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를 통해 본 고려인의 삶 3] 고려도기, 죽은 자와 같이 묻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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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기, 죽은 자와 같이 묻히다

(‘도기를 통해 본 고려인의 삶’ 3번째 기획글)

 

한혜선(중세 1분과)

 

죽으면 염(殮)만 할 뿐 관에 넣지 않는데, 왕이나 귀족도 그러하다.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도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두는데 봉분도 하지 않고 묘표도 세우지 않는다. 개미·땅강아지·까마귀·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 두지만 사람들은 이를 그릇된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고려도경』 권22, 잡속1)

위의 글은 12세기 전반 고려를 다녀갔던 중국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의 장례풍습을 보고 서술한 내용이다. 이러한 일이 고려에서는 흔한 것이었는지 고려 문종 11년(1057)에 국왕은 중앙과 지방의 길거리에 드러나 있는 해골을 개경의 경우에서는 동서대비원이라는 기관에서, 지방에서는 그 지역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수습하여 매장하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리에 버려지는 식의 장례법은 고려 전체를 놓고 보면 그리 보편적인 방법은 아니었고, 사회적 신분과 경제력에 따라 석실분(石室墳), 석관묘(石棺墓), 석곽묘(石槨墓), 토광묘(土壙墓), 화장묘(火葬墓)와 같이 다양한 구조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석실분은 왕실의 무덤이었으며, 관인층은 대체로 화장(火葬)을 선호하여 석관(石棺)과 묘지명(墓誌銘)을 다수 제작하였다. 묘지명은 죽인 이의 행적을 밝혀 놓아 당시 관인들의 생활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반면에 묻힌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대부분의 무덤은 돌을 쌓아 만든 석곽묘(石槨墓)이거나 땅을 파서 만든 토광묘(土壙墓)이다.

[그림1] 고려 석곽묘, 천안 불당동 5호 석곽묘 (충청남도역사문화원 발굴)
[그림2] 고려 토광묘, 경주 검단리 98호 토광묘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발굴)
석곽묘와 토광묘는 모두 기본적으로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을 적용한 것으로, 시기에 따라 유행한 무덤의 형태가 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세기 무렵까지는 석곽묘가 비교적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12세기 이후, 특히 고려 후기에는 토광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사실이 유적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무신집권기 이후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거치며 관인층에서조차 화장 풍조가 거의 사라졌고 매장이 완전히 정착되어 토광묘가 급증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경상북도 경주 지역의 물천리, 화천리, 검단리에서 조사된 토광묘를 들 수 있다. 이들 무덤은 하나의 구릉에 많게는 100기 이상씩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진 무덤이 모여 있는데, 동일한 혈연집단 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토성(土姓)집단의 무덤군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려인들은 무덤을 만들 때 죽은 이를 위해 다양한 부장품을 함께 묻었다. 부장품은 재질에 따라 도자기, 청동제품, 철제품 등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도자기로, 다시 세부재질에 따라 청자와 도기로 구분된다. 청자는 소형의 음식기인 발·접시·잔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면 도기는 중형의 병과 항아리가 주로 부장되었다. 청동제품은 동전·거울·도장을 비롯해 발·접시·합 등이 있고, 고려 중기 이후 대부분의 무덤에는 청동숟가락과 젓가락을 같이 묻었다. 이와 같이 한 무덤 안에 다양한 재질의 공예품이 함께 부장되는 현상은 당시 성행하였던 다례(茶禮)의 일면을 함축하여 표현한 구성품일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도기는 차를 끓일 때 사용한 물을 담아 두는 용도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장용 도기는 시기에 따라 종류와 형태가 달라진다. 10~11세기를 중심으로 한 고려전기에는 도기병 가운데 동체의 일부를 눌러서 만든 편병이 주로 부장되었다.

[그림3] 고려전기 무덤 부장품, 천안 불당동 5호 석곽묘 출토 (충청남도 역사문화원 발굴)
12세기 토광묘가 급증한 이후인 고려 중기에는 도기병이 다양화되는데, 소병·반구병·매병·표형병·정병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반구병·매병·정병·표형병은 같은 시기 청자로도 제작되었던 기종이다. 13세기 후반 이후 고려후기에는 청자의 경우 전국적으로 비슷한 형태와 문양을 한 것이 부장되었지만 도기는 지역별로 종류가 달라진다. 당시 양광도지역(현재의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편호·단경호·장신호와 같은 항아리류가 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경상도지역에서는 동체하부가 풍만하고 구연이 바깥쪽으로 벌어진 형태의 나팔입병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같은 구조의 무덤이지만 지역에 따라 부장된 도기가 달랐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역간 음식문화 혹은 장례문화의 차이, 용도와 기능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여기에 고려후기 향촌사회의 지역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자율성’이 물질문화에서 직접 드러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는데,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행·선호·선택이 작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도기는 기본적으로 장거리 유통과 소비보다는 지역소비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기 때문에 생산단계에서 이미 지역민과 각 향촌사회의 특정 기종에 대한 선호도가 투영되었을 것이다.

한편 부장용 도기병은 완형이지만 동체에 구멍을 뚫거나 구연부를 일부러 깨뜨린 것도 다수 확인된다.

[그림4] 고려 후기 경상도지역 무덤 부장 도기병, 경주 검단리유적 분묘 출토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발굴)
이렇게 분묘에 도기를 일부러 훼손하여 부장하는 것을 죽은 자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훼기(毁器)의 결과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고려분묘에서 출토된 청자와 도기는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은 것을 부장하는 행위, 즉 생기(生器)를 직접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생기란 무덤 안의 부장품으로 간략하게 모양만 갖추어서 사용할 수 없게 만든 것으로, 고려후기 청자 중 <‘지정11년’명대접>에서 직접 명문이 확인되어 고려인들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무덤에 부장한 도기병의 구연부를 인위적으로 깨뜨린 것이나 경부 또는 동체부에 구멍을 뚫는 행위가 실제로 생기의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