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乙巳條約 이후 일본의 ‘韓國倂合’ 과정 연구 : 日本人 실무관료의 활동을 중심으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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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乙巳條約 이후 일본의 ‘韓國倂合’ 과정 연구

: 日本人 실무관료의 활동을 중심으로』 (2)

(2016.08.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한성민(근대사분과)

 

본 연구는 ‘한국병합’을 정부내 노선 대립의 산물이나 국제법적 합법 비합법 여부로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일관된 방침 하에 일본 사회가 지지하고 실무관료가 지속적으로 추진한 침략정책이었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다.  일본의 ‘한국병합’ 추진 과정에서 기획과 실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관료는 陸軍省 參事官 겸 法制局 참사관 아키야마 마사노스케(秋山雅之介), 統監府 外務部長 고마츠 미도리(小松綠), 그리고 外務省 政務局長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각각 군부, 통감부, 외무성을 대표하는데, 그 중에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구라치였다.

 

[그림7] 일본 외무성에서 ‘한국병합’ 정책을 담당한 구라치 데츠키치(倉知鐵吉)

 

‘한국병합’은 열강과의 이해관계 조정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또한 한국사회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일본의 의도에 맞게 통치제체를 준비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일본 군부의 과격한 입장보다 외무성을 중심으로 점진적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계나 일본 사회 내부에서 심각한 대립은 없었다. 일본정부는 청일전쟁 講和 과정에서 군부의 요구를 반영하여 ‘시모노세키(下關) 조약(1895)’을 통해 淸國으로부터 랴오뚱(遼東)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청일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었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간섭에 의해 일본은 랴오뚱반도를 청국에 반환해야 했다.

 

[그림8·9] 일본 육군성의 아키야마 마사노스케(秋山雅之介)·통감부의 고마츠 미도리(小松綠)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게 국가적 치욕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대외문제에서는 사전에 열강과의 이해관계 조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국병합’은 외무성을 중심으로 추진되었고, 그것을 현장에서 실현해 나간 대표적인 실무관료 중 하나가 구라치였다. 이 시기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관계 또는 지배권을 강화해 갔던 주요 사건들에서는 구라치의 활동 궤적이 어김없이 확인된다.

 

일본은 국가 자원을 총동원하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두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반도에 대한 직접적인 경쟁자를 배제하고, 다른 열강으로부터 한국을 일본의 세력권으로 인정받았다. 즉 러일전쟁의 종결을 전후한 1905년의 가츠라-태프트 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드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은 미국·영국·러시아의 3대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도, 감독 및 보호의 권리”를 승인받은 후에야 ‘한국병합’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한국병합’ 추진의 본격적인 첫 단계가 한국을 강압하여 보호관계를 설정한 ‘을사조약’의 체결이었다.

 

본 연구는 ‘을사조약’ 체결 이래 ‘한국병합’까지의 과정을 保護關係의 적용, 국제적 공인, 유지, ‘한국병합’ 실행의 4단계로 구분하였다. 각 단계별로 대표적인 사건과 일본인 실무관료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해당 시기 일본의 한국정책의 성격을 규명하면서 그 최종단계로서의 ‘한국병합’ 과정을 고찰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 ‘皇室特派留學生들의 同盟退校運動(1905)’, ‘헤이그 特使 사건(1907)’, ‘安重根 의거(1909)’, ‘倂合準備委員會(1910)’의 조직이었다.

 

[그림10] ‘제2차 한일협정(을사조약)’

 

첫 번째 단계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보호관계의 적용이다. 1905년 11월 일본의 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재학 중이었던 한국의 황실특파유학생들은 유학생에 대한 처우와 ‘을사조약’ 체결에 반발하여 동맹퇴교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을사조약’ 이후 한일 간에 처음으로 부각된 외교적 사안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을사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박탈되었고, 해외의 한국인은 일본정부의 통제를 받는다는 것을 한국정부 및 한국인들에게 확실히 인식시키려 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의 의도를 실무차원에서 실행한 인물이 일본 외무성 참사관 겸 통감부 서기관 구라치였다.

