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삼일운동①_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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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낯선 삼일운동] 

 

낯선 삼일운동 ①

 

정병욱(근대사분과)

 

시작하며_ 엘리트 편향을 넘어서

어떤 사람이 밤중에 거리를 걷다가 술 취한 자가 가로등 밑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는 것을 보았다.

행인: 무엇을 하고 있소?

술꾼: 잃어버린 동전을 찾고 있소.

행인: 어디서 잃어버렸소?

술꾼: 반 구획 쯤 지난 것 같소.

행인: 그런데 왜 여기서 찾고 있는 거요?

술꾼: 여기가 가장 밝지 않소!

사회학자 리차드 버크(Richard A. Berk)는 이 우화를 소개하면서 집합행동 이론가들도 같은 오류를 범한다, 실제 중요한 문제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모른 채 단지 방법론적으로 “불빛”이 가장 밝은 곳에서 연구하고 있다, 이것이 군중에 대한 그릇된 특성화로 이어진다고 비판했다.

역사학도 비슷하다. 사료의 학문인 역사학은 사료 주변만 맴도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사료란 대부분 지배층이나 엘리트가 남긴 것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역사 연구나 서술에서 엘리트 편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료, 즉 불빛 아래서만 찾고 있다. 삼일운동도 예외가 아니다. 1919년 3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조선총독부 검사국이 수리 처분한 삼일운동 관련 피고인 19,054명은 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교육 정도를 보면 ‘전혀 교육 받지 못한 자’가 32%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불상不詳’ 23%, 가정 또는 서당 교육 20%였다. 학교 교육을 받은 자는 보통교육이 15%였으며 모든 학교 교육을 합해도 19%에 불과했다. 작년 100주년을 맞이하여 나온 삼일운동 책들을 펼쳐서 확인해보시라. 학교교육을 받은 자가 지면을 많이 차지고 있는지, 전혀 교육 받지 못한 자가 많이 차지하고 있는지.

엘리트 편향은 박물관 전시에도 나타난다. 작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100주년 특별전 ‘대한민국 그날이 오면’에서 집중 조명한 17인(가슴에 품은 3월 1일) 중 당시 학생은 10인 59%며, 이미 학교 교육을 받은 자를 포함하면 총 13인 76%이다. 실제 19%를 점하는 자들이 전시의 76%를 차지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없을까? 김민환은 2019년 전국에서 열린 삼일운동 100주년 특별전 44개를 분석하여 그 특성과 한계로 ‘엘리트 인물 중심의 전시’를 지적했다. 박물관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유명하지 않거나 엘리트가 아니면 자료가 없어 전시를 할 수 없다고. 과연 그럴까. 의지와 방법, 그리고 시간의 문제가 아닐까.

이제 역사학도 불빛 아래만 서성이지 말고 어둠을 응시해야 한다·……이 비유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과거든 현재든 세상은 충분히 밝지 않지만 그렇다고 탐구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빛나는 엘리트 위주의 사료만보다 눈이 먼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서발턴Subaltern은 말을 한다.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앞으로 연재할 ‘낯선 삼일운동’은 눈멀고 귀먹은 자가 더듬더듬 삼일운동을 탐사한 기록이다. 관심 있는 분들에게, 엘리트주의 극복에 조금이나 도움이 되면 좋겠다.

 

낯선 삼일운동 겉눈만 못 보지 속눈마저 못 보는 줄 아냐

2019년 삼일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상영된 영화 <항거>를 보는 내내 꺼림직했다. ‘371’은 유관순의 수인번호가 아니다, ‘매일신보’의 한자가 틀렸다…이런 것 때문이 아니다. 감옥에 있어야 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심영식. 세례명 심명철. 시각장애인으로 개성에서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여감방 8호실’에 유관순 등과 같이 투옥되었다. 자세한 자료가 없어 심명철과 다른 인물을 조합하여 연기하게 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암튼 그 옥사에 있어야 할 시각장애인은 없었다. 그곳에 있었던 심영식이 눈이 먼 건가, 그를 못 보는 우리가 눈이 먼 건가?

