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사를 말한다④] 권력과 숲 : 화분 분석으로 본 신라의 소나무 인공 조림 사업_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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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환경사를 말한다]

 

권력과 숲 : 화분 분석으로 본 신라의 소나무 인공 조림 사업

이현숙(중세1분과)

 

한국의 숲

나무는 인간에게 가장 친밀한 생명체 중의 하나로서,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내려왔다는 신단수(神壇樹)와 같이 오래되어 거대한 크기의 나무는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다. 그러나 연탄이 나오기 전까지 난방의 주재료가 나무였기 때문에, 산림 훼손이 심했다.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더욱 산림이 황폐화하여 1960년대까지만 해도 산에 나무가 많지 않아 식목일을 제정하여 공무원과 학생들이 동원되어 매년 나무심기 운동을 하였다. 필자 또한 그 일원으로서 돌산에 손바닥 크기의 어린 소나무를 심었던 경험이 있다. 그 결과 한국의 산림녹화 사업은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성공한 사례로서 구미학계에서 인정받아 서구의 환경 관련 수업시간에 한국의 인공조림이 다뤄지고 있다.

<그림 1> 한국의 소나무 분포도 (출처: 산림청 홈페이지 http://www.forest.go.kr/)

위 소나무 분포도를 보면, 지역에 따라 소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림청은 5년마다 통계를 작성하는데, 2015년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의 산림 면적은 국토면적의 약 64%를 차지하는 633만ha이며, ha당 평균 입목축적은 146㎥로서 OECD 평균입목축적 138㎥보다 조금 높다고 한다. 나무 나이별로는 31년생 이상이 69%이며, 임상별로는 활엽수 32%(203만ha), 침엽수 37%(234만ha), 혼효림 27%(171만ha)이다. 수종별로는 소나무류가 156만ha(24.6%)로 가장 많고, 참나무류가 98만ha(15.5%)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우리의 산림에는 현재 활엽수보다 침엽수로 구성된 숲이 더 많고, 침엽수 산림 가운데 소나무류가 67.5%나 된다.

 

화분 분석으로 본 고대의 숲

태초의 원시림은 한반도에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차 파괴되었다. 개발은 산림 파괴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주거지와 경작지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평지의 나무들이 가장 먼저 사라져갔다. 그런데 한반도는 화강암으로 된 지역이 많고 비가 여름에 집중되어 내리기 때문에, 한번 삼림이 파괴되면 토양 침식이 커서 삼림의 자연스런 재생이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일찍부터 우리 선조들은 산림을 개발하였을 뿐 아니라 삼림 재생을 위해 인공 조림을 하였다. 해안가에는 소나무를 심어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으로 조성하고 냇가에는 홍수를 막기 위해 버드나무를 심었다. 한국 고대에는 어떠한 나무들을 주로 심었을까? 그 실마리는 화분 분석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위 표의 연대 B.P(Before Present)는 현재 이전을 뜻한다. 지금으로부터 4500년전부터 1400년 이전까지 한반도에는 졸참나무와 개서나무, 개암나무, 느릅나무, 호두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활엽수림으로 이루졌다. 그런데 7세기 이후부터 갑자기 소나무속과 초본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본류가 주종을 차지하였던 이유는 벼의 재배 면적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소나무속 나무가 우점종이 된 원인도 인간에 의해서였다.

<그림 2> 울진 금강소나무 길 (출처 : 대전경제뉴스, 2013년 4월 30일자)

 

혼합림에서 소나무 숲으로

한반도의 숲은 활엽수와 침엽수가 혼재되었던 혼합림이었는데, 7세기 들어 왜 갑자기 소나무속이 우점종이 되었을까? 소나무속이 전 시기 동안 우세하게 된 현상은 벌채를 통하여 농경지를 확보하는 등 인간 활동의 영향을 받은 환경에서 2차림(二次林)으로서 급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대대적이 개발과 인공 조림사업이 7세기 이후 일어난 것이다.

