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총서] 3.1운동 원인으로서의 무단통치론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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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연구회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 총서를 발간할 예정입니다. 총서는 그간의 연구성과들을 총망라하면서, 3.1운동에 대한 새로운 역사상과 의미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에 총서로 기획된 글 중에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3.1운동 100주년 및 기념총서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한국역사연구회 3.1운동 100주년 기념총서

3.1운동 원인으로서의 무단통치론 재검토

도면회(근대사분과)

 

3.1운동은 왜 1919년에 일어났을까? 우문이다. 초등학생도 알다시피,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통치와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봉기했다는 것이 상식적인 답변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 것일까? 가혹한 무단 통치라고 하면 헌병경찰제도와 태형과 같은 야만적인 통치를 말하는데, 이러한 통치는 꼭 일제 강점 시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제국기에도, 그 이전 세도정치기에도, 심지어는 이승만 정권기나 박정희 정권기에도 가혹한 통치는 항상 존재했다. 태형도 싱가포르에 아직도 존속하고 있음을 보면 꼭 야만적이라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 경제적 수탈도 마찬가지이다. 조선후기 민란이나 동학농민봉기를 말할 때 삼정문란과 같은 수탈을 원인으로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일사분란하게 타도 대상과 싸우는 것이 사회운동이나 민족운동이다. 가혹한 통치나 야만적 수탈을 하더라도 싸움의 대상을 지목하고 사람들을 동일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지도자 또는 지도 조직이 없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에 저항하자고 하여 광화문·시청 등지로 시위하러 나갔는데 아무도 대중들의 불만과 저항을 대변하는 구호를 외치면서 앞장서 지도하지 않는다면 대중은 그저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로 우왕좌왕할 뿐이다. 동학농민봉기에서 동학 조직이나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같은 사람들, 광주민중항쟁기의 들불야학이나 윤상원 같은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다.

 

3.1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전민족적 항쟁이라고 하지만, 그 민족 구성원 대부분이 매일 반복되는 생활을 벗어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려면 누군가 독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구호를 만들어 전파하고 민중을 지속적으로 동원하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민족 전체가 만세 시위에 나설 만한 불만 원인이 광범위하게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3.1운동을 처음에 주도한 세력이 너무나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누구인가? 불교를 제외하면 모두 신흥 종교의 지도자들이었다. 천도교는 1860년대 초에 등장한 동학이 문명개화로 노선을 바꾼 종교이고, 1907년 전후 자료를 보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국망을 앞두고 천도교에 입교하는 상황이 눈에 띈다. 제3대 교주 손병희는 통감부와 대한제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개신교는 영미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을 통해 선교 활동을 통해 확대되었지만, 그보다는 정치적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상공인들에게 더 어필했다. 독립협회 운동 이래 대한제국 황제를 끌어내리려 한 정변 음모에 연루되어 투옥된 이승만, 이상재, 안국선 등 개혁운동가들이 1900년 전후 개신교를 수용한 점을 볼 필요가 있다. 불교는 한국역사상 가장 오래된 종교이지만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인해 불교 승려들은 한성 4대문 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양반들의 잔치 뒷수발, 전염병 처리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박해 당하다가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4대문 출입이 허용되는 등 차별로부터 해방되었다.

 

이들 3대 종교 세력이 보기에 대한제국 지배 체제는 무너졌어야 마땅한 것이었고, 그 붕괴 과정에서 자신들이 지배 권력을 차지할 수도 있으리라는 구상을 했을 법하다. 그런데 그 권력을 일본이 장악하고 10년간 통치해온 것이다. 그 사이에 이들도 전국의 조직과 신도들을 확대해 왔으며 교육계를 통해서도 자기 지반을 가장 크고 넓게 확보하였다. 이제 통치권을 넘볼 만한 위치가 된 것이다. 3.1운동을 초기에 주도하고 각 지방의 민중을 동원한 것이 이들 종교의 지방 조직과 각급 학교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을 보라.

