하고도 1년 더 대학원 연구생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정두현이 이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형제가 숭실전문에서 함께 근무한 것은 아니다. 정광현이 윤치호의 셋째 딸 윤문희와 결혼 후 1930년부터 연희전문 교수로 옮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형제의 행로는 엇갈린다.

정광현이 윤치호의 사위가 된 것은 큰 사건이었다. 1929년 3월 12일자 일기에서 윤치호는 오후 4시 YMCA회관 강당에서 열린 결혼식과 250명의 하객에게 1인당 1원 30전짜리 식사를 대접한 명월관 피로연을 기록한 후, “서울의 잘 알려진 가문에서 평양 출신을 사위로 맞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난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먹게 될 것이다. (…) 내 평양 사위가 성공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주11)고 자신의 바람을 적었다.

조선 왕조 시대의 서북 차별 의식은 식민지 사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기호(畿湖)지역 주류엘리트들은 서북 출신을 극도로 혐오했다. 일례로 신흥우나 유억겸 등의 기호파 리더들은 이광수의 이화여전 강연을 불과 몇 시간 남겨두고 미국인 교장에게 그의 이혼 경력을 험담하여 취소시킴으로써 그를 모욕하기도 했다. 이화여전에서는 당시 정두현을 초빙하려 했지만, 신흥우가 “여교사가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하여 아주 교묘하게 이 계획을 취소시켰다.”(주12)

정두현에게는 막혀 있던 경성의 주류 사회로 가는 길이 윤치호가(家)의 일원이 된 정광현에게는 허락되었다. 그는 1930년 3월부터 연희전문 교수가 되었고, 이화여전에서도 강의를 하며 중앙의 저널리즘에도 법률과 관련된 글을 활발히 기고했다. 정광현은 여성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법률 규정이 아내의 간통만을 벌하는 불평등 규정임을 지적하는 등, 특히 여성의 법률적 지위와 남녀평등권에 대한 주목할만한 선구적인 주장들을 남겼다.(주13)

일본의 군국주의적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정광현에게도 시련이 닥쳤다. 1938년 2월 연희전문 상과의 ‘경제연구회’ 문제로 백남운, 이순탁, 노동규 등이 검거된 이후 사건은 흥업구락부 및 동우회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연희전문의 대다수 교수들과 함께 정광현도 검거되었다. 총독부는 연희전문을 폐교시키거나 아니면 선교사로부터 빼앗고자 했다. 연희전문의 많은 교수들이 사직서를 강요받았으며,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되었다.

1938년 9월 사상전향서를 쓰고 기소유예처분으로 풀려난 사람들 중에는 정광현도 끼어 있었다. 정광현의 방면은 윤치호가 총독부의 김대우로부터 받은 “선생님께 가장 가까운 분은 걱정하지 마십시오”(주14)라는 전화와 관련이 없진 않을 것이다. 이후 정광현은 식민권력에 협력해간 윤치호의 길에 동행했다. ‘대화숙’ 생활을 거친 그는 창씨개명의 해설서격인 <<성씨논고>>(1940)(주15)를 펴냈고, 연희전문 교장이 된 윤치호를 도와 서무과장으로 일했으며, 1944년부터는 총독부 중추원 구관제도 조사과 명예촉탁으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사진3> 성씨논고 신문 광고(동아일보 1940.2.12.)

동생이 풍파를 겪으며 경성살이를 하는 동안 정두현도 평양 지역사회를 배경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그는 숭실전문 교수이자 남문교회 장로로 활동했으며, 평양 지역의 교육문화 활동에도 폭넓게 관여했다. 일본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1934년 3월 15일자 생활개선본위잡지 <<신흥생활>> 창간호를 불허”(주16)했는데, 잡지의 발행인은 정두현이었다. 1936년 숭실학교 교장이 된 정두현은 신사참배 거부로 1937년 학교가 폐교되자, 다시 세 번째 유학에 나선다.