한반도에 자생하는 소나무과 나무는 소나무속, 가문비나무속, 이깔나무속, 전나무속, 솔송나무속에 속하는 5속 16종이다. 소나무는 인위적인 산림 복원을 할 때 적합한 수종이다. 그러나 소나무는 높은 광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소나무로만 숲을 이루기 어렵다. 즉 척박한 땅에서 자랄 수 있는 만큼 태양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하게 되고, 군락을 이루게 되면 어린 소나무들은 햇빛이 모자라서 자라날 수가 없게 됨에 따라 자연적인 재생산에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수백 년에 걸친 소나무 군락지는 인공적으로 조림된 곳으로 지속적인 관리가 없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7세기 이후 소나무 화분이 절대적인 우점종이 된 것은 결국 우리 선조들이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심고 관리했다는 의미이다.

누가 소나무를 인공조림하였는가?

7세기 이후 한반도에 소나무속 나무들이 대대적으로 인공 조림이 이루어졌고 이것이 지속적으로 관리되었다면, 그 주체는 누구였을까? 7세기 중엽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사실이 하나의 실마리가 된다. 7세기 중엽 한반도는 전쟁터였다. 신라와 백제 사이에 소소한 전투들이 있다가 660년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함락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쟁의 시기를 견뎌야 했다. 675년 2월 신라군이 20만 당군을 매초성에서 싸워 물리칠 때까지 전쟁이 지속되었다. 장기간의 전쟁은 한반도 숲을 황폐화시키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수레 및 각종 전쟁 도구를 제작하거나 철제 무기를 만들기 위한 땔감으로 대량 벌목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인공 조림이 이루어졌다면 아마도 당군이 철수하여 오랜 전쟁이 끝난 뒤였을 것이다. 활엽수림이 사라진 위에 소나무 속을 집중 인공조림하였다면 그 주체는 신라였을 것이다.

 

왜 소나무인가

중국의 경우,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역에 걸쳐 분포하는 소나무는 건축용으로 최상이었으나 생장이 늦다는 이유로 경제림으로 장려하지 않았다. 6세기 편찬된 제민요술에서 식재를 권장한 나무는 생장이 빠르고 수확이 많은 뽕나무․느릅나무․버드나무․닥나무․옻나무․떡갈나무․대나무 등이었다.

반면 한국사에서 소나무는 일찍부터 등장한다. 고구려 건국초기 소나무를 씨족의 표상으로 사용하는 집단이 있었으며, 후대 성씨처럼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송씨(松氏)로서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을 도운 송양왕(松讓王)의 딸이었으며, 27년 대무신왕은 송옥구(松屋句)를 우보(右輔)로 삼았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로 보건대 만주 지역에 울창한 소나무 숲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몽설화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를 떠날 때 소나무 기둥 밑에 칼을 숨겨두었다고 하는데, 소나무 목재로 건축하던 당시의 생활관습이 투영된 이야기일 것이다. 중국과 달리 우리 민족은 소나무를 일찍부터 애용해왔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고구려시대부터 능원수로서 사용되면서 인공 식재되었다.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왕후였던 우씨가 죽은 뒤 아들 동천왕은 산상왕과 합장하면서 고국천왕의 능원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서 서로 보이지 않게 했다고 한다. 소나무 숲을 만든 것이다.

<그림3> 신라 선덕여왕릉의 소나무 숲 (출처 : 역사문화 라이브러리 https://historylibrary.net/entry/Tomb-of-Queen-Seondeok)

 

신라의 인공 조림 사업

신라는 통일 후 소나무를 공공 기관의 원예림이나 정원수로 이용하였다. 특히 사찰을 조성할 때 주변에 소나무 숲을 인공 조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김인문이 중국 당나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안녕을 빌기 위해 건립한 인용사지의 화분 분석으로 알 수 있다. 인용사지의 두께 120cm의 유기질 습지토양층에서 형성된 약 4천 년 동안의 화분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았다.

위 표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 경주 인용사가 창건된 이후 소나무 속이 80~90%에 달하는 절대적인 우점종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용사 주위에 소나무 숲을 인위적으로 만든 결과이다. 통일 이후 불교 사찰의 건립은 전국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수도 경주에서는 사찰이 너무 많이 건립되어 『삼국유사』에서 “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있는듯 하다”고 할 정도였다. 통일 이후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숲은 사라져갔으며 그 자리에 소나무들이 인공 식재 되었다는 것을 화분 분석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왕건 집안 설화로 본 신라정부의 소나무 인공 조림 사업

