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환경사를 말한다③] 생태환경사로 본 한국 고대의 숲_서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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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생태환경사를 말한다]

 

생태환경사로 본 한국 고대의 숲

 

서민수(고대사분과)

 

* 이 글은 서민수, 2017 <삼국 초중기의 숲 인식 변화>, <<역사와 현실>> 103; 2018 <신라 중고기 왕경의 숲 개간과 경관 변화>, <<한국문화>> 81의 내용을 추려 줄이고, 조금 보탰음을 밝힙니다.

지난 2월 9일,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산불방재청은 6개월간 꺼지지 않던 산불이 완전히 진화되었다고 선언했다. 집중호우 덕분이었다. 그동안 호주 산불은 숲과 들 1,070만 헥타르 이상을 소각했다. ‘서울시 면적의 165배’ 정도라니 엄청난 규모였음이 체감된다. 화재로 30여 명이 죽고 수천 채의 주택이 불탔다. 기록적 폭염이 뒤따랐고, 대기질이 나빠져 장기적 호흡기 질환이 경고되었다. 나무가 사라져 비가 내리면 대형 산사태나 홍수가 날까 우려한다. 인간의 삶만 망가진 게 아니다. 숲에 사는 야생동물 10억 마리 이상이 타죽었다. 산불재가 강과 호수로 유입되면서 물고기도 떼죽음을 당했다.

호주 산불의 원인은 대체로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패턴의 이상으로 본다. 목화 재배를 위해 강바닥이 말라붙을 정도로 지하수를 끌어다 쓴 점도 지적된다. 방화설이 제기되는 등 산불 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있지만, 어쨌든 생태와 기후환경을 교란한 인간의 과도한 개발에 책임은 있다고 보는 셈이다. 그러니 산불의 불씨는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사라진 숲과 멈추지 않을 인간의 개발이 생태와 기후환경의 불안정을 가속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사진1> 불타는 호주의 숲(출처:빅토리아 주 환경보호국)

 

한국사에서 숲 연구의 동향

생태환경사는 자연환경과 인간사회가 상호작용한 역사를 다룬다. 호주 산불처럼, 숲과 인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한 상호관계성을 역사의 시간 범주에서 헤아린다. 인류는 지구에 첫발을 내딛은 때부터 목재, 임산물, 광물, 단백질 자원 등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숲에서 얻었다. 숲을 베어낸 공간엔 농경지나 마을을 마련했다. 국가 권력은 농지 개간, 촌역의 구획, 시지(柴地) 지급, 벌목과 조림, 토산물의 분정과 수취 등 여러 조치로 숲을 통제했다. 숲 보호와 개간 사이에 놓인 생태 균형의 추가 기울면, 호주 산불처럼 예측치 못한 재해가 이어지고 온 지구생명체의 생존이 위협받기도 했다.

한국사에서 숲과 인간의 상호관계성을 다룬 연구는 드물다. 2013년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에서 개최한 학술회의 “한국의 숲과 인간, 상호성의 변천사”가 생태환경사의 관점에서 숲 연구의 시작이었다. 우리 연구회 생태환경사연구반도 2016년 “숲과 권력: 생태환경사로 한국사 읽기”, 2017년 “숲과 권력, 그리고 재해: 생태환경사로 한국사 읽기2”를 주제로 연달아 학술회의를 진행했다.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도 2017년 국제학술회의 “동서양 역사 속의 숲과 권력”을 열었다. 네 번의 학술회의로 한국사의 시대별 숲 연구가 두루 제출되었다. 모두 숲을 다뤘으나, 각기 독립된 논고로서 성격이 짙다. 한국사에서 숲과 인간이 상호작용한 역사 전체를 꿰는 포괄적 이해에 이르기에는 부족했다.

