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꾼 가짜뉴스] 투몽인(投蒙人), 고려를 곤경에 빠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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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가짜뉴스

투몽인(投蒙人), 고려를 곤경에 빠트리다

 

강재구(중세1분과)

 

지금 너희 나라 사람 조이(趙彛)가 와서 고하길 일본은 우리나라와 가까운 이웃으로 典章政治가 칭찬할 만합니다. ·이래로 간혹 중국과 사신을 통하였습니다.’고 한다. 고로 지금 흑적 등을 보내 일본에 가서 그들과 和好를 통하고자 한다. 경은 사신을 인도하여 저들의 영토에 도달하게 하라. 경의 충성은 이것으로 볼 수 있으니, 경은 이에 힘쓰라.” 하였다.

 

1266년(고려 원종 7) 11월, 몽골사신 흑적(黑的)과 은홍(殷弘) 등이 쿠빌라이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다. 조서의 지시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조이’라는 인물의 발언이었다. 조서에서는 ‘조이’의 말에 따라, 일본과 화호를 맺고자 사신을 보냈으니 그 길을 안내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일본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는 일본과 인접한 고려를 길잡이 삼아 일본을 초유하고 복속시켜 그의 권위를 만방에 떨치고자 하였다. ‘조이’라는 인물의 고변은 그 의지를 고려에게 드러내기 위한 좋은 근거로 활용되었다.

 

[사진1] 원 세조 쿠빌라이 초상

 

고려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이에 국왕 원종(元宗)은 곧바로 송군비(宋君斐)와 김찬(金贊)에게 명하여 흑적 등 몽골사신을 안내하게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돌아왔다. 원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한 원종은 그 경위를 해명해야 했다. 고려가 일본과 통호하여 자신이 보낸 사신이 일본에 이르는 것을 고의로 막을지 모른다는 쿠빌라이의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실패 경위를 소명하면서, 고려는 평소 일본과 통호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즉 ‘조이’의 증언은 실상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부인하였던 원종의 설명과는 달리, 쿠빌라이의 의심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증폭되었다.

 

쿠빌라이는 고려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고려가 자신의 허실을 들키게 될까 두려워 고의로 일본과의 통호를 방해했다고 여겼다. 이러한 의심들은 앞서 조이와 같이 고려인으로써 몽골에 머무는 이들이 제공해주는 정보에 근거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고려 사람으로 京師에 있는 자가 적지 않다[爾國人在京師者不少]”고 하며, 원종을 힐책하였다. 이에 일본 초유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원종에게 떠맡겨 책임을 지우면서 다시 시험에 들게 하였다.

 

고려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장용(李藏用)은 흑적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 초유를 단념시키고자 했다. 왜냐하면 일본이 몽골의 복속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면 장차 고려에 누가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의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너희가 일본과 교통한다는 것은 너희 나라 사람으로 여기에 와서 사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너희는 예전에 어찌 일본과 일찍이 교통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짐을 속였는가? 너희가 아뢰는 바는 모두 헛소리니 답할 필요도 없다.”

 

쿠빌라이는 조이의 주장을 근거로 원종이 자신을 속였다고 질책하였다. 고려로서는 더 이상 쿠빌라이의 일본 경략 시도를 회피할 수 없었다. 이장용의 우려는 점차 현실화되고 있었다. 곤경에 빠진 것이다.

 

[사진2] <고려사> 반역 조이 열전

 

이렇게 일본 초유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 축이 된 조이는 과연 누구일까? 조이는 『고려사』 반역전에 입전되어 있다. 그의 초명은 조인여(趙藺如)로, 함안사람이라고 전한다.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환속한 뒤에 과거시험을 쳐서 진사에 급제하였다. 후에 몽골로 들어가 수재(秀才)라 불렸고, 여러 나라 말을 잘하여 황제의 처소를 드나들면서 고려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았다고 한다. 그가 어느 시기에 몽골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이와 같은 자는 앞서 쿠빌라이의 언급처럼 수없이 많았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들을 “투몽인(投蒙人)”이라 부른다. 몽골에 투항한 자들은 여·몽 전쟁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그 규모도 상당하여 훗날 요동의 대표적인 고려인 세력으로 성장한 홍복원(洪福源)은 무려 1,500戶에 달하는 민호를 이끌고 투몽하였다고 한다. 몽골군의 침공이 극성이었던 1254년(고종 41)에는 그해에만 무려 206,800여 명이 잡혀갔으며, 급기야 1258년(고종 45)과 1270년(원종 11)에는 고려의 동계와 북계 토착세력이 투몽하여 각각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와 동녕부(東寧府)의 지배층이 되기도 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은 누군가에겐 절체절명의 위기였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투몽인에게 몽골 침략 하의 정세 또한 그러했다. 몽골이 침입하자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책임이 있는 정부는 강화(江華)로 피난하였고, 남겨진 민들은 몽골군의 공습을 피해 산성과 섬에 들어가 견뎌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무능한 정부에 대한 민들의 불신은 팽배해졌고, 전쟁이 지속될수록 많은 고려인들이 살 길을 찾아 혹은 야심을 품고 출세하기 위해 조국을 버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투몽인들의 발생은 몽골이 취한 전략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내부인을 회유해 전세를 유리하게 만들었고자 하였던 몽골은 스스로 내투해 온 고려인들을 우대하였고, 그들의 세력 기반도 유지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길잡이 삼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때로는 고려정부를 압박하고 견제하기 위해 투몽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투몽인 조이의 증언은 원종과 고려 조정 신료들에게 큰 부담을 안긴 ‘가짜 뉴스’였다. 고려는 몽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이들의 주장을 시종일관 “참소(讒訴)”라 항변하였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투몽인 조이가 전달한 ‘가짜 뉴스’의 진위 여부만은 아니다. 당시 일본 복속의 의지가 있던 쿠빌라이에게 있어서 투몽인의 증언은 그 진위와 무관하게 고려를 개입시킬 수 있는 외교적 수단이었다. 몽골의 일본 초유를 둘러싼 갈등의 중심에는 투몽인과 그들의 가짜뉴스가 있었다. 하지만 반문해보자. 과연 ‘가짜뉴스’가 역사를 바꿨는가? 투몽인들이 전해준 고려에 관한 정보의 진위 여부가 과연 쿠빌라이에게 중요했을까? 결국 역사를 바꾼 것은 ‘가짜뉴스’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고자 했던 사람이 아니던가.