필자가 심영식이란 존재에 예민했던 이유는 영화를 보기 전에 다음과 같은 자료를 봤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국가기록원에서 ‘독립운동관련 판결문’을 번역본과 함께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다. 매우 유용하다. ‘심영식’으로 검색해보면 경성지방법원 1919년 5월 6일자 판결문이 나온다. 심영식 관련 부분의 원문과 번역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개성 만세시위의 심영식 관련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19.5.6.) (출처: 국가기록원 ‘독립운동판결문’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 , 관리번호 CJA0000416. )좌측이 원문, 우측이 번역문이다 (2020년 3월 29일 검색).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자료에선 ‘맹목적인 부녀’가 되고 영화에선 사라지고. 찾아보니 심영식은 오래전부터 ‘맹목적인 부녀’였다. 1971년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영위원회에서 간행한 <독립운동사자료집5:삼일운동 재판기록>에도 같은 부분이 “맹목적인 부녀자임에도 불구하고”로 번역되었다(520쪽). 오류가 반복되며 고쳐지지 않는 걸 보면 ‘심영식’에 비춰진 조명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오래 머물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필자도 고백하자면 최근에야 심영식을 알게 되었다.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를 탐구하면서 시위 관련자로 징역 1년 3개월의 형을 받은 이응호(李應浩)의 아래 사진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그림 2> 수안면 만세시위(1919.3.3.)의 이응호 수감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1919년 3월 1일 밤 수안군 천도교구장 안봉하에게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고 3일 수안면에서 천도교인의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가 있기 하루 전 수안헌병분대는 수안군 천도교구실을 수색하여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안봉하 등 교구 간부들을 연행했다. 이때 이응호도 연행되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당시 29세 한문교사였다. 위의 사진을 보면 시각장애인이 분명해 보이는데, 마음 한 편에 시각장애인이 한문교사가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관련 판결문들을 보면 이응호가 자주 이용호(李龍浩)로도 불려 의문은 더 커졌다. 단순 오기일 수도 있지만, 혹시 대신 징역을 사는 건 아닌가? 대신 태형을 받았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대신 징역도 가능했던가. 분명 필자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었고, 이는 시각장애인을 괴롭혀왔던 오래된 문제, 편견이다.

모르면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좋다. 시각장애인의 직업권 형성에 관해 박사논문을 쓴 주윤정 선생께 문의해보고 깨달은 점은 시각장애인이라고 전부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정도가 다르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나중에 확인했지만 1920년 11월 2일 경성복심법원 공소 심리에서 이응호는 “외인편[왼편_필자 주. 이하 동일] 눈만 겨우 보”인다고 밝혔다. 또 1921년 7월말 조선의 시각장애인(盲者) 8,792명의 직업을 조사한 자료를 보면 각종 교사 및 학생이 34명이었다. 한편 주 선생은 고맙게도 시각장애인의 역사를 기록한 자료 <맹인실록>(김천년)을 보내주면서 삼일운동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이응호는 나오지 않지만 ‘심영식’ 편이 눈에 띄었다.

시각장애인으로 삼일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더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서 ‘맹인’으로 검색해보면 이달근李達根이 나온다.(주1) 27세 안마업자. 3월 10일 전남 광주군 광주면 작은 장터 시위에 참여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행진했고 독립선언서, 경고문(警告我二千萬同胞), 독립가 등을 살포했다. 징역 1년. 1년이면 단순 가담자는 아니다. 뭔가 억울했던가, 그는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상고 취지문에서 만세를 부르기는 했지만 경찰이 말하듯 독립선언서 배포 구역장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본 피고인[이하 ‘본인’으로 줄임]은 맹인으로 광주 자혜병원의 안마 고용인으로 종사하고 있던 바, 지난 3월 10일 본인의 본적지 평남 성천군 숭인면 창인리에 거주하는 어머니가 광주로 올 거라는 통지를 접했다. 동일 오후 1시반경 그 병원 임시회계사무취급원 소야(小野)에게 저금 17엔을 불하 받아 인력거를 타고 마차정거장까지 마중 나가던 도중 작은 시장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만세를 부르고 있기에 인력거도 자연히 멈췄고 그 때 어떤 자가 본인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강청했다. 본인은 눈이 멀어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강청에 의해 무의식으로 한번 만세를 불렀다. 또 어떤 자가 무슨 종이류를 많이 인력거에 넣어서 본인은 뭔지도 모르고 이 종이류를 손에 쥐고 모색하던 바, 갑자기 경관이 내습하여 본인도 체포되었다.

