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공장의 여성독립운동가 열전] 질곡의 시대 독립운동 헌신… ‘불꽃 같은 삶’ 살다 간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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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의 시대 독립운동 헌신… ‘불꽃 같은 삶’ 살다 간 신여성

① 임시의정원 최초 여성의원, 김마리아 / 황해도 장연 출신… 양친 여의고 상경 / 정신여학교 나와… 광주서 교편 잡아 / 2·8독립선언 日 유학생 대표로 활약

 

한국역사연구회의 역사콘텐츠 전문브랜드인 ‘역사공장’은 세계일보에 여성독립운동가 열전을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김정인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http://www.segye.com/newsView/20190114003631)

김정인(근대사분과)

 

도쿄의 독립선언, 서울의 만세시위

3·1운동에서 학생은 운동세력으로서 처음 역사에 등장했다. 당시 학생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여학생의 출현이었다. 3·1운동 역사에서 맨 앞에 등장하는 여학생은 2·8독립선언대회에 참여한 일본 유학생들이었다. 그 중심에 김마리아가 있었다.

김마리아는 황해도 장연군 출신으로, 소래학교를 졸업하고 양친을 여윈 후 서울로 올라왔다. 정신여학교를 나온 뒤 전라남도 광주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1912년 가을에는 일본 히로시마고등여학교에 유학해 1년간 일본어와 영어를 배웠다. 귀국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1915년에 다시 정신여학교 루이스 교장의 주선으로 도쿄 유학을 떠났다. 기독교계 여학교인 도쿄여자학원에 다니면서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면서 1919년 1월에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도쿄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을 세계에 알릴 기회로 생각했다. 1월 초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도쿄여자유학생친목회가 독립단에 30원의 활동비를 지원했지만 여학생들은 가입하지 못했다.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에도 여학생들은 연명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김마리아는 다음 날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김마리아 열사

김마리아는 2·8독립선언 소식을 알리고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 여성으로 변장하고 2·8독립선언서를 몸에 숨겨 2월17일 고국 땅을 밟았다. 부산에서 대구로 다시 광주에 들러 독립선언서 수백 장을 인쇄했다. 2월21일 서울에 들어온 김마리아는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 신준려 등을 만나 2·8독립선언 소식을 알렸다.

이후 황해도 일대를 돌며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3·1운동 발발 소식을 듣고 다음 날인 2일 상경했다. 곧바로 박인덕, 황에스더, 나혜석 등과 만나 여학생의 만세시위 참여를 준비했다. 마침내 3월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학생 주도의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날 밤 경찰은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김마리아는 다음 날 단속에 나선 경찰에 체포되었다. 연이은 심문과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끝에 3월 27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고통스러운 감방생활은 1919년 7월24일 가석방되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줄곧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임시의정원 최초의 여성 의원이 되다

김마리아는 건강을 회복한 후 정신여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이끌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주로 독립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였다. 김마리아는 당시 침체에 빠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소생하는 소임을 기꺼이 맡았다. 그는 회장에 취임하면서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전진할 뿐 후퇴하지 않는다’라는 요지의 설립 취지문을 내놓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 제1회 공판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1920. 6. 9). 제일 위 사진이 김마리아이며 아래는 함께 구속된 황에스더, 이혜경.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민주공화제는 물론 여성에게 평등권과 참정권을 부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이 공포되었다. 3·1운동 직후 여성들은 이를 반기며 임시정부 후원 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비밀결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11월에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조직이 발각되면서 김마리아를 비롯해 52명이 체포되었다. 그녀는 대구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1921년 6월21일에 기각당해 형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김마리아의 몸은 3년을 감옥에서 버틸 만큼 성치 않았다. 1920년 5월22일에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과감하게 망명을 계획했다. 1921년 7월10일 인천에서 배편으로 탈출해 1개월 후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했다.

김마리아는 상하이에서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난징대학에 입학했다. 상하이의 대한애국부인회에도 참여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김구와 함께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최초의 여성 의원이었다.

정치는 역시 녹록지 않았다. 임시정부의 향방을 놓고 독립운동가들의 의견이 갈렸다. 1923년 1월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도 임시정부를 개조하자는 입장과 새로운 독립운동 영도기관을 세우자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김마리아는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해 ‘한국인의 지지를 받는 정부를 말살하지 말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아무런 합의도 끌어내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고단한 삶, 독립의 열망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자 큰 실망을 안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1923년 6월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김마리아는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1년 넘게 진학 공부에 힘쓴 끝에 파크대학 3학년에 편입했다. 배우겠다는 일념에는 끝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시카고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연구했고 다시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학도 공부했다.

그 시절 김마리아는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고학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 유학을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만큼 고된 세월이었다. 그럼에도 김마리아는 뉴욕에서 미국 유학생들과 함께 여성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약했다.

1933년 늦봄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조선총독부는 그녀에게 신학만을 가르칠 것을 강요했다. 김마리아는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교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한사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디던 김마리아는 1943년 겨울밤 집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이듬해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했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3월13일 눈을 감고 말았다.

김마리아는 신여성이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계 여학교를 다녔고 일본과 미국에 유학했다. 하지만 그는 순탄한 신여성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다. 그 때문에 평생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고 결국 죽음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