그런데 신라는 소나무 인공조림을 경주 일원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에 기록된 고려 태조의 선조 강충 설화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강충은 외모가 단정하고 근엄하며 재주가 많았는데, 서강(西江) 영안촌(永安村)의 부잣집 딸인 구치의(具置義)를 아내로 맞아 오관산 아래 마하갑(摩訶岬)에서 살았다. 당시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풍수에 밝았는데, 부소군에 왔다가 군이 부소산 북쪽에 있을 뿐 아니라 산의 형세는 빼어나나 초목이 나지 않은 것을 보고 강충에게 ‘만약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강충이 고을 사람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후 온 산에 소나무를 심고 군의 이름을 송악군으로 고쳤다. 강충은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또 마하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로 삼고서 두 곳을 오가며 생활했다.”라고 하였다.

설화를 역사 자료로 직접 활용하기는 어렵지만, 설화 속 이야기의 핵심을 잘 파악하면,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자들과 이를 유포시킨 자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야기를 만들고 유포시킨 것은 왕건 세력이다. 고려 건국 후 왕건이 왕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의 설화와 상징들을 만들어냈는데, 강충의 설화도 그 하나이다. 이 설화는 벌거숭이 바위산이었던 부소산에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소나무를 심어 주변의 생태 환경이 개선됨에 따라 왕건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신라의 관리 팔원이 군의 치소를 옮기고 벌거숭이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도록 했다는 점이다. 강충은 신라 관리의 명령에 따라 지방민을 이끌었던 토호였다. 이 설화에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가 고구려 지역의 지방민을 동원하여 소나무 인공 조림사업을 했던 사실이 투영된 설화로 파악된다.

 

촌락문서로 본 인공 식재 사업

통일 이후 신라 관리가 인공 식재를 독려하였던 것은 송악군 뿐만이 아니었다. 신라촌락문서에 따르면, 신라는 3년마다 뽕나무와 잣나무, 닥나무, 가래나무 등 국가에서 필요한 나무를 중앙에서 파견된 내시령과 토착민인 촌주의 지도하에 심도록 하였다. 닥나무는 종이를 만드는 주재료 일 뿐 아니라, 약재로도 사용되었다. 가래나무는 열매는 약용이나 식용으로 사용되며, 재목은 비교적 단단하고 가벼워서 각종 도구를 만드는데 쓰였다.

촌락문서의 내시령과 촌주는 송악군의 신라 사찬 팔원과 강충과 같은 관계이다. 즉 송악군만 아니라 점령지에 인공 식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강충도 소나무만 심은 것이 아니라 신라정부가 명령한 4가지 나무도 심었을 것이다.

<그림 4> 신라 촌락문서 모두 4장이 일본에서 발견되었다. (출처 : 우리역사넷)

신라촌락문서가 작성된 곳은 원래 백제지역으로서 통일 후 신라에 편입된 서원경(지금의 청주) 지역이다. 신문왕 5년(685)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는데, 10년 뒤인 695년에 만들어진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촌락문서를 이해할 수 있다.

모두 4개 촌락에 대한 기록으로서 인구와 수목의 수량이 기록되어 있다. 촌락문서를 토대로 기재된 수목과 이를 심기 위해 동원되었을 정남과 정녀의 수를 함께 넣어 알기 쉽게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위 표로 볼 때, 뽕나무가 압도적인 숫자를 보이며, 잣나무와 가래나무의 숫자가 적어 뽕나무에 비해 조림의 연원이 짧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잣나무와 가래나무는 3년 만에 각 28%와 34%를 심었다는 사실은 이 지역에 뽕나무에 비해 새롭게 심기 시작한 나무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A촌에서 뽕나무를 3년 동안 90그루 즉 9%를 더 심었는데, 이러한 식으로 계속 심었다면 뽕나무 천 그루를 심는데 30여 년 가까이 걸렸다는 의미이다.