1938년 4월, 노년에 접어든 51세의 정두현은 타이베이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자서전에서 정두현은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와 인민보건에 다소간 공헌하여 보겠다는 의도” 때문에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1942년 3월 그는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 3회 졸업생이 되었다. 1942년 4월부터 1945년 6월까지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내과학 및 생리학 연구실에서 연구생으로 공부했으며, 평양에서 휴양 중에 해방을 맞았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현실판 형제들

해방과 곧바로 이어진 분단은 형제의 삶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정두현은 1938년부터 해방 때까지 의학 연구라는 학구 생활 등을 통해서 식민 권력과의 타협 없이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대동공업전문의 조선인 교수 3명이 이북 지역 이학 전공 지식인의 전부였던 당시 북한에서 평양서 나고 자란 유지이자 3·1운동의 옥고를 겪었으며, 세 개의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숭인·숭덕·숭실학교 교장과 전문 교수를 역임한 정두현의 위상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1945년 10월에 그를 평양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초빙하였다. 1946년에는 9명으로 구성된 종합대학창립준비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김일성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의학부장이 된다. 그는 1946년 6월 17일에 재정상이었던 연안파 최창익의 보증으로 북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1947년에는 유엔의 한국임시위원단 조직에 대항해서 31명으로 구성된 임시헌법제정위원회에 김일성, 김두봉 등과 함께 선임되었다.

이처럼 정두현은 북한의 공적 영역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의 학부장, 노동당 중앙위원, 임시헌법제정위원 등으로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 남한의 서울에 있던 동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남북으로 갈린 형제라고 하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4)가 그리고 있는 이념과 체제를 뛰어넘는 감동 깊고 애틋한 형제애를 떠올릴 법하다. 그렇지만, 영화 밖 현실 속 형제들에게는 상대 진영에 있는 형제의 존재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특히, 성공한 형제는 상대 진영의 형제에게 죽음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의 국가검열상이었던 약산 김원봉의 4명의 형제와 5명의 사촌 형제가 총살당했다. 상대 진영의 성공한 형제는 감추어야 하는 존재였다. 손꼽히는 자본가이자 친일파였던 윤치호의 사위이자, 총독부 중추원의 촉탁을 거쳐 미군정에서 법무관과 관재처 차장이 된 남한의 정광현은 그 형 정두현의 북한에서의 사회적 경력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부담스런 존재였다.

정두현의 자필 이력서에서 그의 고충을 느낄 수 있다. 정두현은 ‘동거가족’란에는 아내·며느리·손자 이름을, ‘별거가족’란에는 계모 김재신을, ‘친척관계’란에는 ‘정길현 및 그의 가족’이라고만 적었다. 정길현은 정두현과 정광현 사이에 있던 정재명의 2남일 것이다. 정두현의 펜은 정길현을 적은 후, 막내 동생을 떠올리며 잠시 머뭇거렸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는 곧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그 머뭇거림의 순간 그는 정광현을 떠올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광현은 1950년 1월부터 서울대 법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1962년 정년 때까지 봉직했다. 그는 평생 10권의 저서, 136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한국의 친족상속법의 기초를 마련하고 헌법에 남녀평등이념을 구현한 법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66년에는 학술적 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1년에는 자식 4남매가 이민해 정착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말년을 보내다가 1980년에 콕키스빌(Cokeysville) 묘지에 묻혔다.

정광현은 가끔 자신의 형을 떠올렸을까? 아직까지 그가 형을 그리워했던 흔적을 보진 못했다. 아마 정광현에게도 북한사회의 중추가 된 형의 존재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형을 떠올리는 대신 정광현은 장인 윤치호에 대한 애틋한 정을 드러냈다. 말년의 그가 미국에서 힘쓴 일은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가라는 사실을 비롯한 애국자로서의 윤치호 전기의 집필이었다. 정광현의 삶은 “평양 사위가 성공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윤치호의 바람에 부응한 것이었을까?

주1) 이력서는 1개월도 빼놓지 않고 경력 모두를 작성하도록 요구되었다. 자서전은 작성자의 구체적인 개인 역사를 담았다. 과거 경력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평정서가 첨부되었으며, 보증인이 이 경력을 확인하고 보증하는 수결을 했다. 정두현의 이력서와 자서전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보관소(NARA)에 보관되어 있으며, 여기서 인용하는 이력서와 자서전은 과학사 연구자인 전북대 김근배 교수가 직접 찍어온 것을 제공받은 것이다. 후의에 감사드린다.

