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걸음 더] ‘발해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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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걸음 더

발해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박순우(중세1분과)

 

발해 멸망 이후의 ‘발해인’에 대한 연구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직후 그들을 요나라 내지로 강제 천사(이동)시켰던 점, 그리고 다수의 발해 유민이 고려에 내투(귀화)한 점에만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느낌이 없지 않다.

중원에 남은 발해인에 대한 시각은 그리 긍정적이지 못했다. 중국 내 피지배민족으로서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을 것이라는 시각(한국 학계), 여러 민족 중 하나의 종족이었을 따름이라는 일종의 평가절하(중국 학계) 정도가 지배적이다. 간혹 이분법적인 시각마저 노출되는데, 중국 학계의 경우 발해 유민들의 중국사회로의 동화만 강조했던 데 비해 한국 학계는 발해 유민들의 ‘반요反遼’ 활동을 비중 있게 검토했던 결과이다. 이러다 보니 멸망 후 발해인들 중 한반도에 귀화한 경우만 한국사의 영역에서 논의되고, 중국사회 속 발해인들은 ‘피해자’ 또는 ‘항거자抗拒者’, 그리고 중국 사회에 흡수된 발해인들은 그저 ‘중국인’으로만 간주돼 연구에서 누락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발해라는 왕조를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일부분이자 한반도 역사의 연장으로 간주한다면, 멸망 이전이든 멸망 후든 ‘발해인’으로 불린 이들 중 일부만을 한국사의 영역에 편입하고 나머지를 배제해선 안 될 일이다. 한반도에 살았든 중국 대륙에 살았든 그들이 발해인으로 불린 이유를 규명하고 그들의 발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 후 그들 모두의 삶을 검토함으로써 멸망 이후의 발해사 또한 포괄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멸망 전후를 구분하고, 그 소재지를 구분하고, 그 국적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인식을 탈피하여, 멸망 후 발해인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복원해야 하는 것이며, 필자는 그를 고려시대(10-14세기)를 배경으로 최근 시도한 바 있다.

‘발해인’ 연구의 확대와 심화를 위해 새로 개발돼야 할 연구 주제는 너무나 많다. 우선 거주 지역을 막론하고,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아간 발해인들의 행적을 지역별, 권역별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한반도 내 거주 지역들과 관련해서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대한 적극적인 참조가 요망된다. 묘지명 및 금석문 역시 기존에 발견된 경우를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사례들을 적극 찾아나서야 한다.

한편 중원 지역에서 활동한 발해인들의 경우 요대를 넘어 금대와 원대 발해인들의 생활상에 대한 관심이 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금대와 원대 발해인들의 경우 과연 발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얼마 정도나 유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옛 왕조명으로서의 ‘발해’와 ‘지명’으로서의 ‘발해’ 중 무엇이 그들의 삶을 더 규정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치한 논의 또한 전개돼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강화돼야 할 연구 분야는 한반도와 중국 각지 소재 ‘발해인’들의 자의식과 감정, 그리고 발해인들 간에 존재했을 (지도 모를) 연대의 정황(또는 배척의 정황) 등이다. 예컨대 지역별 발해인들의 자의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발해 문화의 지역별, 세대별 승계의 정도를 엿보는 작업으로, 후대 ‘발해인’의 개념 규정에도 필요한 작업이다. 아울러 요나라의 지방제도에 편입돼 있었으되(동경도) 거의 자치 상태에 있었던 발해인 정치체(올야부·발해부·정안국 등) 간의 상호 인식 또한 따져봐야 할 대목인데, 이 역시 왕조로서의 발해가 해체된 후 낳았던 여러 정치체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될 경우 ‘발해인’ 연구의 일보 전진은 물론 ‘왕조 멸망 후 그 구성원들의 역사’를 구축하는 선례도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짚어볼 점은 이른바 ‘발해상渤海像’의 재생산 과정이다. 고려 후기 현달한 발해인들을 중심으로 ‘선대 발해인’에 대한 일종의 ‘추념 의식’이 형성되는데-이는 중원에 남았던 발해인들과는 명백히 다른 면모다- 그것이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정황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추념 의식의 확대재생산(과정)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전개된 역사적인 추세였을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발해상의 형성에도 직간접적으로 기여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멸망 후 발해사의 복원작업과 함께 병행돼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언급할 것은 중국 측 자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의 필요성이다. 우선 기존 자료의 활용이 대단히 절실하다. 발해인에 대한 한국 측 기록은 대체로 모두 연구돼 왔으나 중국 측 사서 속 발해인 관련 기록은 한국사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것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행히 《요사遼史》(2012)와 《금사金史》(2016) 국역본이 최근 출판돼 도움이 되지만 그마저도 정독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며, 그 외에 참조해야 할 사료 또한 무수히 많다. 필자 역시 학위논문을 준비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이 중국 측 사서에 담긴 발해인 관련 기사들의 정리와 번역이었는데, 앞으로도 발굴, 수집된 기록들에 대한 교차검토 및 비교분석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중국측 사적史籍에 담긴 ‘발해인에 대한 묘사와 기록’을 검토하기에 앞서, 관찬 및 사찬 사서 모두 관과 개인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돼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찬자의 출신 및 성향, 학문적 배경 등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종족異種族에 대한 찬자의 인식과 입장, 당시의 시대 상황과 배경 등을 적절히 감안해야 해석상의 오류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러 사서에 등장한 발해인 관련 기록들을 서로 대차대조 및 비교하는 작업이 큰 도움이 된다. 중원에서의 10~14세기는 왕조의 교체가 잦았던 시기로서 사료에 따라 동일 사건을 다르게 기술하거나, 아예 축소, 배제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지금까지 ‘발해인’ 연구를 수행해 오면서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몇 가지 문제이다. 이 중에는 “‘고려시대(또는 조선시대) 발해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질문 또한 담겨 있다.