부역에 동원되었을 인원수에 비례하여 인공 식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남과 정녀의 숫자가 53명에 불과한 D촌이 심은 뽕나무가 A촌에 비해 231그루가 더 많다. 인공 식재에 동원되는 정남과 정녀가 33명에 불과한 C촌이 이 문서가 만들어지던 무렵 3년동안 뽕나무 90그루를 심었는데, 이것은 가장 인구가 많은 A촌과 같은 수량이었다. C촌은 잣나무와 가래나무는 새로 심지 않고 뽕나무만 심었던 것이다. C촌의 전임 내시령 때 잣나무 13그루가 죽었다는 수기가 첨가되었던 것으로 보아 잣나무가 토양에 잘 안 맞거나 질병이 돌았던 것일 수도 있다. 잣나무 인공 조림이 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된 숫자는 국가에 공납해야 될 품목으로 파악된 나무들일 것이다. 이 시기의 잣나무 인공 조림 사업 덕분인지 청주에는 아직까지 잣나무가 제법 있다고 한다.

 

신라의 잣나무와 잣의 수출

잣나무(Pinus koraiensis)는 그 학명에서 보듯이 한국이 원산지이다. 신라는 통일 이후 새로 편입한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인공 조림사업을 하였는데, 잣나무도 그 하나였다. 신라시대 공납을 위하여 식재를 강권하였던 잣나무는 해송인(海松仁)이라고 하여 중국에 수출하는 중요한 품목이었다. 잣은 특히 약재로도 쓰였는데, 일찍이 무병장수를 기약하는 명약으로 묘사되었다. 열선전에 따르면, 중국 도가에서 태허진인(太虚真人)으로 불리는 전설상의 인물 적송자는 평소 잣을 복용하여 이가 빠지고 새로 났다고 한다.

“해송자의 맛은 달고 약간 따뜻하며 독이 없다. 뼈마디가 쑤시는 것과 어지럼증에 주로 쓰이며 고사한 기육(肌肉)을 제거하고 백발을 바꾸고 수기(水氣)를 흩어주고 오장을 윤택하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한다. 신라에서 나는데 작은 밤 같으며 삼각이다. 그 안은 매우 향긋하고 맛있는데 동이에서 과(果)를 먹는데, 중국의 송자(松子)와 같지 않다.” – [도경연의본초] 권 36, 과부 중품, 해송자

[도경연의본초]는 송대에 편찬된 본초서이지만 당대의 기록을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위 인용문에서는 고려산 잣이 아니라 신라산 잣이라고 하였다. 신라산 잣은 당나라에서 약재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맛좋은 견과였다.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잣은 중요한 수출품이었다. 고려 혜종은 후진에 사신을 보내면서 다양한 선물을 함께 보냈는데, 여기에는 잣 5백 근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려왕자 의천(1055-1101)이 송나라에 유학 갔을 때 중국 고승들을 위해 특별식으로 잣을 가지고 갔다. 이처럼 잣은 신라에 이어 고려에서도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즐기는 음식이었다.

 

한반도의 소나무 숲

현재 한국의 산림의 상당 부분을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한반도 중남부의 화분 분석 결과 7세기 이후 소나무속 화분이 절대적인 우점종이 된 이유는 한반도 토양 특성상 소나무가 생장하기 적합하여, 신라에 의해 소나무 속 인공 식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신라의 지방관리는 고구려와 백제의 새로운 점령지에 부임하여 숲 훼손으로 황폐한 지역에 2차림 조림사업을 대거 시행하였으며, 해외수출용 잣 확보를 위해 잣나무의 인공식재 또한 독려하였다. 신라의 조정에서는 이를 문서로 만들어 3년마다 인공식재사업의 결과를 보고 해당 지방관리의 인사고과에 반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숲을 파괴할 뿐 아니라 인간의 편의에 맞게 숲을 재편해왔다. 신라는 황폐지에서 빨리 자라는 소나무 숲을 인공 조림하였으며, 소나무 속 잣나무를 새로운 점령지에 지속적으로 식재해갔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서 7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소나무 속 화분이 80~90%에 달하는 절대적 우점종이 되었던 것이다.

소나무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수종이다. 그러나 재선충병과 기후변화로 인해 점차적으로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일찍이 소나무는 집을 짓는데 대들보나 기둥 나무로 이용되었으며, 꽃가루와 송진은 약으로 사용되었다. 소나무가 송(松)이라는 한자어의 영향을 받은 것에 비해 잣나무는 여전히 우리 고유어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소나무에는 사실 잣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산 잣이 동아시아의 귀한 식재 및 약재로 유명할 수 있었던 연유도 신라의 인공조림 사업의 결과물이었다. 즉 신라의 권력자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한반도의 숲을 재편해 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