또 경관은 자신이 ‘눈이 멀어 독립선언서 구역장이 되었지만 눈이 멀지 않았다면 광주의 선동 주모자가 되었을 것이라 호언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 했다.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고 기각.

삼일운동, 아니 대부분의 형사사건에서 이러한 의견 대립은 있기 마련이다. 검경은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여 형벌을 가하려 하고, 피고인은 혐의를 부인하여 가급적 형량을 줄이거나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 그러니 검경이나 판사가 누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거꾸로 누가 법정에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진실’은 아니다. 판결문만이 아니라 사건기록 전반과 다른 관련 기록들을 검토하고, 관련자들의 회고나 인터뷰, 현장 답사 등을 통해 겨우 합리적 추정을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달근이 강권에 의해서든 아니든 3월 10일 만세 부른 것은 사실이다. 이것만으로도 일제의 처벌 대상이고 때론 목숨을 잃을 수 있으며 후대에서 기릴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와 관련해서는 판결문 외에 사건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독립운동사 연구에서도 그를 기억하는데 인색하다. 1971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독립운동사 제3권: 3·1운동사(하)>에 그는 ‘상고 항쟁’자 중 1인으로 적혀있을 뿐이다. 2009년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20권 해당 지역 편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다. 물론 개설적인 책에 만세 부른 사람의 이름 하나 하나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시각장애인 측의 기록인 <맹인실록>에는 이달근에 대해 이렇게 짧게 나와 있다. “1918년 제생원 3회 졸업생으로 3.1운동 때 전라도 광주에서 인력거를 하[타]고 다니면서 만세를 부르며 민중을 고무 선동한 용감한 맹인 혈열청년, 유일한 남성 맹인 독립운동자로 평양 역전에서 제재소를 경영하였다.” 이는 시각장애인들만의 기억이고 자부심일까.

이 때 발견한 1979년 전남일보 기사는 가뭄에 단비 같았다. 발언자는 삼일운동 당시 21세, 전남도청 고원으로서 시위를 주동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은 최한영이다.

이달근이라는 장님이 있었지요. 읍내에서 안마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당시 27세의 청년이었습니다. 독립만세운동이 있다는 정보를 일찍 얻어 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맹인 됨을 서글피 여기면서 뭔가 후세에 남길 일을 하려고 하던 차 만세운동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지도자들을 서둘러 만나러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쩍고 불안스러워 거사 계획에 관한 일체의 얘기를 숨겼으나, 그는 너무도 성실하고 진지한 태도로 운동의 참여를 간청해서 끝내는 광주농업학교 기숙사에 학생동원을 알리는 메신저가 되었습니다.(<전남일보> 1979년 1월 8일자. 노성태 2019 「광주 3·1운동의 재구성 – 판결문을 중심으로」 <향토문화> 38, 73쪽에서 재인용)

최한영의 발언을 인용한 노성태는 광주 삼일운동을 주도한 중심 세력은 기독교인 청년지식인 학생이었지만, 다수는 독립을 열망했던 농민, 가게 점원, 대장장이, 안마사, 이발사 등 각계각층의 민중이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심영식으로 돌아가보자.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1919년 3월 4일 오후 2시 개성 북본정北本町에서 시위단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당시 호수돈여학교 졸업반이었던 이경신의 1965년 회고에 따르면 만세 시위 전 2월 28일[다른 판결문에 따르면 3월 1일] 전도부인 심영식은 독립선언서를 시내에 배포했었다. 또 1971년 위의 판결문이 자료집으로 나오면서 이후 삼일운동이나 학생독립운동을 다룬 서적에서 간간이 심영식이 언급되었지만 그의 삶이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던 것 같다. 감옥에서 나온 후 어떤 삶이 이어졌을까.