 

초대 통감 이토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시를 받은 구라치는 일본 외무성의 현직을 유지한 채 통감부 및 한국정부로부터 관련 권한을 위임받았다. 이처럼 관료 1인이 한국정부, 통감부, 일본정부의 3곳으로부터 동시에 권한을 위임받은 것은 그 이후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였다. 이는 해외에서 발생한 한국의 사안에 대해 통감부와 일본 정부가 결정권을 갖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 첫 사례였다. 아울러,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신설 통감부가 한국의 외교권 대리를 빌미로 유학생 관리라는 한국의 내정 개입에까지 그 권력과 위상을 형성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단계는 한국에 대한 보호관계의 국제적으로 공인이었다. 1907년 6월의 제2회 萬國平和會議에 고종황제는 李相卨·李儁·李瑋鍾 및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한국의 만국평화회의 참가문제는 ‘한국병합’을 추진하고 있던 일본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할지도 모를 중대 사안이었다. 한국이 이 회의에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면 그 자체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은 死文化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獨立國으로 공인받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대표가 회의 참가를 허가받지 못할 경우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일본은 제2회 만국평화회에 대한 대책으로 첫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를 참가하지 못하게 봉쇄할 것, 둘째,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도록 만국평화회의 개최 이전까지 불일협약을 타결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문제 해결의 적임자로 선택된 인물이 츠즈키 게이로쿠(都築馨六)와 구라치였다.

 

일본정부는 列强과 협의하여 한국특사의 평화회의 참가를 구조적으로 저지하였으나 그들의 다양한 인물이나 기자들을 만나 일본의 불법적 침탈을 호소하는 활동 자체는 방해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국제사회에 대해 일본은 한국특사단의 공개적인 반일 활동도 허용할 정도로 한국에 대해 자유롭고 문명적인 지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도 다른 서구 열강처럼 식민지를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둘째,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高宗을 강제 퇴위시키고, 새로운 조약(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을 장악할 의도였다.

 

[그림11] ‘제3차 한일협정(정미조약)’

 

세 번째 단계는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세에서 한국에 대한 보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1909년 7월 일본정부는 각의에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그 ‘적당한 시기’를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한국병합’이 열강과의 관계에서 일본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이 철도문제를 매개로 만주 진출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이토는 1909년 10월 만주시찰에 나섰다. 그의 목적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Vladimir N. Kokovtsov)와 교섭하여 미국과 러시아의 협력을 차단하는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한국병합’에 대한 양해를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토는 한국인 청년 안중근에게 사살되었다. 일본의 국가적 숙원이었던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개정과 ‘한국병합’을 앞둔 상황에서 이 사건이 일본정부에 미친 파장은 중대했다. 일본의 한국정책에 대한 動搖와 함께 한국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하여 열강의 개입을 불러오거나, 한국 내의 반일운동이 고양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정부는 구라치를 滿洲 현지로 파견하여 한국에 대한 보호관계의 현상 유지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이 사건에 대응하였다. 구라치는 사건의 파장을 고려하여 ‘안중근의 이토 저격 사건’의 의미를 되도록 축소하여 재판을 신속하게 종결해야 한다고 일본정부에 보고하였다. 이러한 구라치의 판단은 일본정부의 방침으로 채택되어 실행되었다. 그 결과 안중근 재판에 열강이 개입하지도 않았고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 관계를 현상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단계가 ‘한국병합’ 실행을 위한 倂合準備委員會 조직과 그 활동이다. 1909년 3월 이토가 통감 사임을 표명하자,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한국병합’에 대해 이토의 동의를 얻은 뒤 구라치에게 ‘한국병합’을 목표로 한 대한정책의 방침을 수립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對韓政策의 基本方針」과 그 실행방안으로 「對韓施設大綱」을 입안하였다. 이는 7월 6일 閣議에서 통과되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한국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이 문서에서 구라치는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병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한국병합’이란 ‘한국이 완전히 폐멸하여 일본 영토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개념 정의하였다. 이후 ‘한국병합’ 정책은 이 방침을 기준으로 실행되었다.

