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회 30년사]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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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박종기(중세1분과)

 

회장으로 지냈던 시기(1996년 6월-1998년 6월)는 어떤 측면에서 연구회는 정점의 시기이지만, 나라 안팎으로 어쩔 수 없는 새로운 시대변화가 밀려오던 때였다. 물론 당시는 그런 변화를 직접 의식하지 못했다. 회고담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2년간의 시절을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느낀 나의 생각이다.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며, 당시 연구회에 같이 몸을 담은 연구자들 가운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1996년 6월 취임하면서 2년 후 맞게 될 연구회 창립 10주년 위원회를 꾸려 연구회의 중, 장기 계획을 세우려 했다. 2년 임기 내내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모두들 싫증을 내지 않았다.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다. 10주년을 맞이해 연구회는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의 학문적 모델을 정립한다. 현실의 과제와 미래의 변화에 실천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는 역사연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얻었다. 장기 과제로 연구회의 법인화와 독자 연구공간의 확보를 설정했다. 당시 하나도 이루어 놓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 설정한 과제가 아직까지도 연구회의 주요 아젠다로 자리 잡고 있다. 연구회 창립 10년이 되지 않은 소장학자들의 의욕과 자부심이 넘쳐 나던 시기의 모습이 아닐까? 덧붙이자면 시대분위기도 그러했다. 1997년 12월의 대선 결과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민주화의 성취감과 기대로 방배동 연구회의 신년회장은 어느 때보다도 활기가 넘쳤다.

 

취임 후 첫 사업으로 연구회 재정과 위상 정립에 큰 도움을 준 『한국역사』(1993년)를 전면적으로 개정하는 문제로 활발한 논의가 오갔다. 『한국사 강의』(1989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출판 당시의 사학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두기로 했다. 대신 역사 대중화라는 연구회의 또 다른 취지에 맞게 새로운 형식의 출판을 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1997년 초부터 각 분과별로 ‘시대사 산책’ 혹은 ‘생활사’ 형식의 출간 준비모임이 꾸려졌다. 이해 가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필두로 고려시대와 삼국시대 편이 연속으로 출간되었다. 많은 경우 수 십 만부까지 판매되었다. 「어떻게 살았을까」 시리즈는 역사 대중화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했고, 이후 역사 대중서 출간의 물꼬를 틔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도 뒤따랐다. 연구회가 전무후무한 재정의 풍요를 누린 때가 이 때였다. 이때 적립된 기금은 현재 도화동 연구회 사무실 구입의 종자돈이 되었다.

 

1996년 봄 일우(一友) 조성춘(趙成春) 선생님이 연구회에 거액을 기부해주셨다. 일우 선생님은 당시 필자와 같은 과 선배교수이신 고 조동걸 교수님의 절친한 친구였다. 젊은 역사 연구자를 격려하자는 친구의 말만 믿고 선생님은 연구회에 5천만 원을 쾌척하셨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다. 2008년 연구회 창립 20주년을 맞아 반포동 선생님 댁에서 건국대 행사장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간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이지원 회장님 시절, 어느 날 회장님이 『역사와 현실』 100호 발간을 기념하기 위해 일우 선생님의 근황을 문의하기에, 선생님 댁에 연락을 드렸더니 얼마 전 타계하셨다고 한다. 선생님! 빈전에 분향조차 못한 못난 저는 은혜와 감사를 모르는 죄인일 뿐입니다. 깊이 머리 숙여 용서를 빕니다.

 

민주정부가 수립된 기쁨과 함께 IMF 한파가 닥쳤다. 한파의 영향으로 연구회 재정을 지탱해주던 발간 도서의 인쇄 미수금이 많이 발생했다. 더욱 어려웠던 것은 회지 『역사와 현실』 발간을 지원해 온 역사비평사가 도서 유통회사의 부도로 당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발간 중이던 회지가 인쇄 중단으로 폐기 위기에 몰리자 연구회가 종이 값을 직접 지불하고 겨우 회지를 빼내 온 적도 있었다. 회지의 안정적인 발간을 위해 일우 조성춘 선생님의 기부금으로 『역사와 현실』을 독자적으로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와중에 당시 사무국장을 맡은 임기환(현재 서울교대 교수)과 김기덕(현재 건국대 교수) 학형이 특히 수고가 많았다.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

경제적 한파는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IMF 이후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되면서, 대학은 여러 가지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두 가지다. 하나는 민주정부의 등장에 따라 대학에 민주화 열기가 고조되었다. 그동안 감춰진 대학의 각종 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대학 민주화에 앞장섰던 양심적인 연구회 식구들이 대학 밖으로 내몰렸다. 덕성여대 사학과 한상권 교수가 해직되었다. 회장을 중심으로 연구회에 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매주 방배동 연구회 사무실, 교육부와 덕성여대 등지로 다녔던 기억이 선명하다. 서원대학에도 사학과 김정기 교수와 남지대 교수 등이 해직을 당해 청주 서원대학교와 서울의 성공회 성당 및 정부청사를 오가던 기억이 새롭다. 민주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라 더 놀라웠고 반향도 컸다.

 

연구회에 닥친 또 하나의 변화는 ‘두뇌 한국(Brain Korea) 21’사업이다. 1999년 교육부가 대학의 교육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이 사업계획을 시행했다. 이른바 ‘BK 21’ 사업은 21세기 한국을 이끌어갈 창조적 인재를 양성하는 목표 아래 매년 2000억 원 씩 7년간 총 1조 4000억 원을 투입해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 대학원과 지역 우수대학을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을 바꾸어 가면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대학의 경쟁력을 살리기 위해 투자를 늘리는 것은 타당했다. 그러나 우수 집단의 집중지원으로 대학 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고, 학문별 지원의 불균형도 초래되었다.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자본이 대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자본의 칼날을 휘두르는 교육부, 정부에 점차 목을 매달게 되었다.

 

대학의 변화는 연구회에도 나타났다. 메이저 대학 중심으로 연구단이 꾸려지면서, 여기에 적을 둔 연구회 회원 다수는 모교 대학의 연구 사업에 더 집중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넉넉한 장학금도 이들이 대학으로 집중하는 요인이 되었다. 연구회보다는 대학이 연구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연구의 장이 변화된 것은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연구회와 대학의 어느 곳이든 고단한 자료 읽기와 치열한 토론과 학습 풍토는 사라지고, 검색과 클릭으로 시간을 다투어 영혼 없는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치열한 속도전으로 인해 역사학의 황폐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연구회에 대한 소속감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연구회는 단단한 연구조직이 아니라 인적 교류와 정보 교환의 장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지난 20년 간 아주 완만하게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이제 점차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창립 초기 약속했던 과학적 실천적 역사학의 학문적 모델 정립은 어느 정도 이뤄진 것일까? 현재와 미래의 실천적 대안으로서의 역사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제 연구회는 과거에 안주하는 빛바랜 훈장은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니 지난 IMF 이후 20년간의 변화를 이제야 실감한다. 그 변화 속에 나도 허덕이면서 휩쓸려 왔다. 미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늦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