<그림2> 한역연 ‘숲과 권력’ 학술대회 포스터

 

고대사로 시간의 범주를 좁히면 숲 연구는 거의 없다. 숲을 제정(祭政)이 이뤄지는 성역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더러 있지만, 생태환경사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다. 숲 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 연구의 저조는 물론 사료 부족에서 기인한다. 다만 생태환경사의 관점, 즉 자연환경과 인간사회가 상호작용한 역사에 무관심한 학문적 분위기 탓도 있다. 숲 같은 자연환경을 인간의 역사가 전개되는 배경이나 무대로 여겼다. 숲의 공간적 이미지나 생태적 특징을 지우고 미개간지로 독해하기도 했다. 농업생산력 증대에 따른 고대국가의 성장을 주목한 지난 연구 경향에서 숲은 아직 농경지로 전환되지 않은 공간에 불과했을 터다.

그러나 숲은 고정불변의 배경이나 무대장치가 아니라, 자연 천이(遷移)와 인간 개입으로 변화하는 생태계다. 생태 변화의 방향에 따라 숲과 인간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재구성하는 무수한 상호작용의 역사를 거쳤다. 그간 ‘미개간지’로서 숲은 농업생산을 가늠하기 위한 지표였지만, 생태환경사는 자연환경을 향한 인간 개입이 확대된 흔적으로 독해한다. 자연환경과 인간사회의 상호관계성에 주목하는 이 같은 관점에서 비로소 숲은 인간사회와 관계한 역사의 공간으로 조명된다. 생태환경사의 눈으로 과거를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고대의 숲 인식 : ‘외부세계에서 내부세계

한국 고대사는 숲과 인간사회가 상호작용한 역사를 논하는 출발선이다. 그보다 더 먼 ‘고대’에도 인간과 숲은 상호관계를 형성했지만, 문헌 기록이 없어 상호관계성의 구체적 내용은 알기 어렵다. 다행히 자연과학 분야의 연구로 과거의 숲 환경을 대강 스케치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만빙기(Late Glacial Stage, 약 18,000~10,000년 전) 동안 한반도는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는 초원과 같은 환경이었다. 그러다 약 7천 년 전 ‘홀로세 기후 최적기(Holocene Climate Optimum)’를 지나며 한반도는 숲으로 뒤덮였다. 숲은 나무가 빽빽하게 자라 수관(樹冠)이 하늘을 뒤덮는 울폐림(鬱閉林)의 경관을 이뤘다. 종종 이상기후가 닥쳤고 인간도 나무를 베어냈지만, 숲의 확장 속도를 앞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인간은 마치 숲이란 바다에 에워싸인 섬 같은 존재였다.

숲을 향한 가장 오랜 인식은 단군신화에 보인다. 환웅은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왔고, 그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여기서 신시의 ‘시(市)’를 문맥상 초목이 무성한 모습이란 의미인 ‘불(巿)’로 읽는 의견이 있다. ‘신불’이라면, 신단수와 그 곁에 초목이 무성한 신의 숲 내지는 신성한 숲으로 해석된다. ‘신시’로 읽는대도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 즉 신단수와 주변부 산림으로 구성된 공간으로 이해된다. 서사 속 곰과 호랑이의 서식지도 숲이다. 단군신화를 구전한 고대인은 먼 옛날 신 같은 존재가 강림한 지상 공간을 산 정상부의 나무와 숲으로 여겼다.

신라의 건국신화에도 숲이 보인다. 혁거세는 나정 곁의 숲에서 태어났고, 알지는 시림(始林)의 궤짝에서 태어났다. 탈해는 배의 궤짝에 들어있었는데, 그를 발견한 한 노파가 나무 숲 아래로 배를 끌어 하늘에 길흉을 점쳤다. 숲은 건국시조의 탄생과 연결된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졌던 듯하다. 이 숲들이 모두 평지에 위치하는 점도 주목된다. 단군신화의 숲처럼 천상과 지상이 맞닿는 산 정상부가 아니었다. 입지에 상관없이 숲이란 공간 자체에 신성이 부여되었다.

