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한 걸음 더] 독립의 심리, 친일의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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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연구회의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하고 있는 <한국사연구의 현장>(가제)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난 2017년 9월 회원 여러분께 처음 말씀드리고 원고를 모집하기 시작된 뒤 짧은 집필 기간에도 불구하고 60명 가까이 되는 회원들이 약 70편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사전 기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분과별로 12~15편 씩 균형도 잘 맞추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간행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 원칙 등을 정하고 원고에 대한 일차 검토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푸른역사’와 출판 계약을 맺고, 연구회 30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2018년 9월 1일 간행을 목표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출판사의 초교를 마치고 필자들께 수정과 보완을 부탁드린 상태입니다.

<한국사연구의 현장>(가제)은 우리 연구회 회원들이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 주제를 드러내는 책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연구회의 연구 역량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향후 10년까지 한국사 연구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논문 쓰기에 익숙한 우리 연구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발표하는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함으로써 연구자 간 정보 교류를 촉진하고, 더 나아가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연구회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이 우리의 지난 발자취를 회고할 뿐 아니라 앞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익주(한국역사연구회 회장, 중세1분과)


한국사연구의 현장

독립의 심리, 친일의 심리

 

 김정인(근대사분과)

 

이광수는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가 재판정에서 한 최후 진술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 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중략)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하였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는 말을 궤변 혹은 변명이라 치부한다. 그런데 이 평가는 이광수 본인이 마음으로는 친일이 부끄러운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려 했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새삼 이런 의문을 품어보자. 이광수는 자신의 친일 행위를 정말 수치스럽게 생각했을까? 세상의 이목이 쏠리는 재판정에서 내뱉은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는 언설은 궤변이 아니라 솔직한 자기고백이 아니었을까?

 

해방 후 이광수는 안창호의 전기를 집필했고 1947년 5월에 《도산 안창호》라는 제목을 달아 출간했다. 그는 마지막 장을 ‘상애相愛의 세계’라 제목 짓고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도산은 우리나라를 사랑의 나라, 미소의 나라로 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기 위하여서 자신이 사랑과 미소를 공부하고 또 동지들에게 사랑과 미소 공부를 권면했다. ‘훈훈한 마음, 빙그레 웃는 낯’ 이것이 도산이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다. 100년이 되거나 1000년이 되거나 이 모습을 완성하자는 것이 도산의 민족 운동의 이상이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전기를 마무리하면서 이광수는 왜 민족운동의 이상으로 ‘사랑과 미소’를 강조했을까. 이때의 이광수의 마음과 생각(心+理)은 2년 후 재판정에서 진술한 ‘민족을 위해 친일했다’는 언설과 관련이 없을까? 《도산 안창호》는 여느 전기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대화 장면이 많고 곳곳에서 안창호의 심리를 묘사하는 특징을 보인다. 대표적 친일파로 각인된 이광수가 안창호의 전기를 쓴 후과는 적지 않았다. 이후로 한참 동안 안창호는 이광수처럼 준비론과 실력양성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민족개량주의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지만 독립운동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안창호가 자치론과 실력양성론을 신랄히 비판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광수는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민족개조론을 내놓았다고 주장했으나, 이광수가 말하는 개조와 안창호가 말하는 개조가 다르다는 점도 드러났다. 이광수는 식민 지배를 받는 조선인으로서의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떨쳐내기 위한 개조를 강조했다. 2017년에 유선영이 쓴 《식민지 트라우마》(푸른역사)에 따르면 식민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선택이 바로 개조였던 것이다.

 

반면 안창호는 독립적 개인의 내면적 각성, 즉 철저한 자기비판 의식에 기반한 개조를 주장했다. 이처럼 개조의 주체를 개인으로 본 안창호는 일관되게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반면 민족의 개조를 강조한 이광수는 변절했고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개조에 대한 인식 차이가 두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까? 개조에 대한 인식 차이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일까?

 

이광수에게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는 건 그도 독립운동 전선에서 활약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안창호와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6살의 나이에 상하이를 찾은 김산에게 제일 먼저 영향을 준 사람은 “민족주의의 쌍벽”으로 이름난 안창호와 이광수였다. 당시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노동총판이었고 흥사단의 지도자였다. 이광수는 《독립신문》의 편집장이자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의 주임이었다. ‘조선에서 사제지간이었던 때부터 친밀한 동지’였던 두 사람의 행보는 이광수가 국내로 들어오면서 균열을 보였다. 안창호는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광수는 민족개조론과 자치론을 설파했고, 끝내는 친일의 길을 걸었다. 김산은 두 사람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했다.

