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 고맙고 그리운 <왕(王)반>과 <영상역사학습반> 구성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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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은 한국역사연구회가 창립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연구회는 연구회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자리를 갖는 자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0주년 기념식’의 개최, ≪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가제)와 ≪한국사 연구의 현장≫(가제) 간행 등이 그것입니다. 미디어위원회는 이를 준비하는 과정을 연구회원들에게 알리고, 30주년의 의미를 더욱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특집 코너를 마련하였습니다. 기념식 및 기념도서 발간에 앞서 각 기획의 취지를 설명하고 발표될 원고의 일부를 여러분들께 소개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국역사연구회 미디어위원회


 

한국역사연구회 30년사

고맙고 그리운 <왕(王)반>과

<영상역사학습반> 구성원들

 

김기덕(중세1분과)

 

1. 연구반 활동

한국역사연구회 활동의 핵심은 각 분과 총회와 연구반 활동이다. 전국의 시기별 연구자들이 한 달에 한번 모여서 함께 토론하는 분과총회는 ‘같은 시기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의 소통’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연구회 결성의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각 분과가 모두 모여서 이루어지는 총회 및 전체 모임은 보다 크게 전국의 한국사연구자들의 전체 모임으로서, 한국역사학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시대적 사명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연구회 전체 모임과 각 시기 분과총회 모임을 밑에서 뒷받침한 것이 다양한 연구반 모임이었다. 주제를 같이 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고 성과를 내는 연구반은 한국역사연구회의 핵심 활동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주로 했던 연구반은 <원(元)반>, <개경반>. <왕(王)반>, <영상역사학습반> 등이 있다. 이 중 <원(元)반(정식명칭: 원간섭기 사회성격 연구반, 1989-1991)>과 <개경반(정식명칭: 12세기 개경사 연구반, 1999-2003>은 대체로 잘 진행되었고, 연구발표회 및 단행본 출간 등 많은 성과가 있었으며,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회고 글을 남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또 참가했던 <왕(王)반(정식명칭: 국왕연구반, 1993-1998)>과 <영상역사반(정식명칭: 영상역사학습반, 2001-2002)>은 가시적인 연구성과를 연구회에 확실히 제출하지 못했으며 다소 독특했다는 점에서, 이 자리를 빌어 내가 회고의 글을 남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 1993-1998>

(1) <왕(王)반>은 처음 시작에서는 대단히 의욕이 컸고, 구성원도 만만치 않았다. 임기환, 강봉룡(고대), 김기덕, 이익주(중세1), 남지대, 홍순민, 백옥경, 김돈(중세2) 등이 참가하였다.

 

전근대시대 왕의 중요성은 당연히 가장 컸지만, 정작 ‘왕’이라는 주제를 각 왕조별로 구조적으로 이해해 보자는 시도는 다소 무모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성원에서 보듯이 나름 내로라 하는 정예 인력이 도전해 본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었으며, 각각의 구라와 같은 여러 담론으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2) 당시 남지대 교수는 청주에서 올라왔고, 백옥경 교수는 집이 수도권으로 좀 멀었다. 마침 나는 간호사였던 집사람을 픽업해주어야 해서 연구회에서는 일찍 차를 가진 편이었다. 연구반이 끝나면 항상 하는 애프터를 끝내면 늦은 시간이 된다. 그러면 내 차로 남지대 교수 시외버스 타는 곳이나 백옥경 교수 집을 데려다 준 기억이 난다. 심지어는 아예 남지대 교수에게 서비스를 한다고 청주까지 갔다온 적도 있다. 내가 반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구성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3) 왕반은 1997년에 <한국 정치사의 흐름과 왕권의 위상>이라는 주제로 월례발표회를 한 바 있으나, 아쉽게도 그 이후에는 가시적인 성과물 없이 연구반 활동이 종료되었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왕반은 실패한 연구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구성원들의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난 반면, 앞서 말했듯이 왕이라는 주제를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정리해본다는 것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었다는 변명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주제로 한 여러 담론과 시각을 공유하며 즐거운 연구반 모임을 했다는 기억은 모든 구성원들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갖고 결과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닐까 한다. 연구반 활동에서 나누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뒤에 각자의 개별연구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4) 내 개인적으로는 이후 역사비평에서 각 왕조별 왕을 다룬 기획특집에서 <고려시대 왕>을 집필하였다(「고려시대의 왕」, 『역사비평』 54, 역사문제연구소, 2001). 그 때 역사비평 기획처럼 왕반 연구회 발표도 그러한 식으로 기획하여 진행하였다면 좀더 편안하게 각 구성원들의 능력이 발휘되었을 것이고, 단행본이라는 결과물도 출간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다소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행운으로 고려시대 성원록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글을 남기게 된 것(「고려시대 왕실선원록의 복원시도」, 『역사와 현실』 43, 한국역사연구회, 2002) 또한 간접적이나마 왕반 작업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연구성과를 내는데는 다소 실패했지만, 나는 왕반 시절을 대단히 즐겁게 회상하고 고마워하는데, 우리의 대단했던 왕반 구성원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3. <영상역사학습반, 2001-2002>

(1) 새로운 밀레니움의 시작이라는 2000년은 나에게도 커다란 전기를 가져온 해였다. 나는 그때 대략 5년전부터 고려시대 연구에서 오행사상, 풍수사상에 새롭게 매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오행사상과 풍수사상의 핵심으로 나 나름대로 ‘관계’라는 키워드를 추출해냈다.

