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100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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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후기(2019. 2. 28.) 

“3.1 운동 100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이민성(근대사분과)

 

2019년 2월 28일 목요일 프레스센터에서 학술회의 ‘3·1운동 100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개최되었다. 이름처럼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3·1운동 100주년 총서, 『3·1운동 100년』의 출간기념회를 겸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날의 행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겨레신문사와 더불어,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위원회’를 중심으로 꾸려졌다.

2016년 가을, 한국역사연구회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회는 학술대회 개최와 총서 출간을 목표로 움직였다. 그 결과 두 차례에 걸친 학술대회가 2017년 11월 18일과 2018년 3월 17일에 개최되었다. ‘메타역사로서의 3·1운동사 연구, 3·1운동 인식사의 재검토’와 ‘3·1운동의 메타 역사, 3·1운동 연구사의 재검토’라는 이름으로 열린 발표회는 메타역사학적 관점, 다시 말해 3·1운동이 기억되어온 다양한 방식에 대해 주목하였다.

3·1운동에 대한 연구사적 검토는 총서 기획으로 이어졌다. 위원회는 “3.1운동에 대한 엄밀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관성적인 역사상이 반복되어왔다”는 문제의식 하에 총 5권의 총서를 기획하였다. 총서는 ‘메타역사로서의 3·1운동’, ‘사건과 목격자들’, ‘권력과 정치’, ‘공간과 사회경제’, ‘사상과 문화’라는 주제로 구성되었다. 각 주제는 3·1운동을 단순한 ‘사건’으로서 그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데 그쳤던 관성에서 벗어나, ‘인식적 전환’을 꾀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별개로, 위원회의 활동은 한국역사연구회라는 단체의 인적 계승이자 학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김정인 선생님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기조발제를 맡아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1989년 한국역사연구회는 역사문제연구소, 한겨레신문과 함께 3.1운동 70주년 기념논문집인 ≪3.1민족해방운동연구≫를 펴냈다. 그리고 27년이 지난 2016년, 그 논문집의 기획자, 집필자와 함께 그 책을 밑줄치고 읽은 대학원생, 그 존재조차 몰랐던 중학생과 유치원생이 다시 모였다. 3.1운동 100주년 기획위원회는 그렇게 3년 전이 2016년에 탄생했다.”

즉, 이날의 행사 개최와 총서 발간의 의미는, 30년 전의 신생 학술단체 한국역사연구회가 내놓았던 ≪3.1민족해방운동연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의식을 껴안고자 하는 고민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3·1운동 100년』 제2권 ‘사건과 목격자들’에 필진으로 참여한 인연으로, 적지 않은 기대감을 안고 프레스센터로 향하였다.

발표는 총 2부로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종합토론이 준비되었다. 김정인 선생님의 기조발제 이후 시작된 제1부에서는 3·1운동의 배경과 발발에 대하여 이형식, 백선례, 윤소영, 주동빈 총 네 분의 발표가 이어졌다.

이형식 선생님은 일본제국의 정치구조 변동 속에서 3·1운동의 의미, 백선례 선생님은 ‘1918년 독감’으로 드러난 식민통치의 균열, 윤소영 선생님은 ‘고종독살설’이라는 소문의 전말과 3·1운동의 기폭제로서의 의미, 주동빈 선생님은 3·1운동을 세대론적으로 분석하고 ‘3·1운동 세대’ 탄생의 의미를 검토하였다. 제1부는 ‘제국’, ‘질병’, ‘소문’, ‘세대’를 키워드로 삼아서 만세운동 발발 배경과 그 영향을 다층적으로 살펴보았다고 할 수 있었다.

제2부는 3·1운동의 심층구조 재인식이라는 주제로 노상균, 기유정, 미쓰이 다카시, 소현숙 선생님의 발표가 이어졌다. 제2부는 운동의 다양한 ‘주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있었다. 특히 노상균 선생님은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명으로 알려진 윤치호가 3·1운동에 대해 방관적 태도를 취하였던 내적 논리를 살폈다. 발표자의 말을 빌리자면, 윤치호는 ‘쉬운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지식적으로 앞서 있었으며, 현실감각이 뛰어난 윤치호는 변혁보다는 자기합리화에 머물렀다. 그 결과 “조용히 나라가 망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식민지기 만세운동을 ‘방관’하였다. 한국사회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시민들도 윤치호가 겪었던 선택의 기로를 재확인해왔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하였으나, ‘이러면 안되는 거’라며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기유정 선생님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 군중의 ‘길거리 정치’와 식민자의 공포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조선 군중은 길거리를 무대로 역동성을 잠재한 정치력을 키워왔다. 그러나 식민자는 근대주의적(식민주의적) 주체론에 입각하여 다수의 군중이 가진 무작위성을 이성적 개인과 대치되는 비이성·병리학적 요소로 규정하였다. 이것이 식민자의 공포로 드러나곤 하였던 것이다. 미쓰이 다카시 선생님은 제국 일본의 포섭논리로서 ‘인종’과 ‘민족’ 개념에 대해 살폈다. 특히 제국 내에서 피차별부락민에 대한 포섭논리로서 ‘인종’과 ‘민족’ 개념을 조선인과 연결지어 설명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마지막 발표는 소현숙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젠더적 관점에서의 3·1운동 분석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여성’을 주목하였다. 기존과 다른 네트워크(학교, 교회)를 통해 연대하기 시작한 여성들은 기존 젠더질서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갔다. 다만, 이후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자신을 ‘구여성’과 구분되는 ‘신여성’으로 규정짓기도 하였다.

