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③] 재북(在北)의사의 글쓰기_김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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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재북(在北)의사의 글쓰기

 

김진혁(현대사분과) 

 

1965년 개봉한 영화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는 1910년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진 의사의 비극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에 휘말렸던 주인공은 머물러야 하는지, 떠나야 하는지를 늘 선택해야만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징집되었으나, 자유주의적 심성을 가진 그는 러시아 혁명정부를 거부하고 우랄산맥의 오지를 떠돌았다. 그러다 백군에게 사로잡혀 볼셰비키와의 전투에 또 다시 군의로 내세워지게 된다. 전쟁과 혁명, 반혁명, 삶의 극단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반대편이 되어버리는 이 같은 장면들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과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림 1> 닥터 지바고

물론 의사 출신들 중에서도 세상에 내몰리는 것이 아니라, 이에 맞섰던 지사(志士)와 같은 의사들도 꽤 있었다. 3‧1운동의 도화선을 당겼던 주역들,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독지가들, 독립운동의 작은 기지가 되어주었던 만주와 몽골의 개업의들 등등. 하지만 식민지 의사들이 대체로 의업을 선택한 이유는 식민지 지식인이 갖는 한계를 절감한 상황에서의 현실적 판단이었다. 일본인들에 의한 차별을 피해 독자적으로 개업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일로써 의업을 선택했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의사들은 쓸 만한 존재였다. 사람 살리는 기술을 가진 이들은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수 있었고 실제 유용했다. 때문에 의사들은 어디서나 살아남기 어렵지 않았다. 이를 기회주의자라는 극단적인 예로 꼬집었던 1962년 출간된 전광용의 『꺼삐딴 리』는 함흥에서 개업했던 김명학이라는 개업의를 모티브로 했다고도 전해진다[김석형,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선인, 2001)]. 소설에서 이인국 박사는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어, 소련 아래에서는 러시아어, 월남 후에는 영어를 배우며 친일‧친소‧친미 삼박자로 처세의 능수능란함을 보여준다.

그에게는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부역자, 친일파 등과 같은 꼬리표가 쉽게 붙을 만했다. 이렇게 살았던 의사들 중에는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이름을 올린 이들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닥터 지바고와 같은 비참한 삶과 이인국 박사의 삶이라는 양 극단 사이의 간극 어딘가에서 다양하지만 조용하게 살아갔다. 이들의 고민은 일제 치하 및 해방 전후의 정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 살아남아야 하는가를 되뇌였을 일군의 지식인, 소시민들과 그렇게 멀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38선 이북에 있었던 의사들(이하 ‘재북의사’) 대개는 식민지 시기 동안 연구실에서 일본인 교수와 학생에게 차별을 받느니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개업을 하겠다고 결심했던 의사들이었다. 하지만 식민지에서의 해방 이후, 38선 이북에서는 자유주의적 삶을 누리던 이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혁명의 정책들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북한 정부의 리더들에게 재북의사는 양가적 감정을 갖게 하는 존재였다. 항일운동의 일선에서 뛰었던 일부 의사를 제외하면, 지역유지로 살아가면서 일본 제국주의가 쌀과 물건을 거둬가고 사람을 끌고 가는 모습에 침묵했던, 반쯤은 협력자로 인식되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친일파로 모두 묶어버리고 도매급으로 처분하고 싶었겠으나, 그러기에는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갈 동량(棟樑) 하나가 아쉬운 처지였다. 이북에서 의사(서양의사)는 천 명 남짓한 숫자로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해방 직후의 북한은 친일파 척결 인민재판, 1946년 토지개혁, 중요산업국유화 등의 조치로 이미 문제의 소지가 될 기술인들이 남쪽으로 빠져나간 상태였다. 이는 북한 정치세력의 입장에서 나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안 되겠다 싶은 사람들이 길목만 막아놓은 38선을 넘어 제 발로 알아서 내려갔다. 그래서 대개 고향인 이북에 있어도 심각한 친일행적으로 지목 받지 않을 사람들이 남았다. 남쪽 문이 열려있으니 북한에서 못 쓰는 사람들은 알아서 내려갔고, 남쪽에서 쓸 만한 사람들을 데려와야 했다. 특히 김일성대학교를 창설하면서 필요한 교수인력들을 대거 확충해야 했다. 마침 서울은 국립대학설립안으로 좌우파벌 갈등의 불이 붙은 상황이었고 북에 올라오면 특별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니 남쪽 사정에 정을 붙일 수 없는 이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이북에 남은 중요 인력들은 남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야 했다. 이남의 치솟는 의료비가 이북에서는 거꾸로 돈 벌 기회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의료국영화니 이런 이야기로 이들이 놀라면 안 되니, 이는 뒤로 미뤄두고 개업을 허가해주었다. 인민병원에 들어와도 봉급도 최상급으로 쳐주고 퇴근 후에는 개인의원에서 진료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렇게만 보면 만족했을 것 같지만, 일제시기에도 자신의 영업 테두리 안에서 제한된 자유로움을 누렸을 이들에게 이북사회의 변화는 예사롭지 않았다. 이들에게도 요구하는 게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능력 보다 사상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1948년부터 의과대학 교원 선발 기준에는 사상성이 능력 보다 앞서기 시작했고 교원들에게 맑스레닌주의 학습을 요구하였다. 자아비판의 문화도 일상적이게 되었다. 김정남의 고모인 성혜랑이 쓴 등나무집(지식나라, 2001)을 보면, 1952년 전쟁기이긴 하지만 김원주(김정일의 장모)가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고 우유를 마신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빈농과 노동자가 주인인 나라에서 과거에 풍족한 삶을 누려야 했던 것은 다른 누군가의 착취에 의해 그것을 누렸다는 설명이 되고 반성할 거리였다.