<그림 3> 오늘날의 계림(출처: 산림청)

고구려에서는 수신(隧神)이나 부여신(夫餘神) 같이 나무를 깎아 만든 신을 모셨다. 이는 고대 북방민족의 신목(神木) 제의와 접점이 있다. 그들도 살아있는 나무, 잘려진 나뭇가지, 나무기둥이나 나무인형 등을 신목으로 삼아 제사지냈다. 그런데 북방민족의 신목 제의는 숲을 향한 제의에서 연원했다. 흉노는 가을철 ‘대회대림(大會蹛林)’, 아마 숲 주위를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제의를 치른 듯하다. 이 습속은 선비에게 전해졌는데, 그들은 숲이 없으면 버드나무 가지를 세워 대신했다. 버드나무 가지, 즉 신목은 신성한 제의 공간인 숲을 대신하는 의미였다. 이는 고구려 신목 제의의 원형이 숲에서 연원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의 ‘신목’인 수신이나 부여신이 버드나무 꽃을 뜻하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인 점도 연결고리다. 그밖에 삼한의 별읍 소도에서 귀신을 모시려 큰 나무를 세운 것도 신목 제의의 일종이다.

왜 신화나 제의 공간으로 숲을 배치했을까. <산해경> 등 고대 중국문헌을 검토한 이토 세이지(伊藤淸司)는 인간의 일상 공간인 마을과 밭을 ‘내부세계’로, 인간에게 길들지 않은 산림수택(山林藪澤)을 ‘외부세계’로 정리했다. 오랫동안 벌채되지 않은 거목들로 빼곡한 숲 속은 어두컴컴하고,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맹수나 미지의 생명체가 사는 야생의 공간이었다. 내-외부세계 구분은 단순하지만, 당시 인간사회의 질서와 안전, 경험과 소속감 등을 느끼는 공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구별하는 틀로 유용하다. 기원전후 경까지 울폐림의 경관을 이뤘던 한반도 일대에서 사방이 트인 마을과 그를 에워싼 숲의 대비는 더욱 뚜렷했다. 한반도 일대에서 숲을 배경으로 삼은 신화적 서사나 숲에서 연원한 제의 형식이 남아있는 것은 숲을 비일상의 ‘외부세계’로 여긴 고대인의 심성에서 비롯했다.

<그림 4> 시라타니운스이쿄(白谷雲水峡). 영화 ‘원령공주’의 배경인 원시림으로 산림수택의 전형이다(출처: 투리스타 재팬)

기원 전후 경 한반도의 숲은 감소했다. 인간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목재의 소비가 늘고 농경지 확보를 위한 숲 개간도 가속화했기 때문이다. 부러지기에 십상이던 선철제 공구 대신 강철제 도끼가 생산되면서 벌채의 효율도 높아졌다. 이 같은 인간사회의 여러 활동이 복합 작용한 결과 숲은 점차 해체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인간은 일상 유지를 위해 나무를 꾸준히 베어냈지만, 숲의 확장 속도를 뛰어넘는 개간은 한국 고대사의 시작과 가까운 어느 시점부터였다.

숲의 해체는 숲의 피복율 감소뿐 아니라, 숲과 인간사회가 형성한 상호관계성의 변화를 뜻했다. 변화의 방향은 ‘외부세계’에서 ‘내부세계’로 전환이었다. 수 천 년 동안 인간사회를 에워싼 숲이 개방되면서, 마을의 안팎을 나누었던 뚜렷한 대비는 사라졌다. 숲으로 접근성이 향상되면서 그만큼 일상의 영역도 확장됐다. 다만 목재의 수요는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 더 높았고, 벌채와 개간에 쓰인 철제농공구도 고대국가의 지배층이 집중 소유했다. 때문에 숲의 해체는 공간적으로 불균일하게, 대개 고대국가의 도성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숲으로 본 신라의 왕경 개발

