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장의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개성의 3·1운동을 이끌다…여성네트워크로 성공한 3·1운동

0
1644
Print Friendly, PDF & Email

 

개성의 3·1운동을 이끌다…여성네트워크로 성공한 3·1운동

② 개성 3·1운동 첫 시위 이끈 권애라 / 강화도 교동 출신… 이화학당 보육과 졸업 / 호수돈 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일해 / 여학생 35명과 “독립만세”… 1000명 참여 /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수감… 잇단 옥고 / 상하이·모스크바서 독립운동·자유결혼 / 분단 조국 좌절… 통일·반독재투쟁 펼쳐

 

한국역사연구회의 역사콘텐츠 전문브랜드인 ‘역사공장’은 세계일보에 여성독립운동가 열전을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지원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 (http://www.segye.com/newsView/20190121003482)

이지원(근대사분과)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에 여성은 없지만, 3·1운동의 현장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매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4월 천안 아우내 시위에 유관순이 있다면, 3월 개성 시위에 권애라가 있다.

개성의 첫 시위를 이끈 여성 네트워크

개성의 3·1운동은 여성이 주도한 대표적인 운동으로 꼽힌다. 개성 시위에서 여성을 주목하는 것은 여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단순 사실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권애라는 여학생, 교사, 전도부인 등 여성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개성 3·1운동의 첫 시위를 이끌었다. 권애라는 1897년 강화도 교동에서 태어나 4살 때 개성으로 이주,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서울로 유학, 이화학당 보육과를 1918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권애라는 개성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권애라 독립운동가의 1967년 국회위원 후보 포스터 사진

개성은 서울을 제외하고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3월 1일 이전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곳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오화영 목사를 통해 2월 28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독립선언서가 당도했지만 그것을 대중에게 배포할 사람이 없었다. 당초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개성의 기독교계 인사들은 독립선언서 배포를 서로 미루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는 북부예배당 지하의 어두운 석탄광에 숨겨지게 되었다.

개성에 독립선언서가 당도해 있으나 배포하지 못하고 있음을 처음 안 사람이 권애라이다. 그는 “부인은 관계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호수돈여학교 서기 신공량의 말을 뒤로하고, 북부예배당 지하 석탄광에서 독립선언서를 갖고 나왔다. 그는 전도부인 어윤희와 의논하여 독립선언서를 여성들이 배포할 것을 결의했다. 독립선언서 배포에는 전도부인 신관빈, 심명철 등도 함께했다. 개성의 만월정, 북본정, 동본정 일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기 시작했다. 호수돈여학교 학생회장이던 이경신과 그의 언니인 미리흠학교 교사 이경지도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은 시위를 계획했다. 이들에 의해 3월 3일 개성의 첫 시위가 일어났다.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은 3일 오후 2시쯤부터 삼삼오오 대를 이루어 독립가와 만세를 무르며 시위운동을 개시했다. 군중은 1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권애라의 담대한 실천과 개성 여성들의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개성의 3·1운동 첫 시위는 없었을 것이다. 여성의 근대적 주체로서의 역량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커가고 있었다.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서대문형무소 감방생활과 여성 웅변가

권애라는 개성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 그는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이 방에는 개성의 시위를 함께 주도한 어윤희, 신관빈, 심명철과 천안 시위를 주도한 이화학당 후배 유관순, 수원 기생시위를 주도한 김향화 등이 같이 있었다. 감옥은 동지애를 체험한 새로운 사회였다. 감옥생활의 고통을 노래로 달래기도 했다. 활달하고 노래 잘하던 권애라는 감방에서 김향화에게 ‘개성난봉가’나 ‘평양 수심가’ 등의 노래를 배웠다.

그는 그해 10월 가석방되어 출소하였다. 3·1운동의 여진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시지 않은 조선에는 많은 강연회가 다양한 주제로 여러 단체에서 열렸다. 출옥 후 권애라는 수표교예배당, 정동예배당, 중앙기독교청년회 등의 강연 무대에 올랐다. ‘반도의 희망’ ‘잘 살읍시다’ 등의 제목으로 애국사상과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부녀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을 했다. 강연 내용 때문에 종로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강연회라는 공론의 장에서 사회적 발언과 행동을 거침없이 했다. 조선 여자고학생상조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참관 온 경관이 강연을 저지하자, 감옥 생활의 소회를 담아 개사한 개성난봉가를 불렀다. 당시 연단에서 신여성 웅변가가 기생노래 개성난봉가를 부른 것은 쇼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호탕하게 강연 잘하는 여걸 연설가로 오랫동안 언론에 회자되었다.

 

중국과 모스크바에서의 독립운동과 자유결혼

권애라는 인기 있는 웅변가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배포와 비밀조직 활동을 벌였다. 그는 1920년 말~1921년 경찰의 감시를 피해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하이로 갔다. 중국에서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수저우의 감리교계 학교인 경해여숙을 다녔다. 그는 1921년 10월 ‘고려공산청년회중앙총국’에서 발행한 위임장을 발부받아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조선대표 56명의 일원이 되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상하이 지회 부회장 김원경과 함께 이 대회에 갔다. 당시 권애라는 고려공산당 상해파로 활동하여 국내 신문에 여운형 등 공산당 운동의 일원으로 소개되고, 일본고등경찰의 감시대상으로 보고된다.

아들을 안고 있는 권애라

그는 1922년 모스크바극동민족대회를 마치고 중국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말 아들을 낳았다. 여성 독립운동가를 나라와 결혼한 잔 다르크로 상상한다면 신여성 권애라의 자유결혼은 낯설 것이다. 권애라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서 의열단원 김시현을 만나 불꽃같은 연애를 하고 자유결혼을 한다. 김시현은 영화 ‘밀정’의 소재가 된 경부 황옥 폭탄사건, 즉 의열단 사건의 핵심인물이다. 김시현은 식민지시기에 여섯 차례에 걸쳐 18년여의 옥살이, 1952년 이승만 저격사건 배후로 9년의 옥살이 등, 생애 27년 8개월을 감옥에서 지낸 사람이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운동의 동지관계였다. 김시현은 권애라를 ‘권동지’라고 불렀다. 권애라의 운동적 삶에는 위장도 있었다. 김시현이 의열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 5개월의 옥살이를 하던 때에 권애라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총무이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고문이었던 이병철과 살림을 차린 ‘현모양처’의 주인공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권애라는 1920년대 후반 여성웅변가로 활동하며 근우회 경성지회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내외를 넘나들며 종횡무진하던 그는 1942년 길림성에서 체포되어 징역 12년을 언도받고 장춘형무소에서 3년 복역하다 해방을 맞이했다.

 

반독재, 통일을 염원하며

해방 후 권애라는 김시현의 부인이자 동지로 통일과 반독재투쟁의 길을 함께 한다. 독립운동 끝에 맞이한 조국의 분단은 깊은 좌절이었다. 그는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이 된 김시현과 함께했고, 김시현이 1950년 2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 선거의 찬조연설을 했다. 김시현이 이승만 저격사건 배후로 감방에 있는 동안에는 옥바라지를 하며 사회적으로 죽어지내야만 했다. 김시현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67년 안동에서 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고,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모임인 3·1여성동지회의 결성에 참여했다. 그는 생활고와 병마로 고생하다가, 1973년 10월 22일 서울 불광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인 1990년 독립운동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어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묘는 현재 대전현충원에 있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한 자작시가 그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내 항상 그리던 님, 허리 꺾인 님이시여, 흐르는 피 강산에 즐퍽, 끊어진 님의 허리, 내가 이어 놓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