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한중무역 연구 -혼돈의 동아시아, 예의의 나라 조선의 대명무역-』(2018, 태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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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16세기 한중무역 연구 혼돈의 동아시아, 예의의 나라 조선의 대명무역-』 (2018, 태학사)

 

구도영(중세 2분과)

 

15년 전, 필자가 16세기 한중관계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16세기 조선과 명 사이에서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그 시기를 연구하냐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만 해도 16세기를 주제로 한 한중관계 연구 성과는 한두 편에 불과하였다. 조선 대중국 연구는 주로 파국으로 치닫던 전쟁(임진왜란, 병자호란)과 외교적 긴장상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6세기 한중관계는 ‘연구할 것이 없다’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세계사로 시각으로 확장하면 이시기만큼 논쟁적인 때도 드물다. 이 시기 전후 유럽은 불굴의 항로 개척을 통해 유례없는 부와 영광을, 타문명에게는 폭력과 파괴를 가한 소위 ‘대항해시대’를 구가했다. 동아시아로 시선을 돌리면 해상과 육지의 다양한 세력들이 부를 쫓아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당시 남미나 일본에서 생산된 銀은 명으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서구학계와 일본학계는 16세기 이후 전개된 근대 경제체제를 유럽이 정립 또는 일본이 견인하였다는 것을 입증하고자 많은 노력을 했다. 저마다 당시 세계체제 속에서 어떠한 무역을 했는지 연구에 매진하는 동안, 16세기 한중관계 연구는 무관심으로 긴 동면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저명한 연구자 기시모토 미오(岸本美緖)는 그의 저서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에서 16세기 조선의 대외관계를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훈구파의 사치를 철저히 비판한 그들은 무역 정책에도 엄격한 태도를 취해 銀 밀수를 엄벌로 다스렸다. 사람파의 정치적 관심은 어디까지나 국내 지향적이었다. 그들에게 15세기 관료들과 같은 넓은 국제적 시야는 볼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임진왜란으로 나타나게 된다.”

淸代 경제사 연구의 대가인 기시모토 미오는 위의 책과 다른 연구 성과(책 서론 참조)에서 당시 조선 엘리트들을 ‘외부의 변화에 귀를 닫고 내부 사회에만 집중한 사람들’로 묘사했다. 16세기 조선과 명의 외교관계 상은 그가 쌓아올린 학문적 성과와 권위 때문에 쉽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기초적인 사실 오류도 비판적 필터 없이 확산되었다. 조선이 명에 사행을 약 1,200회 파견한 사실은 횟수의 정확도를 차치하더라도 그 규모를 가늠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류구(琉球)가 사행을 171회 파견한 것이 ‘단연코 최고’로 많은 횟수라며, 류큐만을 사행무역 국가로 주목하였다. 근래 출간되는 한국사 교양서적은 이러한 시각을 답습했다. ‘국내 지향적’, ‘무역은 수동적’으로 평가된 16세기의 조선은 ‘아무 일도 없었던’ 조용한 나라였다.

 

이러한 관점은 소위 ‘임진왜란 심판’과 결합했다. 16세기 끝자락에 닥친 임진왜란의 인과관계를 찾기 위해 16세기를 제물로 사용했다. 그 비극이 크면 클수록, 앞선 시기를 엄준하게 심판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결론을 위해 원인을 꿰어 맞추는 일은 명쾌해 보일 수는 있어도 망각과 왜곡을 부르는 폭력일 수 있다. 당대에 대한 역사 실증은 없고, 전쟁의 비극을 통해 앞선 시기를 지레짐작하는 것은 옳은 연구방법인가? 어떻게 보면 필자의 연구는 이런 고착화된 ‘16세기 한중외교의 이미지’를 걷어내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16세기 동아시아 지역의 교역 시장은 평화롭지 못했다. 대대적인 약탈과 살육이 자행되고 있었다. 명 조정은 절제된 조공무역을 원했다. 그러자 조공무역에서 배제된 몽골의 경우 무역시장 확대를 요구하며 명의 북변을 지속적으로 침략하였고, 1550년에는 명 수도 북경을 포위하기도 하였다. 일본 왜구들 역시 무역을 요구하며 중국 동남부 연안을 침략했다. 당시 일본 왜구에게 사로잡히거나 학살당한 중국 양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무역의 폭증만큼 폭력의 광기도 팽창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학계는 ‘교역의 시대’가 준 번영과 영광에 주목했지, 그것을 좇는 과정에서 초래한 폭력과 야만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다.

 

필자가 이 책을 쓰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세 가지였다. 우선 무역의 개념과 인적 구성, 무역 공간, 수출입품, 무역 규모, 무역 여건과 정책 등 경제사 자체에 대한 연구를 기초부터 살피며 심화하는 것이었다. 둘째, 16세기 조선과 명의 외교관계를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반 하에 조선의 무역 양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의 대명무역(對明貿易)이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어떠한 특징과 위상을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책은 16세기 조선인들을 그 시대적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하나의 디딤돌이고자 했다.

 

우선 필자는 조선 전기의 무역 개념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며 분석했다. 조선의 무역 경로는 다른 나라들보다 많았고, 합법무역이 발달했으며, 관무역이 없었기 때문에 개념 구분이 특히 더 중요했다. 그것이 조선 대명무역의 특수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조선의 합법무역(사행무역) 여건을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비교하며 살펴보았다. 무역 규정에 따라 무역 수익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명은 유독 조선에게 각종 무역 규정을 우대해 주었다. 15세기 말 조공국의 사행무역에 50% 관세, 또는 20% 상세를 부과하던 상황에서도 조선은 예외였다. 이는 명이 조선을 ‘예의의 나라’라 여겨, 다른 나라들보다 예우해 준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명이 조선을 왜 예의의 나라(禮義之國)이라 여기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예의지국이라는 국가위상이 조선·명 외교와 무역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더불어 살펴보았다.