 

‘관계’를 화두로 사색하고 있던 2000년 1월의 어느날 오후, 나는 인터넷을 하려고 컴퓨터 버튼을 누르려다가 갑자기 인터넷이라는 용어에 꽂혔다. 인터넷이란 ‘주고받는(interactive) 관계망(networking)’이 아니던가? 나에게는 저 오래된 오행과 풍수사상의 화두인 ‘관계’와 ‘인터넷’의 용어가 함께 만나는 순간이었다.

 

아 인터넷이 그냥 나온 도구가 아니구나? 그러한 작은 깨달음 속에서 바로 시내 교보문고로 달려가 21세기 인터넷, 정보, 디지털, 영상 관련 책들을 보이는데로 사가지고 와서 통독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것을 초고로 작성했고, 그 해 2000년 5월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하고 학회지에 게재하였다(「정보화시대의 역사학, 영상역사학을 제창한다」, 『역사교육』 75, 2000).

 

(2) 나는 21세기 디지털시대를 맞아 역사학에서 영상의 문제를 좀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상은 나의 영상 지식은 별것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디지털영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한겨레신문사의 VJ과정을 이수하는 한편, 연구회에서 영상에 관심있는 회원들을 모아 영상역사반을 결성하였다. 당시 참여자는 김기덕(중세1), 박광용(중세2), 주진오(근대1), 김덕영(근대2)이었으며, 외부에서 경기대 김기봉교수가 참가하였다. 처음 1년은 외부의 영상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듣고 토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자리에서 꼭 밝히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시 외부 초청자에게 특강료를 전혀 주지 못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저희가 ‘역사적 관점’에서 토론을 해 본다면 선생님에게도 다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면 그들은 전부 수락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영상전문가라도 ‘역사적 관점’을 대단히 중시하고 그 점을 검증받고 싶어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다른 면에서는 역사학자의 또다른 책임감을 강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3) 2년차에서는 TV사극과 역사다큐멘터리를 리뷰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같이 공부한 회원들은 비록 연구반의 이름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각자 개별적으로 역사와 영상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냈다. 나의 경우에도 인문학과 영상의 다양한 만남을 살펴보는 단행본을 출간했고(『우리 인문학과 영상』, 푸른역사, 2002), 영상역사물을 리뷰한 글을 모은 책(『영상역사학』, 생각의나무, 2005)을 출간하였다.

 

(4) 영상역사반은 2년간의 활동 후, 진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김기봉교수는 이후 주된 연구분야를 영상역사로 전환했으며, 주진오 교수는 학과를 영상을 위주로하는 ‘역사콘텐츠학과’로 전환하기도 했다. 나는 영상역사 보다 더 큰 개념인 文史哲 인문학과 문화산업을 연결하는 ‘문화콘텐츠’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그 결과 2002년 10월에 ‘인문콘텐츠학회’를 결성했으며, 역사학의 새로운 변화와 관련된 글을 연구회에 기고하기도 했다(「전통 역사학의 응용적 측면의 새로운 흐름과 과제」, 『역사와 현실』 58, 2005). 이후 나의 주된 연구과제는 역사학을 포함하여 인문학의 활용을 고민하는 문화콘텐츠학 분야를 정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나의 여정에서 연구회의 영상역사반은 너무나 소중한 과정이었음을 감사하고자 한다.

 

4. 하나의 희망사항

(1) 아마도 내가 계속 연구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면 ‘디지털인문학연구반’을 시도했을 것이다. 디지털인문학의 핵심은 역사학이 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연구회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증대되기를 희망한다. 이에 대한 기본 글은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김현, 「디지털인문학」, 『인문콘텐츠』 29, 2013; 김기덕, 「2014 세계디지털인문학 학술대회 및 한국의 디지털인문학」, 『인문콘텐츠』 34, 2014).

 

(2) 전국의 역사학 관련학과 및 역사학 연구자의 편차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의 본령을 지키되, 각자의 상황에서 보다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구회라는 것은 단지 한국사 관련 학과의 상황에만 매몰되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경우 외람되지만, 항상 제로섬의 시각이 아니라 시너지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즉 역사학의 ‘확장’이라는 관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3) 1988년 연구회는 한국역사의 흐름에서 커다란 이정표를 세웠다. 이제 연구회 3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학의 본령을 지키면서도, 새롭게 제기되는 여러 변수와 변화들을 보다 큰 그림에서 사고하고 토론하는 연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