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①] 성(sex)을 통해 본 북한체제_김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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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영상으로 본 북한]

 

성(sex)을 통해 본 북한체제

 

김재웅(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강사)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어느 인디밴드의 공연 도중, 한 멤버가 바지를 내려 성기를 노출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그들의 공연을 내보낸 방송 프로그램은 즉각 폐지되었고, 뒤늦게나마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많은 인디밴드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된서리를 맞아야 했다. 공연 중의 성기 노출은 당시 한국의 문화적 정서에 비추어 보아도, 지나치게 선을 넘은 사건임이 분명했다.

생방송에서 성기를 노출하여 방송정지를 당한 밴드 카우치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북한의 매체가 격앙된 어조로 그 사건을 비판한 일이었다. 북한의 한 아나운서는 마치 한국이 윤리와 도덕마저 결여한 사회인양,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날선 비판에 열을 올렸다. “타락한 문화”에 둘러싸인 “남조선 동포들”에 대한 진지한 충고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예민하고 격한 반응이었다. 필자는 북한의 그러한 반응으로부터 성(sex)에 대한 그들의 불편한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북한이 성을 금기시하고 불편하게 여긴다는 점은 인디밴드의 성기 노출 사건 만큼이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북한을 비롯해 진보적 사회개혁을 추구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유독 성에서 만큼은 보수적 시각을 견지했다는 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역설적 현상이 발생했을까?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인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누구보다도 여성 해방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성 억압의 역사가 사유재산제의 출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사적 소유가 일부일처제에 기초한 가족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여성들이 남성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에 결박되었다는 진단이었다. 따라서 엥겔스는 사적 소유의 폐지, 여성들의 공적 산업 진출, 사적 가사 노동의 공적 산업 전환 등을 통해 여성 해방의 과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그에게 여성들은 “가사 노예”에 다름 아니었고, 가족제와 가부장제는 그들을 결박하고 있는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가족제를 여성 해방의 걸림돌로 본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은 후계자들의 지지를 얻지도, 계승되지도 못했다. 사실 사회주의권 국가들에서 여성정책·가족정책의 급작스런 선회는 스탈린 집권기 소련 사회정책의 산물이었다. 가족을 중심적 사회 단위로 복원한 이 시기의 사회정책은 어린이를 양육하는 공간으로서 가정의 역할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어머니상은 영웅적 사회주의자의 모범으로, 모성 역할은 사회주의적 의무로 규정되었다. 곧 여성들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혁명적 자녀를 길러내는 과업이었다. 엥겔스가 그토록 타파하려 한 전통적 성역할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공고한 입지를 구축해갔음을 볼 수 있다.

한편 미래의 헌신적 산업 역군으로 성장할 혁명적 자녀의 육성이 강조되었다는 점은 가족제도의 폐지 및 전통적 성역할의 척결과 같은 혁명적 과제가 산업화와 생산성 향상이란 국가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 뒷전으로 밀려났음을 의미한다. 성에 대한 관점이 보수화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 노동자들의 방탕한 성생활은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될 리 없다고 인식되었다.

레닌의 아내인 크루프스카야(Nadezhda Konstantinovna Krupskaya)는 『레닌의 추억』이란 저작을 통해, 성생활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절제한 성생활은 부패의 징조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비상하는 계급이다. 그들은 자신을 흥분시키거나 원기를 소모하는 성적 탐닉과 음주에 의한 마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곧 그녀는 공산주의적 이상으로부터 투쟁의 기운을 흡수해야 할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게, 섹스는 전혀 불필요한 곳에 힘을 쏟아 붓는 낭비에 다름 아니라고 인식하였다.

레닌의 아내 크르푸스카야

스탈린 집권기에 저술된 다른 많은 작품들도 섹스의 유해성을 강조하였다. 레오노프(Leonid Maksimovich Leonov)는 1930년에 쓴 소설 『벌집』을 통해 섹스와 담배와 술을 포기한 뒤, “내일의 정치적 노동”에 필요한 근력을 세 배로 높일 수 있었던 어느 공산당 영웅의 절제력을 숭고하게 묘사하였다. 1936년 『프라우다』의 한 기사는 “자유연애와 해방된 성생활이 모두 부르주아적”이라고 역설했다. 그 기사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섹스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소련의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소련에서 형성된 이상의 모든 문화와 가치들은 해방 후 북한 사회에 이식되었다. 가족제도와 전통적 성역할 옹호, 부정적 섹스관, 사적 욕망의 절제 등의 가치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강조되었다. 부정적 섹스관이 생산성 향상의 과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듯, 그것은 해방 직후 북한의 노동·보건·보험 정책에까지 반영되었다. 섹스 자체가 부정적으로 인식됨에 따라 그를 통해 감염되는 성병은 어떠한 사회적 동정과 관용도 얻을 수 없는 질병으로 분류되었다. 사회보험 혜택의 대상인 노동자들은 성병에 걸렸을 경우, 무상 치료를 받은 다른 질환자들과 달리 의료비의 대부분을 부담해야 했다. 일반질병·결핵·정신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부양가족들도 의료비의 상당분을 보조받을 수 있었으나, 성병에 걸린 이들은 전혀 의료비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성병에 대한 냉혹한 관점과 처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49년경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은 “성병 감염 죄”라는 이색적 죄목을 신설하였다. “자신이 성병에 걸린 줄 알면서 그 병독을 타인에게 옮긴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성병에 걸린 노동자가 사회보험을 통한 치료비 지원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성병을 옮기는 행위가 범죄가 되었다는 점은 성병이 노동력 손실을 조장할 수 있는 해악으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의 성병 만연은 소홀히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듯하다. 1947년 인민경제계획은 전국에 걸쳐 총 17개소의 성병 보건소 신설을 계획해, 성병 확산을 막고자 하였다. 곧 성병 확산 방지는 노동력 손실을 억제함으로써, 인민경제계획의 완수를 보장할 수 있는 조치였다.