 

조선의 銀 생산과 명으로의 은 수출도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은 수출이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 확대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 국내에 은이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조선에서 銀은 내수용 물품이 아니라, 수출용 물품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동아시아 은 최대 생산지였던 일본, 중국의 운남(雲南) 지역도 비슷하였다.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거리가 가깝고 무엇보다 무장(武裝)할 필요가 없어서 무역하기 좋았다. 명·일본 간 직접무역에 비해 조선·일본 무역은 안전성이 확보되어, 16세기 조선은 明과 일본 사이의 銀 중계무역지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은을 얻기 위해 땅굴을 파고, 무역을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 한 예로, 아메리카 포토시(지금의 볼리비아)의 은광 개발로 250년 동안 약 800만 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은 채굴은 값비싼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해상무역도 예외는 아니다. 16~18세기 유럽 소비자 한 명이 아시아 상품 1파운드를 얻기 위해서는 매년 6,000~7,000명의 유럽인의 목숨과 약 150톤의 銀이 필요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갔다가 복귀한 사람은 전체의 60% 정도에 불과했다. 포르투갈인의 언급에 따르면 당시 ‘중국에서 일본으로의 항해는 매우 위험해서 3척 가운데 2척이 도착하면 대성공’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은광 개발이나 해상무역의 명암을 함께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는 이 책에서 조선 사행무역의 수출품과 수입품, 교역규모도 다루었다. 기존에 제대로 활용된 적이 없었던 사행록을 살피며 당시 무역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명의 방문판매 상인이 북경 숙소는 물론 조선사행이 하루 머무르는 연행로 숙소까지 찾아와 무역이 이루어지던 점은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불법무역 역시도 활성화되었다. 당시 명은 외국의 불법무역에 민감하여 이를 근절하기 위해 잦은 군사상 제재를 시행하였다. 동아시아 나라들의 무역상(貿易商)은 상인과 해적의 얼굴을 동시에 가지며 폭거를 자주 일으켰기 때문에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불법무역자를 발각하면 사형에 처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조선·명 무역상들은 단속에 발각되지 않도록 서로가 조용히 무역을 수행했다. 조선인은 문젯거리를 일으키는 일이 거의 없어 명 조정에 주목되지 않았고, 그 덕에 역설적으로 불법무역을 더 활발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조선은 명과 지리적으로 육지와 바다 모두 접해 있어, 무역 근거지가 넓게 흩어져 있다는 점도 단속에서 벗어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무역사를 연구할 때, 많은 사람들이 무역량을 가장 궁금하게 여긴다. 무역의 가치는 무역량뿐만 아니라 수익, 관계의 안전성, 호혜성 측면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조정이 국초 이래 명과의 관계에서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명에게 무역 이익만을 요구하며 약탈 살인을 일삼았던 뭇 조공국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이었다. 명은 그러한 조선을 ‘예의의 나라’로 인정하며, 무역 여건에서 예우하였다.

 

16세기 조선 민간의 무역 욕구는 들끓었고, 조선인들은 16세기 ‘교역의 시대’가 안겨줄 경제적 이익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조선 조정은 사무역을 한사코 통제하고자 했지만, 그럼에도 조선인의 무역규모는 크게 성장하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의지국 후광효과에 힘입어 조선인의 明 내 무역 여건이 상대적으로 예우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대명무역 횟수는 다른 나라를 압도했고, 세금도 납부하지 않았다. ‘출국검사’도 예외적용 받았다. 조선 백성은 은을 캐며 고역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고, 값싼 일본 은을 수입해 명으로 수출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요동, 산동지역과 거래하여 해상무역에서 배가 난파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꾸준히 자주, 살상 없이 무역을 행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6세기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명과 교역하고자 하는 욕구가 폭증하는 것에 반비례하여, 명이 조공국과의 무역을 반기지 않았던 입장 차이가 서로 충돌하면서, 폭력과 약탈, 불법무역이라는 불협화음으로 점철된 매우 어수선한 시기였다. 동아시아 세계의 혼돈과 달리, 16세기 조선은 유독 명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국가의 안전’을 지켰고, 경제적으로 ‘무역규모도 성장’하였는데, 이는 당시 동아시아 교역 질서에서 매우 특수한 것이었다.

 

우리가 16세기 한중관계를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기 조선인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뜻이 아니다.
조선은 그들의 방식대로 한중관계를 운영하였고, 혼돈의 동아시아 속에서 조선인들은 안전하게 무역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16세기 조선의 안정성은 연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안정적일 수 있었는지 더욱 궁구해야 하는 사항이 아닐까.

 

16세기 조선의 무역 현황과, 명 지식인 사조제(謝肇淛)가 남긴 외국 인식 한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랑캐 여러 나라 중
조선보다 예의바른 나라는 없고,
교지(베트남 북부)보다 비옥한 나라는 없으며,
달단(몽골)보다 용맹한 나라는 없다.
왜노(일본)보다 교활한 나라는 없고,
류큐(오키나와)보다 순박한 나라는 없으며,
진랍(캄보디아)보다 부유한 곳은 없다.
– [명] 謝肇淛(1567~1624), <五雜組> 卷4, 地部 2

헌부가 아뢰기를, “북경 사행이 銀을 가져가는 것을 단속하는 법이 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간사한 무리들이 갖가지로 꾀를 내어 기어이 가지고 갑니다. 많게는 1만여 량에 이르고 적어도 수천 량을 밑돌지 않습니다. 돌아올 때 무역해 오는 중국 물품을 실은 차량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 [조선] 명종실록 5년(1550) 10월 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