주2) 정긍식, 「雪松 鄭光鉉 선생의 생애와 학문의 여정」, <<법사학연구>>54, 2016. 10, 168-169쪽.

주3) 윤치호 일기 1931년 4월 6일자. 이 일기에서 윤치호는 사위의 형인 정두현에 대해 “학자이자 동물학이 전공이고 생활면에서 굉장히 정확해서 사람들은 그를 기준으로 시계를 맞춘다”는 인물평을 남겨두고 있다.

주4) 정두현이 다닌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는 아무래도 전문과정인 실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쿄제국대학 학부의 졸업생 명부를 모두 조사했지만, 정두현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즉, 그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를 다니긴 했지만 졸업하지 않았을 가능성과, 그가 이수한 과정이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에 부설된 실과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의 실과는 우장춘이 다닌 과정이기도 하다. 정두현의 이력서에는 도쿄제대 수학 기간이 기록되어 있지만, 별첨된 자료에는 도호쿠제대와 다이호쿠제대 졸업 증서 두 가지 뿐이었다.

주5) 곽권응(郭權膺)은 숭덕학교에서 서거한 고종의 봉도식과 예배 및 만세 운동 등이 있었는데, 학생들에게 이 집회에 참여하도록 알린 것은 교감 정두현이었다고 진술하고 있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권 3.1운동1>>, 삼일독립선언 관련자 심문조서(경성지방법원)) 또한, 「대정8년내지동10년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공7책 기5) 비밀결사 대한국민회 급 대한독립청년단 검거에 관한 건」에는 정두현이 대한독립청년단 내무부장으로 올라 있다.

주6) 정두현, 「학교선택체험담」, <<동광>>18, 1931년 2월, 79쪽.

주7) ‘在京朝鮮學生ノ獨立萬歲ニ關スル件(第二報)’, 「特高秘乙第404號;秘受2516號」, 1920년 3월 3일. 석방자 명단에는 정광현의 인적 사항이 “19세, 원적 :평안남도 평양부 港町 二, 직업: 학생”으로 명기되어 있다.

주8) 정광현, 「3·1운동 관계 피검자에 대한 적용법령」, <<3.1운동 50주년 기념논집>>, 1969.

주9) 정광현, <<3.1독립운동사; 판례를 통해서 본>>, 법문사, 1978.

주10) 최종고, <<한국의 법학자>>, 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109-110쪽.

주11) 윤치호 일기 1929년 3월 12일자.

주12) 윤치호 일기 1931년 4월 19일자.

주13) 이 시기 정광현이 기고한 글은 「여성의 법률」(총30회), <<조선중앙일보>>(1934.11.16.-1935.1.20.), 「조선여성과 법률」(총10회), <<동아일보>>(1936.4.1.-25.), 「조선 여성의 정조유린과 위자료」, <<여성>> 제3권 2호, 1938. 2 등 외에도 다수의 논문이 있다.

주14) 윤치호 일기, 1938년 5월 25일자.

주15) 정광현, <<성씨논고>>, 동광당서점, 1940. 최종고는 이 책이 “한국의 가족제도의 원리와 일본의 그것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 이처럼 정박사는 민족의식을 가족법학을 통하여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최종고, 앞의책, 16쪽)고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만, 이 책이 총독부의 ‘창씨개명’ 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강제되어 급하게 쓴 관제도서였다는 점을 외면하고 있다. 정긍식도 <<성씨논고>>를 구관제도 조사과 시절에 출판된 첫 저서(정긍식, 앞의 논문, 174쪽)라고 잘못 파악하고 있으며, 이 저서의 성격을 외면하고 있다.

주16) 「불허가 출판물 목록」(3월분), <<조선출판경찰월보>> 제67호.

주17) 「형제 4명은 총살 김원봉 집안 풍비박산-[미국 현지 인터뷰]약산 김원봉의 조카 김태영 박사」, <<Korea Weekly>>, 2015. 10. 9.

주18) 정긍식, 「雪松 鄭光鉉 선생의 생애와 학문의 여정」, <<법사학연구>>54, 201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