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고려 국왕 죽음을 둘러싼 의례와 외교의 연결고리(『고려시대 국상 의례와 조문 사행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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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고려 국왕 죽음을 둘러싼 의례와 외교의 연결고리

 『고려시대 국상 의례와 조문 사행 연구』

(2018.02.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이승민(중세1분과)

고려에 도착한 사신 기복사

『고려사』를 읽다보면 요와 금에서 보낸 여러 명목의 사신들이 등장한다. 책봉을 위한 사신 외에도 ‘하생신사(賀生辰使)’, ‘제전사’, ‘조위사’, ‘기복사’ 등 여러 사신들이 장기간에 걸쳐 고려를 방문했다. 국제관계에 관심을 두고 사료를 읽으면서 이러한 사행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개념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기복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기복에 대한 개념과 상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기복사로부터 문제의식이 출발하면서 고려 국왕의 상장례 절차와 외교로까지 문제의식이 나아갔다. 처음에는 국상에 대한 외교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후 기복사 외에도 국왕의 사망을 알리는 고애사와 요·금으로부터 파견된 제전사, 조위사 뿐 아니라 『고려사』 예지에 남아있는 송 사신의 제전조위의례 등 국상을 둘러싼 일련의 외교 행위들이 갖추어지고 시행된 배경과 그 의미를 풀어내는 것으로 관심사가 확장되었다.

 

고려 국상 의례에 대한 재검토

또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국왕 상례와 관련한 외교를 설명하기에 앞서 고려 국왕의 상장례 절차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고려의 국상 절차를 이일역월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국상 의례를 이일역월으로만 이해하면 그 이후 이루어지는 절차인 소상(小祥), 대상(大祥), 부묘(祔廟) 등에 대해 국상 의례의 흐름으로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중국 진 나라 이후의 중국 왕조에서는 각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주로 이일역월 혹은 기장제복의 단상제와 추가적으로 심상으로 삼년상 기간을 지내는 것이 대개의 예였으며, 고려 역시 현종 대 이후로 이러한 국상 의례 절차를 시행했다고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후기 국상 절차가 흐트러짐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기존의 의례 절차가 지켜지는 것에서 고려 국상이 고려 현종 대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림1]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능(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s://www.cha.go.kr)

 

나아가 국상 의례 절차에 대해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고자 했다. 여기에서는 의례와 예기에서 드러나는 유교적 의례가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는가, 그리고 불교와 유교의 상례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에 대해 규명하고 싶었다.

 

고려 국상이 단상제와 심상 삼년상을 의례 절차의 기본 골격으로 했다면, 그 안을 채우는 구체적인 상례에 대한 내용을 풀어내야 했다. 군주의 상장례는 유교적 문화와 사상에 바탕을 둔 의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일차적으로 국상 의례의 기록을 토대로 『의례』와 『예기』 등에서 확인되는 절차를 확인하고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완전하지는 않으나 대략의 국상 절차를 중국의 의례서를 토대로 시행했다. 다만 원칙적인 의례 절차를 강조하고 정해진 내용을 고수하기보다 일정한 규범 안에서 의례서와 고사, 전례에 기대어 상황에 따라 적합한 방식으로 상장례를 시행했다. 그리고 불교에 바탕을 둔 의례는 단상제 이후 소상재나 대상재, 백일재 등으로 시행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고려의 국상 의례는 기본적으로 유교 문화에 기반을 두고 다른 사상 문화 기반의 의례가 덧입혀져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상 의례가 시행되었다고 해서 고려 사회 전체가 유교적 상장례를 수용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이 사회 전체의 상장례 풍속이 변화했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결국 국상 의례는 상장례의 생사관이나 종교적 측면 보다는 사회의 구조와 정치적 성격-왕위계승, 군주의 지위 등-, 혹은 그것을 구현하는 유교적 문화․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나아가 앞으로 고려의 예제나 의례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의례의 도입과 시행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 내에서 가지는 비중과 의미, 구조, 문화적 영향 등을 두루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상의례와 조문 사행 그리고 기복과 책봉