신라의 중심은 세 하천이 둘러싼 경주분지, 즉 현 경주시내와 그 주변이다. 이곳은 오랜 역사 때문일지 옛 숲에 대한 기록이 많은 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알지가 태어난 시림과 그 다른 이름인 계림, 전불(前佛)시대의 절터로 알려진 천경림과 신유림, 일월제(日月祭)가 행해진 문열림,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주조한 문잉림, ‘김현감호(金現感虎)’의 배경인 논호림 등을 전한다. 조선시대 문헌 『동경잡기』와 『경상도읍지』, 그리고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의 『朝鮮の林藪』도 비보수, 오릉림=남정수, 북수, 고양수=논호수, 유림, 서부렵림, 지북림, 임정수, 어대수, 오리수, 봉황대 숲, 한지수, 왕가수, 고성수 등을 기록했다. 모두 신라 때부터 있던 숲은 아니겠지만, 경주분지의 숲 생태와 경관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담았다.

<그림 5> 세 하천(북천, 서천, 남천)에 에워싸인 경주분지(출처: Google 지도)

고고학 발굴 성과에 따르면, 경주분지에 유적이 조영된 것은 3세기 전후부터다. 월성 일대에서 3-4세기대 유구가 확인되었고, 묘역도 4세기부터 쪽샘 지구와 월성로 부근에 마련되었다. 그런데 경주분지에서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경주분지 바깥이나 경주시 외곽에 비해 늦은 편이다. 예컨대 영남의 초기 묘제인 목관묘는 기원전 2세기말~1세기 초에 군집 조성되었다. 비슷한 시기 경주에서도 목관묘와 목곽묘가 만들어졌지만, 경주분지와 거리가 있는 경주시 외곽의 산골짜기에서였다. 경주분지와 근접한 황성동이나 탑동과 비교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경주분지 북편의 황성동 유적은 이르게는 기원전 1세기 후반, 늦게는 2세기경 형성되었고, 3~4세기를 지나면 공간이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팽창했다. 경주분지 남쪽에 맞닿은 탑동 21-3·4번지 목관묘는 1세기 후반~2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다. 경주분지는 탑동과 황성동 사이에 낀 위치임에도 유적 조성은 3세기 전후로 유달리 뒤늦다.

유적 조성의 추세로 미루어보면 경주분지는 3세기 이전까지 인적이 드문 공간이었다. 인간의 개입이 적었던 만큼 숲은 발달했다. 물론 경주분지에서 나무를 베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들이 소유한 간단한 철제 도구로 숲의 복원 속도를 넘는 개간은 어려웠다. 경주분지의 지형 특성상 곳곳에 형성된 저습지도 경주분지로 진입을 방해했다. 즉, 경주분지는 인간 간섭에 벗어나 숲이 번성한 ‘외부세계’와도 같은 공간이었다. 일상 공간과 구별된 이 숲은 시조의 신성한 탄생과 연결되기도 했다. 닭 울음소리가 들려 숲으로 가보니 금궤가 걸려있었다는 알지의 탄생담은 경주분지 내 계림을 배경으로 했다. <삼국유사>에서 ‘전불 시대의 일곱 가람터’로 든 천경림(天鏡林), 삼천기(三川歧), 신유림(神逰林), 용궁남(龍宫南), 용궁북(龍宫北), 사천미(沙川尾), 신유림(神逰林), 서청전(婿請田)도 참고된다. 일곱 장소는 토착신앙의 성소로서 신라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 원래 자연경관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준다. 경주분지 바깥에 있었던 서청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숲과 저습지였다.