그림 3. 심영식을 다룬 동화책 (출처: 장수복 1989 <대한이 살았다!> 고려문화사; 장수복 1991 <(심영식 열사의 감동의 애국정신) 선죽교 피다리> 대우.)

1983년 심영식이 별세한 뒤 1990년 전후 그의 일생을 다룬 두 권의 동화책이 나온다.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는데, 그 포상 신청을 주도했던 사람이 동화책의 작가 장수복이다. 비록 동화로 윤색되었지만 심영식의 일생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두 동화책에 의거해 심영식의 일생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동화책 안에서 연도나 사항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아 고증이 필요하나 우선 대강의 파악을 위해 적어본다. 1896년 개성 목재상 집안에서 출생하여 1900년 열병을 앓은 뒤 눈이 멀었다. 1910년대 들어서 평양맹아학교(2년 수료) 개성 호수돈여학교(3년 졸업),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1년 중퇴)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1919년 개성에서 삼일운동 참여. 이후에도 1920년 삼일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개성 미리흠여학교 학생들과 시위를 준비하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것으로 나와 있다. 1926년 홀로 인천으로 이주하여 일본인 밑에서 안마업에 종사했다. 1931(1928?)년에 시각장애인 문○○과 결혼하고 일본인 안마업소 인수, 1938년 득남, 1940년 득녀했다. 1941년 구세군 인천지부에서 재무하사관으로 봉사하기 시작하여 1975년까지 이어졌다. 해방 이후 1946년 남편이 사망했다. 이후 안마, 뜨개질, 행상(사과, 돗자리, 발 등 판매), 세탁, 혼혈아 키우기 등으로 생계유지와 자식 학비 마련에 힘썼으며 1971년 경지도지사로부터 훌륭한 어머니 표창을 받았다. 전반은 독립 운동을 위해, 후반은 자식 성공을 위해 헌신한 일생이었다. 동화책은 유가족의 증언을 바탕으로 쓰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시각장애인 김천년이 시각장애인의 역사를 기록한 <맹인실록>을 살펴보자. ‘인물편’ 서두에 “필자가 30여 년 간 점자로 모은 것들을 오늘 1990년 10월 27일 오후 7시 50분을 기해 묵자로 옮기기 시작한다”고 쓰였다. ‘독립 투사 심영식 여사’편을 보면 저자가 직접 몇 차례 심영식을 만나서 들은 얘기를 기록했다고 한다. A4 용지로 두 장이 조금 넘는 분량에 불과하고 내용도 표기도 약간 뒤죽박죽이지만 심영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몇 가지 점을 짚어 보면 첫째, 그는 개성 만세시위로 10개월 형을 언도 받아 6개월 만에 가출옥했다. 1919년 10월에 출옥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3월초에 연행, 구류되어 5월초에 판결이 난 점을 감안하면 얼추 맞다(영화 <항거>가 삼일운동 1주년 투쟁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1920년 3월에 그가 여감방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서대문감옥 2호실에 수감되었으며 어윤희, 신관빈, 김향화, 권애라, 유관순, 염씨[임명애](주2)와 같이 있었다. 둘째, 1년 뒤 1920년 3월 다시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번에도 6개월 만에 가출옥했다. 셋째, 이후에도 무슨 일만 있으면 경찰서에 구금당했다. “심문 도중에 하도 맞아서 왼쪽 귀가 지금도 잘 안 들린다.” 셋째, 심영식 하면 떠오르는 그 유명한 대화가 <맹인실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경찰)“장님이 무슨 독립 운동을 한다고 육갑이냐” (심영식)”겉눈만 못 보지 속눈마저 못 보는 줄 아냐”. 그런데 위 동화책에는 유사한 대화가 두 번째 체포 때 개성의 조선인 순사 황달평과 주고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외에도 ‘대한 제국도 반드시 독립을 한다’는 노래를 부르는 감옥 순사, 감옥에서 뜨개질 사역을 하고 돈을 받았던 일 등이 적혀 있다.