한편 1946년경에 포고된 “남녀평등권법령”도 북한 역사에서 성(sex)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킨 계기 중의 하나였다. 공창·사창·기생제도(기생권번·기생학교)를 금지해 매매춘을 불법화한 남녀평등권법령의 한 조항은 여성에게 매매춘을 강요한 자와 자발적으로 매춘업에 종사한 자를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하였다. 물론 매음 행위는 이 법령을 통해 금지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곽은 일소되었을지언정, 그 여성들은 주점과 음식점에 흘러들어 기존의 매춘업을 지속하였다.

경찰 기구가 여성 접대부를 고용한 음식점들의 영업 허가를 취소하며 불법 행위를 바로잡고자 했으나, 더 큰 부작용이 나타났다. 음식점을 떠난 여성들이 시내 거리와 기차간에 흘러들어 젊은 간부들을 유혹해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매음을 근절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육지책으로 북한은 일상적 감시 제도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경찰 기구가 고용한 민간 정보원들이 늘 감시해야 할 “을종(乙種) 요감시인”에 불량 청소년들과 매음 여성들이 포함되었다.

매음이 여성을 착취해온 사회악으로 인식되고, 성행위 자체가 노동력 손실을 조장하는 소모적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쾌락에 탐닉하는 사생활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윤리가 정립됨에 따라 섹스에 대한 관점은 더더욱 부정적 방향으로 경도될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 섹스관은 자유연애관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해방된 성생활”과 함께 “자유연애”가 “부르주아적”이라는 소련의 관점은 북한에도 통용되었다. 남녀평등권법령이 “자유 결혼의 권리”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연애는 옹호되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북한 사회는 보수적이었다. 자유연애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음은 당원이나 간부들이 여성을 유혹하는 행위가 문책 사유였다는 사료적 근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성과의 육체적 관계뿐만 아니라 정신적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희도 생산적 노동과 건설에 방해가 되는 부정적 가치로 인식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북한의 젊은 남녀

다양한 방식으로 통제된 성은 심지어 정치화되기까지 했다.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들의 비도덕성을 비판하는 작업에 성은 효과적 소재로 활용되었다. 미군의 성범죄와 성적 문란상은 그 대표적 소재였다. 1947년 1월 7일, 호남선 열차에 타고 있던 미군 병사들이 조선인 여성 세 명을 윤간한 사건은 북한의 공식 역사서에까지 소개되었다. 북한은 그에 그치지 않고 남한 사회 성병 만연의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였다. 미군이 들여온 “국제 화류병”에 전염된 여성과 그에 따른 사망자 수가 수만 명에 달한다는 구체적 통계도 제시되었다. 북한의 논자들은 미군을 통한 조선 내 성병 유입과 미국의 제국주의성을 결합하는 시도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성병이 만연한 남한에 페니실린과 다이아진을 들여와 “약 장사”하는 미국의 행태가 제국주의의 본성을 반영한다고 결론지었다.

‘외국인 전용업체’라고 쓰여진 미8군 기지촌 가게벽면 모습

한편 남북한 간 체제 경쟁 국면이 본격화됨에 따라, 남한의 “퇴폐적 성 문화”는 북한의 도덕적 우위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효과적 소재로 활용되었다. 수많은 퇴폐 업소와 성을 소재로 다룬 문학·연극·영화 등이 범람하는 “퇴폐적 문화 시장”은 윤리·도덕을 결여한 남한이 쇠퇴 일로에 있음을 드러내는 근거로 제시되었다. 남한이 성적으로 타락했음을 강조한 북한의 비판 전략은 대한민국정부 각료 사회를 정치 지도자들의 방탕한 성애가 난무하는 공간으로 묘사한 지점에서 절정에 달했다. 한 논자는 상공부장관 임영신을 둘러싼 이승만·이범석·윤치영 등의 경쟁적 구애와 성애를 노골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대한민국정부의 전도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음을 부각하였다.

십여 년 전 인디밴드의 성기 노출 사건과 그에 대한 북한의 격한 반응을 고려할 때, 남한의 “타락한 문화”를 비판하며 북한의 도덕적 우위를 강조하기 위한 소재로서 성이 활용되었다는 점은 해방 직후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곧 해방 이후부터 북한이 견지한 체제 경쟁 전략과 부정적 섹스관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요컨대 북한은 사적 영역에 머물러 있던 성을 통제하며,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관철에 활용하였다. 체제 건설을 위한 군중 동원이 요구될 경우 성은 억압을 당하며 은밀한 사적 공간에 머무르길 강요받은 반면, 적대적 체제에 대한 비판이 요구될 경우 그것은 공적 영역으로 끌려나와 효과적 비판 소재로 활용되었다. 그러한 점에서 북한의 성은 정치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