종합토론에는 도면회 선생님 사회에 서호철, 이정선, 정미량, 최우석, 한승훈 선생님이 자리하였다. 도면회 선생님은 1969년 이후 3·1운동 연구가 축적되었지만, 일종의 갈라파고스와 같이 단절된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국외독립운동에 국내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가려진 측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1989년 70주년 학술대회에서 국내의 민중·민족을 주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의 취지는 독립운동의 주체, 탄압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층위를 착목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도면회 선생님과 같이 위원회에 참여한 최우석, 한승훈 선생님도 3·1운동 연구의 흐름과 이번 학술대회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최우석 선생은 기존에 10년마다 3·1운동 연구가 갱신되었으나, 계승되지 않고 게토화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3·1운동 100년』 총서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한승훈 선생님은 100주년을 맞아 쏟아지고 있는 3·1운동 연구가 질적 개선을 위한 양적 축적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서호철 선생님은 이형식, 윤소영 두 분에 대한 토론을 맡았다. 먼저 이형식 선생님의 발표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일본 ‘본국’ 정치세력간의 충돌과 협상 과정에 조선이 시야에 들어온 경우는 없었는지, 또한 조선총독부 내 ‘토박이 관료’와 ‘내무성 출신 관료(미즈노 렌타로 정무총감)’의 대립을 살폈지만 한편으로 본국의 하라 다카시 총리대신 등과의 입장 차이도 있지 않았는지였다. 윤소영 선생님에게는 ‘고종독살설’ 보도에 대한 국내와 일본 간행신문의 보도 차이의 원인, 3·1운동의 기폭제로서 ‘고종독살설’과 충군의식의 관계를 질문하였다.

이에 이형식 선생님은 3·1운동이 일본 정치계에 충격을 주어 민주화를 진척시켰다고 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민족운동 세력에게 다시 영향을 주었고 이야기하였다. 지배세력 변화에 따른 피지배세력의 전술변화였다. 정우회 계열 세력 간 입장 차이는 존재하나 세분화하기는 힘들다고 답변하였다. 다만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입장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하였다. 윤소영 선생님은 발행 신문마다 보도가 달랐던 이유가 총독부의 정보통제 영향, 그리고 주 독자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였다. ‘고종독살설’과 충군의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소문은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믿어진다는 측면에서, 일본의 식민통치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고종독살설’을 표출의 계기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최우석 선생님은 백선례, 주동빈 두 분을 맡아 토론하였다. 백선례 선생님 발표에 대해서는 ‘1918년 독감’과 방역당국의 실책을 통해 조선인이 통치의 허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주동빈 선생님 발표에 대해서는 연구 시기와 범위가 국한되어 아쉽기에 이를 확장하는 것이 어떨지 제안하였다. 한승훈 선생님은 3·1운동을 ‘거부’하였다는 윤치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양한 행적들이 관찰되며, 이는 우리의 자화상일 수 있다고 평하였다.

정미량 선생님은 소현숙, 기유정 두분의 발표에 대해 각각 신민에서 시민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검토, 1919년 이전 대중사회의 형성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조언하였다. 이정선 선생님은 미쓰이 선생님 발표에 대하여 ‘인종’의 개념이 일반적인 경우와 피차별부락민, 조선인에게 조금씩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짚었다. 또한 가족국가관이라는 맥락에서는 ‘인종’ 담론으로서 ‘일조동원론’은 통치의 모순보다는 기능의 원리에 가깝게 이해될 수 있다고 평하였다. 이에 미쓰이 선생님은 천황주의의 맥락에서 ‘인종’ 담론은 차별의 논리로 작동하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일조동원론’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답변하였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질병’, ‘인종’, ‘세대’, ‘길거리’, ‘여성’에서 ‘소문’까지 다양한 키워드가 제시되었다. 만세운동을 단순히 원인과 결과, 일본의 탄압과 저항으로만 설명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를 밝혀내고자 한 결과였다. 각각의 역사적 주체들은 만세운동을 계기로 삼아 자신들의 개인적·사회적 욕망을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세대’와 ‘여성’, 그리고 길거리의 ‘군중’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개인’도 키워드였다. 친일파로 알려진 윤치호의 내면은 ‘친일’과 ‘방관’으로 설명되기에 간단하지 않았다. 탄압의 주체에 대한 ‘일제’라는 설명방식, 그리고 ‘탄압과 저항’이라는 관점에도 재고가 필요함이 언급되었다.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앞으로도 식민지기를 살아간 역사적 주체들의 목소리가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기를 바라며 후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