<그림 4> 심영식이 다녔던 평양맹아학교 여맹학생의 뜨개질하는 모습 (출처: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 2004 <한국맹인근대사>의 화보 중에서)

<맹인실록>과 앞의 동화책은 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비슷하지만 나머지는 사뭇 다르다. 동화책은 ‘혼혈아 키우기’를 봉사 활동 차원에서 기술했으나 <맹인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6.25 직후 양부인이 낳은 아이 열 명을 길러 낸 돈으로 자제를 공부시켰다. 인천경찰서 부근인 관동 집에서 처음에는 한 아이 당 매월 8천 원씩 받다가, 후에는 만원, 마지막에는 만 이천 원씩 받았다. 아이는 우유와 미음을 먹이고 애는 업고 손으로는 뜨개질을 했다. 아이 어머니가 맹인이 어떻게 기르나 해서 2층 계단 밑에 숨어서 확인하고는 갔다.” 한국전쟁 후 시대 단면, 고단한 일상이 보인다.

두 자료의 가장 큰 차이는 가족사 기술이다. 김천년은 심영식의 구술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이렇게 평했다. “알지 못할게 세상사요, 마음대로 안되는 게 인간사라. 독립정신을 자손에게 물려주려고 결혼을 했건만 자기 몸에서 난 아들은 둘 다 진자리에서 가버렸고 자신은 배일 감정이 그렇게도 철저했건만 남편 문○○은 역설적으로 친일사상이 얼마나 강했으면 자기 아버지가 시골에서 찾아왔는데 부자간이 대화를 하면서도 중간에 통역을 세우고 말을 주고받았다는 당시 맹인계에 떠들[돌?]던 웃지 못 할 이야기다.” 남편 문○○은 이달근의 제생원 2년 후배다. 심영식의 구술은 좀 더 담담하다. “독립운동 정신을 자식에게 물려줄 의도에서” 결혼, “자체[제]는 ○○○ 소실 몸에 난 것을 친자처럼 길렀다. 자신은 겨우 둘을 낳았으나 혈우병으로 다 조사[早死]했다.”

심영식이 보았다면 <맹인실록>과 동화책 중 어느 기억을 더 좋아했을까. 그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주1)  ‘시각장애인’으로 검색하면 길선주가 나온다. ‘재한선교사보고자료’ 중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인 존 프레드릭 젠소 John F. Genso가 닥터 브라운(Dr. Brown)에게 보낸 1919년 3월 15일자 편지에 독립선언서 서명자로 ‘평양의 시각장애인 길 목사’를 언급하고 있다. 길선주 본인은 삼일운동 당시 3월 2일 경찰이 취조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자 ‘안력眼力이 좋지 않아’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고, 3월 18일 검사가 ‘금후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묻자 ‘나는 극도의 근안近眼이고 또 몸이 불편해서’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李炳憲, 1959 <三⋅一運動祕史>, 時事時報社出版局, 110, 114쪽. 길선주는 <맹인실록> 인물편에 나오지 않는다.

주2) 이상 인명은 약간 철자가 다르게 기록되었으나 필자가 수정했다. ‘염씨’는 구세군 교인이며 아이가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임명애인 것 같다. 앞의 동화책에는 ‘염씨 부인’으로 나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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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1.3 「遂安事件 七十一名 公判(2)」 『每日申報』

朝鮮總督府濟生院 1922 『朝鮮盲啞者統計要覽(1921年 7月末 調査)』

朝鮮總督府濟生院盲啞部 1938 『朝鮮總督府濟生院盲啞部創立二十五年』

李炳憲 1959 『三⋅一運動祕史』 時事時報社出版局.

이경신 송용현 1965.3 「日人郡守가 ‘大韓獨立萬歲’:開城」 『新東亞』 7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독립운동사 제3권: 3·1운동사(하)』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555-559쪽.

金永玎 編 1984 『集合行動論』 進興文化社, 89쪽.

김진호 박이준 박철규 2009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20권: 국내 3·1운동 Ⅱ-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85-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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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9 『대한독립 그날이 오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6-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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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2019.8 「1919년 3월 황해도 수안 만세시위의 재구성」 『민족문화연구』 84.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판결문’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sam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