식민권력과의 충돌을 피해 소시민으로 조용히 살았을 이들에게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해방이 되었더니 그 해방이 자기의 해방이 아니라는 감정이 증폭되었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들의 느꼈을 생각은 이들이 쓴 자서전과 이력서에 흔적이 남아있다. 이 글은 북한에서 어디서나 자신을 평가할 때 기본 참고자료로 평생 뒤따라왔는데, 신원 보증인 2인과 가족들의 이름, 친한 친구들의 이름도 모두 기입되어 있었다. 불리한 내용을 줄일 수는 있어도 거짓으로 쓸 수는 없었고, 권력의 평가로서의 시선과 자신의 이야기로서의 감정이 이 지면들에 뒤엉켜있었다. 자서전을 쓰면서 자기 이야기를 혁명서사에 이어붙이고 조국에 헌신하겠다는 결의까지 아교를 단단히 발라 부산한 감정을 다스렸을 것이다.

<그림 2> 이력서와 자서전 예시(출처: [평양의학대학 교직원이력서](1948), 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재밌는 것은 자서전을 쓰는 방법을 안내해줬다는 것이다. 「自敍傳作成要綱」(1947)은 부모의 직업과 사상, 연령별 이력, 일제 협력 또는 “혁명사업” 참여 여부, 3.1운동, 해방 등등 역사적 사건마다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을 상세하게 서술할 것을 요구했다. 일 년에 열 번꼴로 썼다는 교육성의 간부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단지 사실만을 확인하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북조선”을 만들기까지의 공식서사인 식민지 항일무장투쟁, 해방 이후 여러 사회개혁들 그리고 이상의 모든 서술에 대한 평가와 다짐을 쓰도록 했으니 자서전 쓰기는 자아비판과 자기 교양의 연장선상에서 의미를 가졌던 듯하다.

매번 자서전을 쓰면서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몇 번의 반성이 더 필요할까를 괴로워했을까. 3‧1운동, 동맹휴학, 비밀결사에 참여했고 투옥되어 고초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이들은 일부였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향락적이고, 관념론적이었고 자유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자아비판 해야 했다. 어쩌면 지금에서 취업 이력서와 “자소설”을 쓰는 방식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자기 전략적 글쓰기. 불리한 것은 약하게, 아니면 반성이 된 경험으로 서술하는 것.

그런데 금수저와 흙수저가 바뀐 세상이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이들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출신성분이었을 것이다. 중농, 지주 등으로 적어야 했던 이들은 매번 자아비판 대상자 영순위였기 때문이다.

소련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서전을 썼는데, 소련공민들의 내밀한 삶을 다룬 속삭이는 사회(교양인, 2013)에는 이와 관련된 노년 부부의 이야기가 있다. 죽기 전에 남편이 유언같이 사실 자신이 반혁명 불순분자 출신이었다고 말했는데, 부인도 하는 말이 자신도 그렇다고. 평생 동안 과거를 숨겨 살던 부부는 그렇게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각자의 과거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소련은 멀리 도망가서 과거를 숨길 수 있었지만 좁은 북한에서 출신 세탁은 불가능했다.

자서전을 쓰면서 재북의사들은 마음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영민한 전략적 글쓰기와 국가가 요구했던 교화에 성공한 이들은 문제없이 북한에 남았을 것이고, 또 국가가 기대한 효과를 보지 못한 이들은 떠나거나 숨죽여 살았을 것이다. 물론 이들의 운명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전쟁이 터졌고, 북한에서 일련의 숙청이 이어지면서 일부 유학생들도 돌아오지 못했던 1950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이들의 복잡한 마음만 자서전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