 

미국의 滿洲 진출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은 1910년 7월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일본은 그동안 최우선 적국이었던 러시아로부터 “한국병합에 대해 러시아는 이의를 주장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 뒤이어 일본은 한반도에서 열강의 기득권을 당분간 보장하는 조건으로 영국과 미국으로부터도 ‘한국병합’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 이에 일본정부는 ‘불평등조약 개정문제’에 대한 부담 없이 ‘한국병합’의 실행을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할 적임자로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제3대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한국병합’ 실행 직전인 1910년 5월의 시점에서 일본정부 내에는 「구라치 안」, 「가츠라 안」, 「아키야마 안」의 3가지 「병합안」이 있었다. 미국의 만주 진출 시도, 제2차 러일협약의 상황, 일본의 불평등조약 개정 문제 등을 고려하면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구라치 안」이 가장 현실적인 안이었다. 이에 따라 데라우치는 구라치를 중심으로 ‘한국병합’ 준비를 확정지으려 했다. 그는 내각의 비밀조직으로 관련부처의 관료들로 구성된 倂合準備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구라치는 고마츠와 함께 위원회의 主任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였다. 병합준비위원회는 보름 남짓 동안 구라치의 원안을 토대로 「가츠라 안」과 「아키야마 안」 및 일본정부 각 부처의 의견을 반영하여 ‘병합’ 실행과정에서 예견되는 총 22개 사항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가 ‘한국병합’의 실행방안인 「倂合實行方法細目」의 입안이었다. 이것은 그동안 일본정부에서 한국의 국권 강탈을 위해 준비한 ‘한국병합’을 위한 마스터플랜이자, 한국에 대한 식민통치의 원안이라고 할 수 있다.

 

병합준비위원회에서 준비된 내용을 토대로 ‘한국병합’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데라우치의 무력을 동원한 강압과 이완용 등 일부 친일 관료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7월 말 한국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이완용과 불과 한 달도 안된 8월 22일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실무관료의 활동을 통해 ‘한국 병합’ 과정을 살펴본 본 연구에 의하면 ‘한국 병합’은 일본 정부의 일관된 정책으로 추진되었고 일본 사회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실무관료는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업무 성과를 통해 정책 결정권자의 판단에 영향을 주고, 결정된 정책을 구체화시킨다. 이들은 ‘한국병합’ 정책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시기도 달랐고, 소속도 달랐다. 가장 먼저 참여하여 활동한 구라치는 외무성, 고마츠는 통감부, 마지막으로 참여한 아키야마는 육군성 소속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에서 ‘한국병합’ 자체에 대한 비판이나 의문, 혼란은 보이지 않았다. 각각 별도로 준비된 「구라치 안」과 「아키야마 안」이 구체적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2가지 「병합안」 모두 한국에서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을 것, 조선총독부를 통해 군사적 통치를 할 것 등 큰 틀에서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림12] 아키야마가 데라우치로부터 명령받아 작성한 「한국시정에 관한 건/한국병합에 관한 건」  (일본국립공문서관 소장문서)

[그림13] 일본 내각에서 ‘한국병합’을 공식적으로 공포하는 것에 대해 논의 후 결정한 내용을 일본천황에게 재가받기 위해 작성한 문안(일본공립공문서관 소장문서)

 

이는 일본정부 내에서 ‘한국병합’ 방침에 대해 이의가 없었으며 ‘한국 병합’이 일관되게 추진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병합’에 대해 일본정부 내에서 무관파와 문관파 사이에 특별한 대립이나 차이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병합’이 어느 한순간에 결정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게다가 ‘헤이그 특사 사건’이나 ‘안중근의 이토 저격 사건’과 같이 한국에서 중대한 반일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일본사회의 여론은 항상 일본정부에 ‘한국병합’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는 당시 일본사회가 일본정부의 ‘한국병합’ 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한국병합’에 대해 ‘한일 양국 정부의 합의’, 또는 ‘한국인의 자발적인 의사에 바탕을 둔 병합’이라고 말한다. 또는 ‘한국병합’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이토의 피살을 계기로 갑자기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의 아래 ‘한국병합’이 이루어졌다는 인식이 존재한다. 이러한 인식은 침략 책임에 대한 일본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