 

다음으로 1919년이라는 시점의 세계적 상황이다. 1914년부터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지만 일본은 이 시기에 전쟁 특수를 타고 호경기를 구가하였다. 일본이 호경기였다면 식민지 조선 역시 어느 정도 경제적 성장의 혜택을 누리면서 쌀 수출하는 지주와 부농, 자본가들이 나름 성장하였다. 게다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부 국유지 분쟁에 연루된 농민을 제외하고 지주와 자영농들이 대체로 토지소유권을 근대적 권리로 인정받았다면 이들은 그 경제적 성장에 걸맞는 정치 사회적 대우를 원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적 분위기도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을 부정하고 다 같이 배려하는 인도주의 사상이 번져 가는 상황이었다. 조선인 지도자들로서는 일본에 대해 독립 아니 최소한 자치라도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질 법했다.

 

둘째는 한국사 연구자들은 ‘무단정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확실하게 규명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 한국 사회의 통치 구조를 민족적 감정을 벗어나 냉정하게 검토해본 적이 없다. 1910년대 일본의 조선 지배에 대한 서술은 그저 ‘악랄하고’ ‘교활한’ ‘일제’ 등의 선험적 표현으로 가득차 있을 뿐, 그 통치가 한국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1910년대 이후 역사를 서술할 때 ‘일제’라고 하지 않고 ‘일본 정부’ 또는 ‘조선총독부’라는 말을 쓰면 뭔가 역사의식이 모자란 역사학자로 취급당할 우려가 있다. ‘무단 통치(정치)’라는 말은 한국인 역사학자가 만들어낸 용어도 아니다. 처음에는 무관 출신의 총독이 지배하는 것을 ‘무단 정치’라 했다가 군사 경찰인 헌병이 국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을 ‘무단 정치’라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정치인들은 일본의 타이완 지배에 대해서도, 재조 일본인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식에 대해서도 ‘무단 정치’란 말을 썼다. 그러니, 그들이 쓰는 ‘무단’과 우리가 쓰는 ‘무단’은 용법상 차이가 있어야 할텐데 지금까지 그런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는 한국사 연구 성과는 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1910년대 일본의 조선 지배가 어떤 방식으로 인민의 저항의식을 유발했고 1919년 3월 1일 이후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동기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전면적이고도 구체적인 연구 성과가 없었다는 것이다. 20년 전 출간된 『3.1민족해방운동연구』에서 그런 방식의 접근이 상당히 구체적 단계까지 진전되었으나, 기본적으로 “제국=악, 식민지=선”이라는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3.1운동 당시에 제출된 선언문이나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여러 대책회의 문건을 다시 검토해 보니 역시 예상한 대로 조선인들의 저항 원인은 단순히 ‘일제의 무단 정치’나 ‘경제적 수탈’로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많이 언급된 원인은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민족적 차별이었다. 특히 일본인 관리와 조선인 관리 사이의 대우 차별, 하층 일본인의 조선인 지역 유지 또는 지도적 인물에 대한 모욕, 조선인 일반에 대한 모욕적 호칭, 조선인을 중요한 지위에 임용하지 않는 등 ‘식민성’이었다.

 

그 다음에 많이 언급된 불만사항은 삼림령으로 인한 단속, 공동묘지 제도, 도살장 이외에서의 도축 금지령, 각종 행정 시설의 번잡함 등 근대적 시설이나 제도를 강행한 데 대한 저항이었다. 즉, 대한제국 국민으로부터 일본 제국의 ‘반국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겪은 급격한 근대적 규율이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하여 3.1운동의 원인은 무단정치, 경제적 수탈 보다는 ‘식민지성’과 ‘근대성’이 교합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이 논문 작성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70년 이상 교조화된 통설의 압력을 벗어나기는 정말 어려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아직도 논문의 얼개만 짜놓았을 뿐, 본문 진도가 나가지 않는 지지부진 상태이다. 약속한 “6월 30일”이 지나 다시 “7월 20일까지는” 하고 마음을 다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