첫 번째로, 발해 멸망 후 ‘그 많던 발해인들의 향방’에 대한 의문이다. 발해인이 고려와 중원 중 어느 지역으로 많이 이동했느냐를 두고 한-중간에 적지 않은 이견이 표출됐던 이슈이기도 하다. 필자가 볼 때, 이 시기 자료들의 성격을 감안하면 과도한 관심이라 할 수 있다. 《요사遼史》 지리지 주현조에는 주현의 연혁을 설명하는 기사에 발해인의 천사 여부와 (기사 말미에) ‘호수戶數’도 기록됐는데, 문제는 이것이 ‘옮겨온 발해인 호수’만을 지칭하는지, 아니면 해당 주현의 ‘총 호수’를 의미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록의 모호함은 고려 측 자료도 마찬가지다. 발해인들의 내투 현황을 비교적 충실하게 기록한 《고려사高麗史》에도 ‘수만數萬(2회; 태조·경종대)’, ‘솔민率民’, ‘심중甚衆’ 등의 막연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래서는 아무도 ‘고려 내투 발해인의 총수總數가 얼마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불명확한 숫자를 갖고 발해인들의 향방의 규모는 물론 그 이동의 의미까지 언급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에 의해 멸망한 발해국 인민의 상당수가 요의 공권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강제 천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인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발해인들이 한반도행을 택한 것을 두고 부정 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보다는 강제 천사된 발해인들이 이후 요에서 후주後周나 송宋으로 도망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발해인들의 난에 어떻게 그토록 많은 발해인들과 주변 이종족異種族이 동참했는지, 왜 요대 전 시기에 걸쳐 끊이지 않던 발해인들의 봉기가 이후에는 줄었는지, 후대 발해인들은 ‘선대 발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등을 끊임없이 해명하고 평가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길이라 믿는다.

두 번째는 고려에 내투한 발해인들의 ‘배치 지역’과, 그들이 고려의 한 군종이었던 ‘투화군投化軍’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다. 《요사遼史》는 발해인들이 어느 지역에 배치됐고 어떤 역役에 동원했는지를 대략적으로나마 보여주는 반면,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대광현의 무리를 (서해도) 배주白州 (일대)에 배치했다는 것 외에 정작 ‘귀화 후 상황’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연구 초기에는 발해인들의 집단 봉기 가능성을 염려해 남부 지역에 (분산) 배치했을 것으로 보아온 견해가 있었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는 등 논의는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직접적 사료가 부족한 상황이므로) 다음에 제시하는 조건을 숙고한 뒤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고려해야 할 점은 ① 당시 북방의 군사적 상황으로서 군세를 확장해오는 요의 위협과 그에 대한 고려 태조 왕건의 인식이다. 태조는 재위 초기부터 북방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측근을 평양에 보내어 국경의 방어 태세를 강화한 바 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내투 발해인을 활용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② 많은 수의 발해인을 수용할 수 있는 토지 문제도 고민했을 것이다. 이는 발해인뿐 아니라 고려인의 사회‧ 경제적 문제까지 연동되는 만큼 내부의 문제를 촉발할 수 있는 예민한 사안이기에, 발해인들이 배치될 수 있었던 지역은 비교적 인구가 희박하거나, 많은 수의 인력 동원이 필요한 곳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아울러, ③ 이 시기 고려 정부가 북방의 이종족異種族들을 동원하거나 그들을 고려의 ‘투화군’에 편입시켰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내투 발해인의 상당수가 ‘군직軍職’을 보유한 무장이라는 사실과, 대광현을 따라 내려온 ‘요좌僚佐’들에게 작위를 내려줄 당시 ‘군사軍士에게 전택田宅을 하사했다’는 기록 역시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기사이다. 이상을 고려할 때 내투 발해인들을 북방에 배치하고, 군사로 활용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크다. 실제로도 발해인들은 대거란 전쟁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적지 않은 역사가들이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에 민족사적 의미를 부여해 왔던 것은, 그것이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았고, 북방의 옛 영토를 일부나마 회복했다’는 점 뿐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인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써 지역적으로나 인적 구성으로나 일보 전진’했던 점 때문이다. 발해인들의 존재가 후삼국 통일의 의미를 배가시켜 준 셈으로, 그러한 발해인들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보여준 활동상에 무관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그들과 동시기에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들의 삶 역시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들 역시 멸망 전 발해의 일부였거나, 멸망 전의 발해문명을 어떤 형태로든 유지하고 있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발해의 유산을 대변하는 바가 있다. ‘발해’의 역사, ‘발해인’이라는 개념, ‘발해 문화’라는 담론을 유지하고 교신했던 이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시 말해 ‘발해인’의 역사는 926년에서 끝났던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역사의 하한을 내려 잡고 그 공간도 넓혀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민족주의적‧확장주의적 역사인식을 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여러 모습으로 존재했을 발해인들의 유형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