 

“안창호는 부르주아적 원칙을 따른 민주적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반면에, 이광수는 그것과 평행한 상층 부르주아와 부르주아 지식층의 자유주의적 문화운동을 대변하고 있다. 이광수는 프롤레타리아의 세력 증대에 반대하지만 안창호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한다. 이광수는 가부장제 귀족주의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안창호는 참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이다. 쑨원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안창호는 공산주의의 이론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조선공산당을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님웨일즈․김산, 《아리랑》, 동녘, 2014, 152~153쪽)

 

이처럼 김산은 안창호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적’, ‘민주적’이라는 수식어를 썼고, 이광수에 대해서는 ‘가부장제 귀족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즉, 독립운동을 함께 했음에도 결국 독립과 친일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에 대해 김산은 자유주의적인 안창호와 가부장적인 이광수, 민주주의적인 안창호와 귀족주의적인 이광수로 대비했다. 그렇다면, 안창호는 자유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 독립의 길을 걸었고, 이광수는 가부장적이고 귀족주의적인 품성을 갖고 있어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일까?

 

평소 독립운동을 들여다보면서 안창호와 이광수가 갈라선 지점은 어딜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김산의 평가를 접하면서 독립과 친일의 길을 가른 지점은 두 사람의 정동emotion과 지각, 그리고 성향 등을 포함한 심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흔히 ‘반드시 독립한다’는 굳센 신념의 유무가 독립과 친일의 길을 가른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념 역시 심리의 영역에 속한다.

 

이런 고민을 하다가 역사심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제껏 역사학계는 연구 대상이 되는 인물의 언설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 인식을 따지고 정치노선을 갈라왔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빚은 심리를 바탕으로 현실을 파악하기 마련이므로 우선은 그와 같은 심리의 형성 과정을 따지고 그것이 현실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루마니아 출생인 사회학자인 제베데이 바르부가 쓴 《역사심리학》(창작과 비평사)이 한국에서 번역된 것은 1983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역사심리학 분야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역사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심리를 역사적인 현상으로 본다. 그것은 특정한 사회의 역사적 변화, 특히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변화에 의해 규정된다. 역사심리학은 과거의 인물과 사건을 다루면서 심리적 요인이나 결과를 간과했던 경향을 비판한다. 비심리적 배경이 심리적 결과를 낳고 그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비심리적인 사회와 문화를 바꾸기도 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즘의 등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망상적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망상적 성향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독일을 뒤흔든 위기가 초래한 불안 의식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 사회에서 망상적 성향의 히틀러‘들’이 많아지는 가운데 마침내 히틀러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망상적 성향은 새로운 변화, 즉 나치즘의 등장을 가져왔고 유럽을 전쟁의 포화 속으로 몰아넣었다.

 

다시 말해 역사심리학은 과거의 경험이 어떻게 심리를 규정하고 또한 그 심리는 어떤 변화를 초래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역사심리학은 일반 심리학처럼 임상 결과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록에서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증거를 모아 심리를 규명하고 행동과 엮어내는 작업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녹록치 않은 분야다.

 

안창호와 이광수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 사람은 독립의 길을, 한 사람은 친일의 길을 가게 된 원인으로서의 심리의 변화는 어떻게 추적해야 할까. 독립과 친일의 심리에는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면 결국 두 사람이 살아온 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적 삶과 사회적․문화적 환경의 공통점과 차이점부터 찾아야 한다. 그로부터 형성된 심리의 결과가 독립과 친일이라는 행동으로 발현되는 과정 또한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독립과 친일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두 사람의 심리를 추적하지만, 그 결과로서 구성되는 두 심리가 명쾌하게 구분될지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를 쓰면서 안창호의 심리를 풍성하게 묘사했다. 친일의 행적을 가진 저자가 독립운동가의 심리를 헤아리려 했던 것이다.

 

필리프 아리에스는 심성사 분야를 개척한 아날학파 3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다. 그는 심성사적인 시각에서 쓴 자서전인 《일요일의 역사가》(이마, 2017)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은 모순적이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인간의 심리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단순 명료하지 않다. 하지만 복잡하고 모순적인 심리를 갖고 있는 인간‘들’이었음에도 각기 독립과 친일이라는 다른 길을 걷도록 만든 심리적 변곡점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작업으로 역사심리학 연구를 시작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