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걸음 더] 시詩, 버려두었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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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걸음 더

, 버려두었던 일기

 

오항녕(중세2분과)

 

역사학자는 자료와 씨름하는 일이 일상이다. 조선시대가 전공인 필자가 뒤지는 ‘역사자료’, 즉 사료에는 ‘조선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기록도 있고, 토지나 집 매매문서도 있다. 거기에 사상사에 관심이 큰 나와 같은 사람은 문집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문집에는 대개 맨 앞에 시詩가 나온다. 예를 들어 퇴계 이황의 《퇴계집》에 권1∼5가 시고, 율곡 이이의 《율곡전서》 역시 초판본 11권 중 맨 앞 권이 시였다. 이어서 상소 같은 공문이 나온다. 그 다음으로 편지나 잡저가 실리고, 제문, 묘비문, 행장 등이 이어진다. 나는 문집의 맨 앞에 시가 배치되어 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가지 의문을 풀어야 했다. 첫째, 조선 학자들은 시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경계했다. 시를 지을 때 글자 놀이의 맛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시를 쓰다보면 글자를 고르느라 골몰하게 되고 말단의 일에 마음을 쓴다고 보았다. 수양과 성찰이 되어야할 공부가 말단에 흐르면 본연의 공부를 놓치기 쉽다고 걱정했다. 당시 쓰던 시란 주로 7자, 5자에 운韻을 맞추어 쓰는 한시漢詩로, 글자의 선택이 시 쓰기의 주요 프로세스였던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면 왜 그 사람의 일생을 담은 문집의 맨 앞에 시를 실었는가? 그렇게 시를 경계했으면서.

 

둘째, 한때 역사학과에서 논문을 쓸 때 문집에서 시는 건너뛰고 공문서 중심으로 자료를 찾았다. 시를 ‘허구의 문학작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한시를 읽지 못하는 역사 연구자들의 사료독해 수준도 한몫 했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더라도 문집 맨 앞에 실려 있는 ‘자료’를 건너뛰는 일이 타당한가?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맨 앞에 수록하였겠는가 말이다.

 

그러다가 퇴계 이황의 연보인 《퇴계선생연표월일조록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이라는 업적을 낸 정석태 선생을 뵙고 궁금증을 풀었다. 시는 당시 일기이기도 했다. 연보年譜는 대개 당사자의 사후에 동료나 제자, 후배들이 작성하지만, 시는 본인이 남긴 생생한 일기였다. 이문건李文楗(1494~1567)의 《아이 키운 기록[養兒錄]》이나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만 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일기를 시로 쓰는 것이 더 보편적인 형식이었다. 우리가 ‘날짜, 날씨, 다음에 무슨 일, 반성’ 같은 ‘형식’을 갖추어야 일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집에 실린 시를 일기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시를 일기라고 생각하고 읽어보니, 시는 그 사람의 일생을 따라 시기 순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시를 따라가면 그 사람의 일생이 보였다. 귀양을 가서도, 중국으로 사신을 가거나 지방관으로 나가도, 친구가 와도 그 일을 시로 남겼다. 여럿이 모이면 연구시聯句詩를 짓거나 서로 차운次韻하여 나누어가지고 기념하였다.

 

여행을 가거나 지방관으로 가는 일정 역시 시로 남겼다. 최근 신익상申翼相(1634~1697)이란 분의 《성재유고醒齋遺稿》 중 《함경도 변경 가는 기록[北關錄]》을 번역한 일이 있었다. 그는 현종 15년(1674) 8월 4일,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된 뒤 조정에 하직하고 한양을 나가면서부터 일정과 부임 과정을 시로 남기기 시작하였다.

 

한양을 떠나며 동대문 밖 길가에서 이단하李端夏, 박선朴銑 같은 친구들과 이별주를 나눈 일부터, 죽은 동생 생각과 못 만나고 온 매형 생각, 노원역 근처를 지날 때는 옛 집 생각을 시로 남겼다. 영평永平 창옥병蒼玉屛에서는 박순朴淳을 생각하고, 김화金化에서는 가까운 강원도 금성金城에 현령으로 와 있던 벗 이인환李寅煥을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회양淮陽, 철령鐵嶺, 학성鶴城, 춘성春城, 정평定平, 함흥咸興을 지나면서는 언제나 부임지에 도달할지, 집에 부친 편지는 잘 도착할지 싱숭생숭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남구만南九萬에게 시를 보내기도 하고, 김상헌金尙憲이 남긴 시의 운자韻字에 맞춰 시를 지었다. 그러다가 현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또 긴 시를 남겼다. 부임지인 경흥에 도착하여 보堡를 돌아본 과정도 같이 실려 있다.