고려의 국상 의례가 단상제와 심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유교에 기반을 둔 의례가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었고, 국상 의례의 정치적 의미와 예제의 성격이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에서 통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고려 국상 의례를 둘러싼 일련의 사행과 외교 행위들로 나타난다. 국왕이 사망하여 후계자가 즉위하고, 국상 의례가 시행되는 가운데 부고와 사위를 주변국에 알리고 조문사신들을 맞이하는 의례가 진행되면서 국상에 대한 사행은 책봉이라는 외교 형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국가 간 관계의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특히, 전근대 중국 왕조와의 외교는 책봉 관계로 책봉은 실제적 힘의 관계에 따른 계서적 질서에 유교적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외교 형식이다. 고려는 일찍이 중국 왕조들과 책봉관계를 맺어 외교를 유지했으며, 특히 고려전중기 요․금과의 관계는 고려 외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전중기 국상의 외교 의례 절차는 다음과 같다. 고애사를 보내 국상을 알리면 상대국에서는 조문을 위한 사신을 준비했다. 고려전중기 조문 사행은 사망한 국왕의 제사를 위한 제전사[칙제사], 새로이 즉위한 왕에 대한 위문 목적의 조위사[위문사], 국왕이 탈정(奪情)하기 위한 기복사가 파견되는 것으로 정례화 했다. 기복사는 고려 국왕을 임명하는 절차를 시행함으로써 조문과 책봉 사이의 외교 의례로서 책봉 전까지 정치외교적 틈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고려 국상의 심상 삼년상은 곧 요·금의 기복사 파견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본래 기복은 부모상을 당해 해관(解官)된 관리를 관직에 임명하여 복귀하도록 하는 절차이다. 고려 국상에서는 대략 삼년상이 끝나는 시기에 요·금에서 낙기복사와 책봉사를 보내 고려국왕이 기복을 마치고 책봉을 받는 외교 절차가 이루어졌다. 다만 이것이 고려 국상에서 국제관계에서 외교적으로 어떤 규율로서 적용되거나 고려 국왕의 즉위에 대한 실질적인 관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당하고 순조로운 왕위계승을 보여주는 일정한 정치·외교적 의례로서 국내의 상장례와 외교의 연동성과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2]요의 칙제사·위문사·기복사 사료(『고려사』권10, 헌종 즉위년 12월)

 

한편, 고려 후기 원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조문 사행은 급격하게 변화한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 국상은 반상이나 분상 등 시행상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일정 부분 유지되는 반면, 외교 의례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임의적이고 일정한 정례적 형식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하게 고려 후기 고려-원 관계의 혼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고려전중기와의 연속성과 변화 지점 등을 국제정세와 고려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여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한다.

 

국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사왕에 대한 즉위와 책봉이 우선시되었으며, 조문은 대개 원 출신 왕후에게 이루어졌다. 조문의 의례나 내용 역시 달라졌다. 특히, 고려전중기 시호․묘호․능호를 올리는 상시책의(上諡冊儀)는 충렬왕 국상에서부터 묘호 없이 시호를 원에 요청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원의 시호 사여는 국상 의례와는 관계없이 양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고려후기 국왕은 능호로 불렸으며 시호가 사여된 이후에도 칭호가 정리되지 못한 채 능호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고려와 원의 관계에서는 의례 절차에 기반을 둔 외교 사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상과 관련한 사행은 양국의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와 우열에 따라 운영되었고, 때로는 원의 문화적 성격을 반영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고려 내의 의례 및 외교의 변화는 고려시대 의례와 그 정치외교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사왕에 대한 즉위와 책봉이 우선시되었으며, 조문은 대개 원 출신 왕후에게 이루어졌다. 조문의 의례나 내용 역시 달라졌다. 특히, 고려전중기 시호·묘호·능호를 올리는 상시책의(上諡冊儀)는 충렬왕 국상에서부터 묘호 없이 시호를 원에 요청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원의 시호 사여는 국상 의례와는 관계없이 양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 국왕은 능호로 불렸으며 시호가 사여된 이후에도 칭호가 정리되지 못한 채 능호로 불리는 경우가 잦았다. 고려와 원의 관계에서는 의례 절차에 기반을 둔 외교 사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국상과 관련한 사행은 양국의 정치·외교적 이해관계와 우열에 따라 운영되었고, 때로는 원의 문화적 성격을 반영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고려 내의 의례 및 외교의 변화는 고려 시대 의례와 그 정치·외교적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논문은 고려 국상 의례와 그 죽음을 둘러싼 외교 행위를 규명하기 위한 작업이다. 기복사와 조문 사행으로부터 점차 국상 의례의 내용과 정치·외교적 관계성까지 문제의식을 확장하고, 그 내용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앞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 더욱 많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앞으로 논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국상을 비롯한 상장례의 사회적 성격과 인식, 사상적 측면들, 책봉을 비롯한 외교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