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乙巳條約 이후 일본의 ‘韓國倂合’ 과정 연구 : 日本人 실무관료의 활동을 중심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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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乙巳條約 이후 일본의 ‘韓國倂合’ 과정 연구

: 日本人 실무관료의 활동을 중심으로』 (1)

(2016.08. 동국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한성민(근대사분과)

대학원에 진학한 이래 일본 外交文書의 분석을 중심으로 근대 일본의 한국정책을 공부하고 있다. 석사논문은 일본으로 망명한 金玉均에 대한 처우를 중심으로 甲申政變(1884) 이후 淸日戰爭(1894) 직전까지 전개된 일본의 한국정책을 분석했다. 근대 일본의 한국정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필자가 어린 시절 근대 한일관계를 접할 때마다 느꼈던 ‘뭔가의 이상함’이 계속 자극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국가들과 일본열도의 국가들은 지난 역사에서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많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 때문에 한국사에서는 어느 시기든 한일관계를 빼고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한일관계에 관한 내용이 근대로 들어오면 갑자기 너무도 크게 변한다.

한국의 개항 전까지 한국사의 서술에서 일본은 항상 한반도의 국가들 보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수 아래의 국가로 인식되고 묘사되었었다. 하지만 한국의 개항에서부터 일본은 제국주의 초강대국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림1] 조선통신사의 행렬를 묘사한 일본의 판화

[그림2] 운요호사건을 묘사한 일본의 판화

한국(조선)은 丙寅洋擾(1866) 때의 프랑스도, 辛未洋擾(1871) 때의 미국도 개항시키지 못한 나라였다. 그런데 일본은 1876년 침략의 목적으로 강제 개항시킨 이래 한국의 저항을 모두 무력화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1904)을 거쳐 최종적으로 그 국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韓國倂合’(1910)까지 거침없이 달려간 초강대국으로 서술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시야를 조금만 넓혀 한반도를 벗어나 보자. 러일전쟁 이전까지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개항시켰다고 하는 1876년으로부터 한참 후인 1890년대까지도 일본의 국가정책 중 최우선 순위는 자국의 독립유지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이었다. 결코 한국에 대한 침략을 주도할 만한 능력은 없는 국가였다. 하지만 근대 일본이 대외전쟁을 통해 성장한 국가라는 것도 사실이다.

 

뭔가 균형이 맞지 않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계속 되었다. 한국사에서 근대 일본을 과대평가하고 있거나, 다른 쪽에서 근대 일본을 과소평가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약 한국사에서 근대 일본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서 식민지로 만든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근대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한국에 행한 조치 또는 정책들의 앞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강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강제”라는 수식어에서 일본의 ‘거대한 힘’이 이미지화되고, 반대로 한국쪽에 대해서는 ‘필사의 저항’을 했으나, “불가항력” 즉 어떻게 할 수 없었다는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 시기 일본이 정말 그렇게 강했을까.

 

[그림3] ‘한국병합’ 때에 경복궁 근정전 앞에 교차하여 걸린 태극기와 일장기

 

일본의 ‘한국병합’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실행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동안 한국의 지배세력들은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일본의 거대한 힘을 강조해서 나라가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가. 그 후 식민지가 된 책임은 국가운영에 아무런 책임이 없었던 일반 민중이 그들의 희생으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일본의 한국정책은 한국에 대한 다른 열강의 이권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었는데, 열강은 왜 개입하지 않았을까. 또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국가적 노력을 기울였던 일본이 한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식민지화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지 않은가. 국익이라는 것으로 모두 설명되는 것인가. 이해가지 않고, 이상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일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병합’했는가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런 고민 속에서 박사논문의 주제를 ‘한국병합’으로 정했다.

 

지금까지 한국의 근대사 연구는 ‘한국병합’을 개항기와 식민지기로 시기를 구분하는 구분점으로 인식하면서도 그 연구의 상당수는 국권강탈 이전의 국권수호운동, 국권강탈 이후의 독립운동, 또는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편중되어 있다. 일본을 비롯한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과정에 대한 연구는 소수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국권수호운동 또는 독립운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배경으로 서술하는 정도가 많다. 이는 ‘한국병합’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일제 침략의 결과’라는 선험적 인식이 작용한 측면이 크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한국병합’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국병합에 대해 여전히 ‘한일 양국 정부의 합의에 의한 조약 체결’, 또는 ‘한국인의 자발적인 의사에 바탕을 둔 병합’ 등과 같은 잘못된 역사 인식이 반복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반복되고 있는 한일 양국 간의 과거사에 대한 갈등이 이와 같은 과거 역사 인식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의 한국병합 준비와 실행과정을 밝힌 필자의 박사 논문은 첨예한 과거사 문제 해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병합’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급속한 ‘한국병합’을 주장한 ‘武官派’와 이에 반대한 ‘文官派’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이다. 두 번째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에 대해 당시의 國際法에 의거하여 不法性 또는 合法性을 규명하려는 연구이다. 이와 같은 기존의 연구 경향은 상당한 한계가 있다.

[그림4·5·6] 왼쪽부터 메이지 일본 국가원로이자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육군 최고 실력자이자 국가원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한국병합’ 당시 일본 내각총리 가츠라 다로(桂太郞)

 

전자는 권력층의 정치적 결단 또는 경쟁 관계가 부각되는 것과 함께 ‘한국병합’의 역사적 책임을 소수 정책 결정권자의 책임으로 축소시킨다는 문제가 있다. 후자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형성된 당시의 국제법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침략을 정당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경향으로 인하여 일본의 ‘한국병합’의 실제 진행 과정은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主權國家로 존재하고 있던 독립국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다는 것은 결코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특히 ‘한국병합’은 일본의 불평등조약 개정 문제와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저항이라는 한일관계의 측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은 ‘한국병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필수적으로 한국 정부의 채권·채무를 승계해야 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기존의 한일관계를 재조정하고, 한국 정부의 기능을 일본이 담당해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병합’은 결코 당시 일본 정부의 특정한 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일본국민과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동의와 지지 아래 일본 정부가 국가적 역량을 최대한 투입하여 추진해야 했다. 일본 정부가 추진한 ‘한국병합’의 과정과 성격은 정책 결정권자의 활동과 아울러 실무관료의 활동에서 더욱 명확히 나타난다. ‘한국병합’에 대한 정책 결정권자들의 활동은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변화를 보이지만, 실무관료들의 활동은 ‘을사조약’ 이래 ‘한국병합’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 연구가 일본의 ‘한국병합’ 과정을 규명함에 일본 정부의 수뇌부보다는 실무관료의 활동에 주목하려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