 

신익상은 부임지에 도착했을 때 “길 떠난 지 30일, 1천 6백여 리를 와서 비로소 임소에 도착했으니, 길이 얼마나 먼지, 나그네로 보낸 날이 얼마나 지리했는지 알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필마로 표표히 변방으로 나섰는데 匹馬飄飄出塞庭

벽유는 오늘 저녁 비로소 행차 멈췄네 碧油今夕始驂停

떠나온 여정 거의 사천 리의 반이고 行程將半四千里

나그네 날짜 이미 삼십일 흘렀네 客日已更三十蓂

수염은 쓸쓸하게 숱한 한이 서렸고 鬢髪蕭蕭多少恨

산천은 줄지은 단정 장정 거쳤도다 山川歷歷短長亭

언제나 서쪽 돌아가는 길 다시 밟나 何時復踏西歸路

한 점 종남산 꿈속에서만 푸른데 一點終南夢裏靑

 

* 벽유는 벽유당碧油幢의 준말로, 푸른 휘장을 두른 장수의 수레를 말한다. 북평사인 자신이다.

* 단정, 장정은 역 사이사이 길고 짧은 거리에 있는 쉼터이다.

 

시가 일기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로, 나도 가끔 시로 일기를 쓴다. 한시 능력이 짧기 때문에 그냥 글자 수만 맞추어 쓴다. 연습이다. 다음은 휴가 나왔던 둘째를 생각하며 일기장에 끄적거린 시이다. 제목은 〈지성이를 그리며[思誠之]〉이다.

 

완산 학교 가는 길 전화 소리 잊었다가 完山登校忘電跡

아이가 감나무 밑 도착했음 문득 알았네 纔覺二兒到柿下

징발된 님 그리는 시 대충대충 넘겼는데 詩云征夫泛泛看

지금도 군대 가는 일 그 맘보다 더한 듯 役是當今有甚焉

 

* 성지誠之는 작은 아들 지성志成이의 자字다. 내가 《중용中庸》을 읽다가 “성실함 그 자체는 하늘의 길이다. 성실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는 말에서 따왔다. ‘지성’의 한글 음을 바꾸면 ‘성지’가 되기에 장난기도 섞여있다.

* 완산은 전주 완산구인데, 전주대학교가 거기 있다.

* 시하柿下, 감나무 밑이란 인천 우리 집을 말한다. 사랑스런 감나무 두 그루가 서있는 집. 내 책에는 모두 그 감나무 얘기가 나온다.

* 《시경詩經》에 보면 변방으로 군대 간 님=남편을 그리는 시가 많다. 언제 돌아올까 기다리며 마음 아파하는 시이다.

 

퇴계든 율곡이든 시를 따라가면 그 일생의 행적과 주요 사건을 만날 수 있다. 조선만이 아니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당나라 백거이白居易가 쓴 〈장한가長恨歌〉의 일부를 보자. 바로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이야기이다.

 

어양의 북소리 땅을 울리며 다가오니 漁陽鼙鼓動地來

크게 놀라 부르던 노래 가락 멈추었고 驚破霓裳羽衣曲

구중궁궐 연기와 먼지 피어오르니 九重城闕煙塵生

임금 수레 수만 기병 서남으로 피난가네 千乘萬騎西南行

황제 깃발 휘날리며 가다가는 멈추면서 翠華搖搖行復止

연추문 나서 장안 서쪽으로 백여 리쯤 西出都門百餘里

군대가 멈춰서니 임금도 어쩔 수 없다 六軍不發無奈何

미인은 임금 말 앞에 떨어져 죽는구나 宛轉蛾眉馬前死 

 

어양은 당나라 때 지방장관 안록산安祿)의 근거지이고, 북소리라는 것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이다. 그 소리에 현종과 음악을 즐기던 양귀비는 놀라서 거문고를 텅 내려놓는다. 이어 안록산에게 장안이 점령되어 궁궐은 한순간에 불타는 연기와 놀라 피란 가는 행렬이 일으키는 먼지에 휩싸인다.

 

피란 가는 황제를 태운 가마는 길을 트는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장안을 나서 백 리쯤 갔을 때, 장수들이 군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이 반란의 원인이 양귀비에게 있으니 그를 처단하라는 것이었다. 황제의 군대가 버티고 요구하니 피난을 가야하는 현종은 어쩔 도리가 없다. 때는 천보天寶 15년(756), 장소는 마외역馬嵬驛이었다.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서쪽으로 25리 거리였다. 아끼고 사랑하던 양귀비는 군사들에게 끌려가 불당佛堂에서 목 졸려 살해되었다. 양귀비의 시신은 누가 거두지도 않았고 마외역 뜰에 버려졌다. 이 시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다. 시이기 때문에 축약, 생략은 있지만, 사실의 형상화이다. 정사正史인 《당서唐書》에도 위의 사실이 그대로 나와 있다.

 

시가 일기였기 때문에 문집을 만들 때 맨 앞에 실었던 것이다. 그 사람의 하루하루, 일생을 쭉 볼 수 있는 자료이므로. 이런 점을 모르면 정작 가장 중요한 당사자의 일기는 쏙 빼고 엉뚱한 자료를 먼저 뒤적이게 된다. 이는 무궁한 사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