3세기 이후 ‘외부세계’던 경주분지로 인간의 개입이 점차 확대되었다. 경주분지가 ‘내부세계’로 전환되는 과정은 경주분지의 고분군 조성 추이가 참고된다. 대릉원 동쪽의 쪽샘지구에서는 2007년부터 4~6세기의 고분 531기가 확인되었다. 쪽샘지구의 서쪽으로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이 이어지는데, 마치 이 일대를 경주분지의 묘역으로 기획한 것처럼 밀집해있다. 5세기 이후에는 초대형 적석목곽분도 등장한다. 그런데 이 고분군 사이사이에는 소하천과 용천천이 있어 여름철 강수량이 늘면 주변은 범람원이 된다. 처음에 이 일대를 묘역으로 쓰기 위해 지대가 낮은 데 형성된 저습지를 육지로 개발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했다. 습지에서 자란 초목을 제거하고 땅을 고르는 작업도 병행됐다. 즉, 경주분지에서 묘역 조성은 그만큼 숲 개간이 가속되었음을 반영하는 지표다. 묘역 뿐 아니라 농경지, 주거지, 궁궐과 관아가 들어설 공간을 마련하는 데도 이와 비슷한 작업이 필요했다.

<그림 6> 군집 조성된 경주고분군(출처: 경주시청)
<그림 7> 대릉원 동편의 쪽샘지구. 2007년부터 500기 이상의 고분이 확인되었다(출처: 서라벌신문)

4~5세기 경주분지의 숲과 저습지가 인간의 생활공간으로 전환하는 추세에서 토착신앙의 성소도 베어지는 일이 있었다. 5세기 초반 실성왕은 토착신앙의 성소인 신유림으로 입산과 벌목을 금지했다. 그 무렵 신유림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실성왕은 ‘신이 노니는 복된 땅’임을 명분으로 접근을 차단했던 것이다. 이미 ‘외부세계’로서 숲의 신성은 균열되고 있었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흥륜사가 낙성된 천경림의 사례도 주목된다. 천경림은 흥륜사 조영을 위해 ‘대대적으로 벌채[大伐]’되었는데, 서까래나 대들보로 쓸 목재가 넉넉했다고 전한다. 6세기 전반까지도 천경림은 인간의 간섭에서 벗어나 울창한 숲 경관을 지켜왔지만, 이제 개간에 가장 보수적이었을 토착신앙의 숲마저 해체 가능한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숲 해체의 획기는 이방제의 실시였다. 4~5세기의 숲 개간은 묘역 조성의 사례처럼 경주분지 내 일정 공간을 국지적으로 개발하는 형태였다. 그런데 이방제는 경주분지 전체에 장기적으로 격자형 도로망을 구획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숲 개간의 관점에서 바꾸어 말하면, 이방제의 선결과제로서 도로 구획에 방해되는 숲과 저습지는 모두 잠정적 해체 대상이 되었다. 토착신앙의 성소던 천경림의 벌채와 흥륜사 낙성도 경주분지의 격자형 도로 구획과 관련 있다. 동아시아에서 고대 도성을 건설할 때는 도시의 중심축을 먼저 정했는데, 신라의 경우 흥륜사와 황룡사를 잇는 동서방향의 도로가 동서 중심 축선이었다. 왕경의 동서 중심축이 설정되면서 축선의 서쪽 끝의 천경림은 ‘대대적으로 벌채’되었다. 축선의 동쪽 끝에는 용궁이라 불리는 저습지가 있었는데, 흥륜사가 낙성되고 얼마 후 매립되고 황룡사가 들어섰다. 격자형 도로 구획이 얼마나 완전하게 구현되었는지 여부를 떠나, 토착신앙의 숲과 저습지도 얼마든지 개간할 수 있다는 고대인의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림 8> 신라 왕경의 격자형 도로 복원안(출처: 이은석, 2003)

이로써 인간의 접근이 제약되었던 경주분지는 점차 인간의 일상 공간인 ‘내부세계’로 바뀌었다. 경주분지의 구석구석이 궁궐과 관아, 사찰, 도로, 주거지와 묘역, 농경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토착신앙의 공간마저 해체되었다. 왕경 개발을 위한 숲 개간과 저습지 매립 현장이 가시화하자, ‘외부세계’로서 숲의 이미지도 함께 해체되었다. 비단 경주분지에만 국한되는 사례는 아니다. 시공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한국고대사에서 인간 활동의 대부분은 숲을 해체하고 인간의 일상 영역으로 삼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